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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누 - 잔인한 복수와 인간의 은밀한 탐욕

정말 오래간만에 글을 올리는군요. 정치부에 와서도 틈날때 영화를 보고 글도 올리리라고 다짐했지만 그리 쉽지는 않더군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맛본 감동과 여운이 너무 깊은 상태에서 4월달에

정말 오래간만에 글을 올리는군요. 정치부에 와서도 틈날때 영화를 보고 글도 올리리라고 다짐했지만 그리 쉽지는 않더군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맛본 감동과 여운이 너무 깊은 상태에서 4월달에 볼 영화를 골라 보았더니 한국영화나 외국영화나 그다지 볼만한게 없었다고 핑계거리 삼으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게 크지 않은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4월 국회가 끝나고 조금 한가한 5월을 맞았지만 어린이날이다 어버이날이다 해서 지나다 보니 5월도 어느새 중반으로 넘어가고 있네요.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19세기, 종이를 만드는 대규모 공장이 있는 외딴섬 동화도에서 사건은 시작됩니다.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가 많고 또 종이 만드는 비법의 노출을 꺼린 강객주(천호진)라는 사람이 이 섬에서 제지업의 기틀을 닦았지만 지금은 조정의 관료를 지냈던 양반 김치성(오현경)와 그의 아들 김인권(박용우)이 주인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최상품을 만들어 임금님께 진상을 올리는 종이를 가득 실은 배가 출항 전날밤 누군가가 지른 불로 홀랑 타버리자 한양에서 토포사 이원규(차승원) 일행이 이 사건을 조사하러 내려옵니다.

선박 사건 해결을 위해 내려온 토포사 일행 앞에 인부 한명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사건을 조사하던 토포사는 마을 사람들의 공포가 7년전에 서학쟁이(천주교 신자)로 몰려 일가족이 억울하게 몰살당한 강객주의 원혼이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당시 강객주는 양반이 아니면서도 재력과 덕망을 겸비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누구인지 신원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주변 사람들 5명이 고발을 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가족이 각각 창에 꿰어서, 물묻힌 종이를 얼굴에 붙여서, 끓는 물에 넣어져서, 머리가 으깨져서, 마지막으로 강객주는 사지가 찢어지는 다섯 가지 형태로 처참하게 몰살됐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뒤 고변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강객주 가족이 당한 방법과 똑같이 살해당하자 마을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하고 범인을 잡으려하는 토포사 일행은 더욱 난관에 빠지게 됩니다. 마을 무당과 주민들은 죽은 강객주의 저주가 실현되는 귀신의 소행이라고 믿기 시작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수사를 벌이고 있는 원규는 절망에 빠집니다.

겉보기에는 사극처럼 보이지만 시대배경만 조선후기로 설정했지 실질적인 장르는 범죄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해서 관객들이 끝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범죄물이나 스릴러의 장점은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나름대로 추리를 하고 의문을 갖고 도대체 범인이 누구일까 , 왜 범행을 저지를까 하면서 두뇌게임을 벌일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마치 유주얼 서스펙트같은 긴장감과 강도는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막판에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허를 찌르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치밀한 구조는 회상장면과 교차편집을 통해 더욱 긴박감을 더해주고 근대 문물이 들어오며 반상의 구분같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는 모습이 대사나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현실감을 더해줍니다.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본 저로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같은 잘 만들어진 원작 소설이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걸출한 스타와 개봉전 소개되는 줄거리 상으로 훌륭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극장에 갔다가 막판까지 끌고가는 이야기의 힘이 없어서 맥이 빠지고 본 사람도 맥이 빠지는 한국영화들이 부지기수인 상황에서 이런 탄탄한 시나리오로 무장한 한국영화이기에 더욱 반갑습니다.

코믹연기로만 승부하다가 모처럼 진지한 역을 맡은 차승원은 처음에는 괜히 이쯤에서 한번 웃기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갖게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배역과 자연스레 일치가 되는 내공을 보여줍니다. 박용우와 마주 앉아 문제를 내고 푸는 장면에서 어려운 문제를 박용우가 맞추자 차승원이 보여주는 표정은 아직 코믹연기의 때를 완전히 못 벗었거나 본능이 코미디 연기에 더 적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장면 한번 뿐이더군요.

차승원의 연기가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최종원, 오현경 같은 원로배우들의 이름값에 걸맞는 중후함이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배우는 박용우입니다. 드라마에서 백마탄 왕자 역으로만 얼굴을 비치다가 여기서는 병약하면서도 고뇌하는 이중성을 지닌 양반가의 자제 연기를 빼어나게 보여줍니다.

의상이나 소품, 세트같은 시대를 재현한 부분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엑스트라 하나 하나의 옷차림이나 동작도 어색한 면이 없었고 제지공장과 목선도 일부러 만든 티가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초반에 불에탄 목선은 7천만원을 들여 꼼곰한 고증을 통해 제작한 실제 목선이었다고 합니다. 살인 장면이나 죽은 시신을 재현한 특수효과도 징그럽고 끔직할 만큼 사실적입니다. 돈을 들인만큼 때깔이 달라진다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대목들입니다.

이런 높은 완성도를 관객들이 제대로 알아본 때문인지 개봉 첫주 예매율 1위를 차지하더니 현재까지 50%가까운 예매율을 보이면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어 반가운 마음입니다.

범죄스릴러의 정석대로 진행되지만 감독의 지나친 욕심인지 모르겠으나 마지막에 주민들의 집단행동과 혈우가 내리는 장면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그 의도가 너무 앞서 생경하게 보여집니다. 차라리 그 장면을 건너뛰고 토포사가 배를 타고 돌아가는 장면으로 마무리 했으면 더욱 깔끔하고 여운도 남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작품이 훌륭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그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설득력있게 교훈을 드러내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추상적인 명언집이나 선전 선동 문구가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지극히 현실적인 매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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