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명사, 이름만 듣고 영화를 선택한다고 해서 절대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은 감독 스필버그가 올 여름에는 '우주전쟁'으로 우리 곁을 찾았습니다. '우주전쟁'은 H. G. 웰즈가 19세기말 발표한 화성인의 침공을 다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1938년 20대 초반의 오손 웰즈가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매체였던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했습니다.
갑자기 비상 사이렌이 울리며 화성인의 침공 소식을 뉴스식으로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 이 라디오 드라마에 많은 미국인들이 실제상황으로 착각하고 혼란에 빠졌으며 자살한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하는군요. 아무튼 스필버그는 현대의 기술력을 이용하되 각색이나 변형을 가급적 배제하고 원전에 충실하게 제작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초반기 스필버그는 기발한 상상력과 재미있는 이야기, 화려한 액션 등 그야말로 재미로 똘똘 무장한 작품들로 전 세계 관객을 싹쓸이 해오면서도 이따금 태양의 제국이나 쉰들러 리스트, 아미스타드 같은 심각한 주제의 영화들도 다뤄왔습니다. 전 세계의 남녀노소 관객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는 영향력에 비추어서 스필버그가 그의 영화에 담고 있는 세계관은 마땅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바로 미국 중심주의와 가족주의입니다.
레이(탐 크루즈)는 부두 노동자로 두 자녀를 두었지만 현재는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전 부인이 찾아와 아들과 딸을 맡기고 여행을 떠납니다. 혼자 사는 레이는 배고프다는 딸에게 아무 거나 시켜먹으라고 하고 잠을 잘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책임감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때 바로 폭풍이 몰아치며 이상한 전조를 보이더니 땅속에서 거대한 삼발이 괴물이 솟아올라 광선무기로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속에 막강한 위력을 지닌 정체불명의 괴물이 뛰어들어 닥치는대로 부수고 죽이는 장면은 마치 관객이 그 한가운데 들어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 정도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트레일러 운전자와 하이웨이에서 목숨건 싸움을 벌이는 그의 장편 데뷔작 [DUEL]에서부터 [죠스]를 거쳐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이어지는 그의 연출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그 부분에서는 '천재'라는 호칭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감독도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이 영화는 분명 9.11 테러에서 모티브를 얻고 있습니다. 문명과 합리와는 정반대편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 학살당한 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거대한 히스테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으로부터라도 위로를 받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인디펜던스 데이나 딥 임팩트 같은 이전의 재난영화에서처럼 정부와 과학자 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까지 모두 힘과 머리를 합쳐 외부의 적을 물리치겠다는 투쟁의 의지는 없어져 버린 듯 합니다.
화성인의 침공을 다뤘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이 '우주전쟁'이지만 살륙의 장소는 지구이고 또 지구인들은 화성인들을 맞아 전쟁다운 전쟁조차 벌이지 못합니다.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레이가 자녀들을 데리고 끊임없이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다니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책임한 아버지였던 레이는 자신의 아버지로서의 정체성과 책임감을 자각하게 되고 결국 너무나 허무하게 맥없이 괴물이 무너지는 결말에서는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스토리 또한 진부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점점 해체되가는 가족의 문제를 이런 계몽적인 사고방식과 접근법으로 치유하거나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너무 유치해 보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천재인 스필버그의 한계점 입니다. 영화 초반 다행스럽게 움직이는 차를 구한 레이 가족이 차를 태워달라거나 뺏으려는 피난민들 행렬속에서 저항하는 장면이나 나무밑에서 아빠를 기다리는 레이첼을 데리고 가려는 아주머니의 호의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장면에서는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의 모습마저 엿보입니다.
외계인과 군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겠다고 황소 고집을 부리며 아버지의 손길을 팽개쳤던 아들이 아버지와 동생보다 먼저 엄마집에 도착해 피신해 있었다는 설정은 실소를 자아낼 정도입니다. 탐크루즈의 안정된 연기와 더불어 어느새 11살이 된 다코다 패닝의 깜찍한 연기가 지루한 부분을 많이 가려주기는 합니다. 삼발이 괴물이 결국 작디 작은 미생물에 저항력이 없어 스스로 맥없이 무너진다는 결말은 인간 내면의 공포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스펙타클과 연출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실망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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