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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독교 모자이크

지중해 문명기 5권BR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BR(At of Mosaic and G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BR1장. 모자이크의 역사 1. 콘 모자이크 2.

--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1장. 모자이크의 역사

1. 콘 모자이크

2. 페블 모자이크

3. 오푸스 시그니눔

4. 오푸스 테셀라툼

5. 오푸스 섹틸레

6. 오푸스 무세움

7. 흑백 모자이크

8. 북아프리카 모자이크

9. 기독교 모자이크--오늘 이야기

10. 모자이크 기법

9. 기독교 모자이크(Christian Mosaic)

 

◆1. 모자이크의 쇠퇴(Decline of Mosaic)

 

모자이크 문화가 로마라는 프리즘을 통해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 보자. B.C 2c 로마가 헬레니즘 세계를 흡수한 뒤 헬레니즘 권역에서 유행했던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는 쇠퇴기를 맞았다. 로마와 전투를 치르며 경제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은 돈을 먹고 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늘상 전쟁에 시달리며 경제가 피폐해지니 제대로 발전하기 힘들다. 테세라 모자이크의 중심지역인 헬레니즘 세계는 로마의 침략은 물론 로마제국으로 편입된 뒤에도 로마 제국내 권력투쟁의 장소가 되곤 했다. 카이사르가 그리스 본토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해안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군을 물리친 예는 대표적이다.

이런 국면은 헬레니즘권 경제의 결정적인 붕괴로 이어졌다. 직접적인 파괴보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을 지원하는 막대한 예산. 점령군이 예산을 현지조달하면서 빚어진 지역경제의 파탄이다. 요즘도 미국의 전쟁에 현지국가들이 예산을 대는 경우가 많다. 이라크전이 대표적이다. 생산적인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군수지원으로 민간 경제영역의 활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만큼, 건축이나 문화 예술에 투자할 여력을 잃어 헬레니즘 권역 모자이크 산업은 활력을 잃게 됐다.

 

헬레니즘 지역에서 유행했던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는 내란과 각종 침략전쟁에 시달려 쇠퇴기를 걷다 다시 부흥하지만,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소재와 기법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다행히 로마는 그리스문화에 열광했고, 모자이크도 받아들였다. 모자이크 문화는 로마문명의 틀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로마에서 새생명을 얻은 모자이크는 헬레니즘의 전통과 일정부분 궤를 달리했다. 쉽게 피를 반쯤만 이어받았다고 보면 된다.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중심부는 오푸스 무세움에서 보듯이 아름다운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를 받아들여 발전시키도 했지만, 이는 벽면이다. 모자이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닥에는 흑백모자이크를 선호했다. 바닥에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를 설치한다 해도 헬레니즘권의 미세한 재료가 아니라 굵고 잘 다듬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 섬세한 아름다움을 살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정교하게 자른 테세라 모자이크는 그만큼 더 비쌌다. 2c 이후 헬레니즘 권역에서 테세라 모자이크의 영광이 재현되는가 했지만, 3c 말부터 제국의 분할과 재통합 과정에서 치러진 내전, 그리고 이민족의 잦은 침략으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다시 쇠퇴 현상이 나타났다.

 

◆2. 기독교 영향(Influence of Christianism)

 

기독교도 모자이크 쇠퇴에 영향을 끼쳤다. 소재축소에 따른 모자이크 예술의 침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이후 기독교에 심취한 로마는 오랫동안 숭배해온 그리스 로마신을 멀리했다. 천년이상 지속되던 전통이 사라지고 오리엔트의 속주에서 들어온 기독교가 대세를 장악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신들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던 모자이크는 자연히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 로마신이 모자이크에서 줄어든 반면 하느님이 만든 만든 피조물 즉 새, 짐승, 과일나무, 포도덩굴, 포도주잔 같은 상징물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리스 로마신들은 이제 모자이크 기술자들의 손끝에서 떠나버렸다. 그리스 로마 신전을 교회가 대신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교회 바닥 모자이크--6c 작품이다. 새와 올리브 나무, 포도등이 주를 이룬다. 마다바를 비롯한 요르단의 주요 로마도시들은 6-7c 오리엔트의 교회 바닥모자이크를 살펴볼수 있는 최고의 탐방장소다. 마다바 12사도 교회. ⓒ김문환>

기독교 표시 모자이크--새와 자연을 뒤 배경으로 넣었다. 튀니지 바르도 박물관. ⓒ김문환

교회 무덤 망자 모자이크--망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생전의 업적을 간단히 적으며 명복을 빌었다. 튀니지 바르도 박물관. ⓒ김문환

 

