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살의 청년 의사 이승복은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얼굴과는 대조적인 면을 여럿 가진 사람입니다. 우선 커다란 얼굴 한가운데서 수줍게 반짝이는 작은 눈매가 그렇습니다. 쉬임 없이 흘러 나오는 눈웃음이 마주 보는 이를 부지불식 중에 미소 짓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이승복씨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커다란 체격이 주는 선입관이 무색하게 맑고 어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신마비 장애인입니다.
장애는 지난 88년에 얻었습니다. 8살 때 미국에 이민 온 뒤 외로움을 견디는 버팀목 노릇을 해준 체조선수 생활이 화근이 됐습니다. 서울 올림픽 한국 체조 대표팀에 끼어 보려고 연습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공중제비를 돌다가 머리부터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승복씨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회고담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여러 날에 걸친 치료 시도 끝에 결국 전신마비가 불가피하다는 판정을 받은 순간을 물어봤습니다. “부모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제가 집안의 맏아들인데 얼마나 실망하실까. 이렇게 이민 와서 온갖 고생 다 하신 것도 다 나 잘되라고 그러신 일인데 이젠 어떻게 살아 가실지…” 몸 다쳐 인생 망가진 사람은 난데 두 번 째, 세 번 째 생각이면 몰라도 장애를 깨닫고 떠오른 첫 감상이 부모님 걱정이라니.
부모님에 대한 바로 그 미안함 덕분에 이 씨는 좌절을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체조에 쏟던 정열을 고스란히 학업으로 돌렸습니다. 콜럼비아대 보건학 석사과정에 이어 명문 다트머스대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됐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활의학과를 지원했습니다. 지금은 미국 최고의 병원으로 알려진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의 수석 전공의입니다.
환자들에게 이씨는 주치의이자 고통을 이겨내는 디딤돌입니다. 몇몇 환자들을 만나봤더니 대답이 한결같습니다. 당뇨로 한 다리를 잃은 한국인 임 모 할머니가 환자들의 기분을 잘 요약해 줬습니다. “이 선생님을 보면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는 결심이 저절로 우러 나와요. 나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저 이는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내가 실망하면 안되지.”
전공의 생활이라는 게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헉헉 거릴 만큼 분주한 일과일 수 밖에 없는데 이 씨는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닌 몸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바빴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잊혀진 옛 꿈을 다시 이뤄내는 일입니다. 그는 지난 해 여름 아테네로 달려 갔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한국 체조 대표팀을 위한 전담 의사를 자원한 것입니다. “한국이 제 조국이잖아요. 88 올림픽 때도 조국을 위해 메달을 따고 싶었어요. 이제는 메달은 따지 못하지만 선수들을 도울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도운 선수들이 경쟁자들을 한 명씩 물리칠 때마다 이 씨의 뿌듯함은 몇 배로 불어 갔습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 선수들이 나를 위해 이겨주고 있구나. 어찌나 고맙던지…”
이 씨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뭘 물어 봐도 예의 수줍은 눈웃음이 흘러나오며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합니다. 의사 이승복의 미래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역시 부끄러움이 가득 한 표정으로 머뭇거립니다. 한참 만에 들릴 듯 말 듯 나온 대답은 역시 그 다웠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조국을 위해 살고 싶어요. 뭐든지 열심히, 1등으로” 그리고는 자기 말이 어색했던지 또다시 눈웃음이 쏟아집니다.
이승복씨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인생을 산다고 말하는 사람 본지 얼마나 됐지?” 곰곰이 셈을 해보니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던 권투선수 홍수환이 마지막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변한 모양입니다. 기자 생활 15년 동안 인생의 목표를 묻는 인터뷰를 수 없이 해 봤지만 부모님과 조국 얘기를 하는 사람 본 기억이 없다니 말입니다. 아마 누가 그런 대답을 했어도 거꾸로 제가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그거 참, 좀 더 반짝 반짝하는 얘기 없나. 진부하게 부모님과 조국이 뭐야.”
하지만 이승복씨가 말하는 부모님과 조국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고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한 몇 시간을 통해 이 청년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애정의 대상이 실제로 부모님과 조국 뿐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이라는 단어에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한지 벌써 오래된 제가 머쓱해질 만큼 그랬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체조협회 분들에게 부탁 말씀 한마디 전합니다. 이 씨가 아테네 때 경험을 되살려 다음 올림픽에도 자원 봉사를 하려고 하는데 협회에 이메일을 보내도 반응이 신통찮다는 겁니다. “아마 협회가 바쁘기도 하고 이런 몸에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겠지요”라는 이 씨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한 젊은이의 꿈도 이루고 협회 활동을 홍보하는데도 좋은 일이니 얼른 답장 주시기 바랍니다. 존스 홉킨스 병원에 물어봤더니 아주 훌륭한 의사라고 합디다.
* 이승복씨에 대한 리포트는 5월 24일 SBS 8 뉴스 테마기획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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