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음주에 해외연수를 떠나게 되어 있는데, 막바지 준비를 하랴, 또 행담도 의혹을 비롯한 법조 현안 챙기랴 조금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부터는 잠시 휴가를 내어 고향을 다녀오기도 했고요.
그 사이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 부회장 사이의 대화를 불법 도청해 녹취한 이른바 X-파일이 보도되면서 세상이 시끌시끌하군요. 사실 누구나 정보기관들이 도청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정리된 실체가 공개되면 받는 느낌이 다르죠.
이번 일로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실명이 녹취에 등장한 사람들 가운데 상처가 나지 않는 사람이 없을 듯 합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녹취록에 등장하는 검찰 인사들에 대해서도 알아보라고 했다니 검찰 내부에서도 감찰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번 일로 가장 가식적인 실체가 극적으로 드러난 사람은 홍석현 주미대사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삼성그룹이야 이미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불법 자금을 가져다 준 것을 비롯해서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스캔들에 휘말렸던 게 사실이고요, 그렇게 본다면 이학수 부회장의 말이나 그를 통해 전해진 이건희 회장 등의 언행은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홍석현 대사는 다르지요. 물론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고 구속 수감된 적도 있고 또 주민등록 위장 전입을 해가면서 불법적으로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의 별장을 산 일로 구설에 오른 적도 있지만 이번 건 하고는 조금 수준이 다른 일 같습니다.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홍석현씨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물론 저를 놀라게 했지만, 그보다 더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이번에 그 일이 공개된 뒤 홍씨가 한 말들입니다. 공인으로서의 기본적인 덕목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홍씨는 먼저 MBC가 이 사건을 보도하겠다고 하자 삼성 이학수 부회장과 함께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지요. 자신이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사생활 침해 같은 것을 이유로 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특파원들을 만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그런 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다 "여러분은 9년 전 식당에서 나눈 얘기를 기억하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합니다.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석에서 나눈 대화가 공개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동료 기자의 보도에 나온 내용이라 전체 발언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식당에서 그런 류의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길래, 아니면 일상적으로 식당에서 이학수 부회장 류의 사람들을 만나서 하는 대화가 그런 것이었길래 그런 것인지 이 정도의 중대한 사안을 놓고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변명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더구나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하면서 이 대화의 성격을 '사석에서 나눈 대화'라고 규정짓고 이에 대한 언론 보도를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인식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치 자신의 말과 행동은 별 것이 아니었는데 세상이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식의 대응은 적잖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언론사 사주를 오랫동안 지낸 사람의 사회적 인식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도대체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우리 국가의 안보에 직결되는 중대한 직책인 주미 대사를 맡겨 놓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핵 문제를 다루기 위한 6자 회담이 1년만에 재개되면서 주미대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상황입니다. 주미대사가 단지 자신의 일로 정신이 없다는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공복으로서의 자세, 공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정말 걱정스런 일입니다.
아침부터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며칠이 지난 일이긴 합니다만 홍대사의 말에 대한 생각을 어딘가에 기록이라도 해 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자 적었습니다. 쫄병이 느닷없이 탈영을 해도 상관에게는 이른바 지휘 책임이라는 것이 있고 조금 더 판을 키우면 도의적 책임, 정치적 책임 같은 것이 지도자에게 지워지게 됩니다.
하물며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일로도 책임의 일단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지도자의 자리인데 자신이 직접 저지른 일에 대해서야 재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지도적 자리에 있는 분들 모두에게 이번 일이 많은 것을 느끼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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