그렇다고, 성서의 내용이나 예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바닥에 설치해 밟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입구의 문지방이나 제단 앞에 각종 글자를 배치하는 수준에 그쳤다. 글자는 기둥이나 짐승들이 둘러싸는 모습으로 디자인됐다. 간혹 모자이크로 설치하는 예가 있기도 했지만, 이는 곧 벽면이나 지붕 모자이크로 옮겨 간다. 교회건물에서는 또 사람의 얼굴도 넣지 않았다. 신성하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사람은 일반 저택이나 공공건물에서 목동, 사냥꾼, 건축비를 댄 기부자의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 뿐이었다. 또, 전원과 숲, 농경지, 일상사도 주요 소재가 됐다. 북아프리카 모자이크의 특징인 일상사의 표현이란 게 결국은 기독교의 전파와 맥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비잔틴 제국에서 부흥(Byzantine Mosaic)

 

서로마 제국 몰락 이후 5c 말 서유럽에서 모자이크는 사라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 관할 지역에서 8c 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지리적으로 오늘날 터키, 시리아, 요르단등의 오리엔트와 북아프리카인데, 특히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볼때 요르단과 튀니지가 두드러진다.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지 않았거나, 침략을 받았다해도 곧 비잔틴 제국이 회복해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던 지역이다. 특히 6c 비잔틴제국의 부흥을 가져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절 고대 헬레니즘의 전통을 간직한 모자이크들이 부활됐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초상. 기독교 초기 예수님 얼굴은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라 로마복장의 선량한 목자 모습을 띤다. 브리티쉬 뮤지엄. ⓒ김문환

예수 모자이크. 비잔틴 중세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은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김문환

 

헬레니즘적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적 요소만 담은 모자이크는 교회의 벽면과 천장에서 화려한 기독교 모자이크로 발전해 중세 비잔틴 세계를 풍미했다. 순수 기독교 모자이크의 탄생인데, 그 특징을 들여다 보자. 사실, 4c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의 상류층은 그리스 로마신앙에 대해서도 그렇게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정서적으로 그리스 로마문명의 뿌리를 간직한 채 기독교를 받아들여 양자가 혼합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수많은 그리스 로마신 가운데 하나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질수록 그리스 로마신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만 남았다. 내용면에서는 그리스 로마신화가 기독교의 구약과 신약으로 옮겨졌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바닥모자이크 보다 벽면모자이크가 대세였다. 집 안뜰 분수를 장식하던 벽면 모자이크가 교회의 벽면과 천장으로 연결돼, 기독교 모자이크를 대변하는 예술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런 추세는 5c를 거치면서 로마, 밀라노, 나폴리, 테살로니케등의 교회에 두루 퍼졌다. 특히, 밀라노에 이어 5c 서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 이곳에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천장 기독교 모자이크가 집중적으로 남아 모자이크의 역사를 들려준다. 황금색을 기조로한 교회 천장과 벽면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비잔틴 제국 관할의 시칠리아(훗날 바이킹이 건설한 노르만 왕조), 로마 카톨릭의 교황청이 자리한 로마에서 중세 화려하게 꽃폈다. 서로마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기독교 모자이크는 미세한 테세라를 사용해 오푸스 베르미쿨라툼의 절정을 보여줬다.

 

비잔틴 교회 천장 모자이크--서로마제국 멸망당시 수도였고, 이후 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게르만족으로부터 되찾아 비잔틴 관할이던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황금색을 기조로 찬란한 모습을 연출한다. 라벤나. ⓒ김문환

 

◆4. 이슬람 제국에서 모자이크

 

놀라운 사실은 비잔틴 관할의 오리엔트에서는 7c 말 이후 이 지역이 이슬람제국으로 넘어간 뒤에도 모자이크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4명의 정통 칼리프시대를 지나 첫 이슬람 왕조인 움마야 왕조의 8c초는 물론 이슬람 2대 왕조인 압바스 왕조의 8c말 까지 모자이크가 비잔틴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 왕궁등에 설치됐다. 이슬람시대라고 해서 오늘날의 기독교식 종교갈등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움마야 왕조를 세운 무아위야의 최고위직 신하는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인이었다. 압바스왕조 아래서도 기독교는 살아 남았고, 교회건축이 이뤄졌다. 8c 이슬람 시대에도 비잔틴 교회건축시 바닥 모자이크를 시공했다. 튀니지와 특히, 요르단 지역에 남은 6-8c 교회 바닥 모자이크는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이은 최후의 모자이크로 기록된다.

 

아랍어 모자이크(?). 가젤 두마리가 대추야자 나무아래 있는 풍경 위로 오른쪽에 그리스어로 교회 모자이크 시공 기금을 댄 인물 사올의 이름이 보인다. 맞은 편 왼쪽에 적은 문구가 관심의 대상. 해석이 둘로 갈린다. 팔레스타인 지역 기독교계 주민들이 사용하던 아람어의 한종류란 해석이다. 둘째, 아랍민족이 사용하던 초기 아랍어라는 지적이다. 이 설을 따를 경우 '비살라메흐, Bisalameh(평화롭게)'라고 읽힌다. 지중해 전체에서 아랍어를 모자이크에 사용한 첫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요르단 네보산 엘 무하예트 봉우리 꼭대기 세인트 죠지 성당 바닥을 장식하던 모자이크다. 요르단 네보산. ⓒ김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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