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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자객 후손의 '사죄'

<앵커>

네, 이번 시간은 지난 한주일 동안 가장 눈길을 끌었던 사건사고, 그 뒷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인데요. 올해가 명성황후 시해 백십년이 되는 해인데, 그 사건을 일으켰던 일본 낭인의 후손들이 우리나라를 찾았었죠.

사건팀 이대욱 기자와 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서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번에 온게 명성황후에게 잘못을 빌기 위해서였는데, 눈물 흘리는 장면이 정말 가슴에 많이 남아요.

<기자>

네, 많은 분들이 그 장면을 기억들 하시던데요.

일본 자객의 후손 2명과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10명이 이번에 사죄입국을 했었죠.

다음날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 묻힌 경기도 남양주의 홍릉을 찾았습니다.

마침 이날은 고종의 아들인 영왕의 기제삿날이었습니다.

전주 이씨 종친들은 처음엔 이들의 방문에 당혹해하면서 크게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후손들이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면서 참회의 뜻을 표했고, 종친들도 어렵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이충길/의친왕의 9남 : 역사를 바로 잡겠다면 환영할 일입니다. 그 대신 우리 국민들은 이런 역사적 비애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들은 홍릉 앞에서 선조를 대신해 사죄를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일, 그제인데요,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인 경복궁도 찾았습니다.

[가와노/낭인 외손자 : 실제로 사건의 현장에 와보니, 할아버지의 행동이 정말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모자와 신발을 다 벗고 다시 한 번 사죄의 절을 올렸는데요, 110년만의 참회였습니다.

이들은 어제(12일) 일본으로 돌아갔는데요, 일본 교과서에 명성황후의 시해 사실이 기술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네요.

<앵커>

그런가 하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를 일본 왕이 알고 있었다는 걸 증명해 주는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기자>

네. 지금까지의 일본 주장은 이랬습니다.

명성황후 시해는 대원군과 황후의 갈등 때문에 생긴 조선인 내부의 다툼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이 문서입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두 달 뒤 당시 경성 주재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해됐다', '시해 장소도 침전이 아닌 마당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엔 일본 왕이 직접 보고 결재까지 했다는 표시가 있는데요.

바로 이 '상주'라는 글자인데요, 뚜렷이 나와 있습니다.

윗 상자에 아뢸 주자, 당시 시종장이 일왕에게 보고서를 올렸다는 표시입니다.

[이태진/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천황에게 올렸다는 것은 일본의 권력 핵심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을미사변 혐의자 45명은 모두 무죄로 석방됐는데요, 일본 정부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지금까지도 사과 한마디 없었습니다.

자객들의 후손은 눈물의 사죄를 했는데, 이젠 일본 정부의 차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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