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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헬레네 고향으로

지중해 문명기 4권BRBR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5장. 트로이 함락 BR 1. 트로이 목마 2. 트로이 함락과 대학살 3. 카산드라 4. 라오콘 5.

--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5장. 트로이 함락


1. 트로이 목마

2. 트로이 함락과 대학살

3. 카산드라

4. 라오콘

5. 프리아모스

6. 안드로마케

7. 아스티아낙스, 헬레노스

8. 폴릭세나

9. 헬레네 고향으로--오늘 이야기

10. 아가멤논의 죽음

11. 오레스테스의 복수

12. 고대 그리스의 불륜

 

9. 헬레네 고향으로

 

◆1.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재회

메넬라오스. 지구상 인간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여자와 결혼해 겉보기에는 운좋은 남자. 그리스 문명권 숱한 남정네들, 그것도 평범함 필부가 아니라 각국의 왕자들과 겨뤄 절세가인을 차지한 사랑의 승리자. 그러나 그의 운명은 뒤틀렸다. 결혼 초기에는 신혼의 꿈같은 시절을 보내며 어여쁜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뒤 먼 동방의 트로이에서 사절이 찾아오고... 사절단에는 미남자 파리스가 끼어 있었다. 잘생긴 손님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데... 아! 여자의 마음을 잘못 읽은 메넬라오스. 외할아버지 장례식 참석차 크레타로 갈 때 아내를 두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주인 없는 궁전에서 사랑방 미남 왕자와 아내 헬레네의 눈이 맞은 것은 신이 내린 숙명이었을까? 헬레네는 짐 싸들고 트로이로 줄행랑을 놨다.

 

헬레네를 보고 칼을 들이대는 메넬라오스. 아내의 배신에 대한 분노, 여기에 복수심까지 불타오른 메넬라오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뒤 당시 헬레네의 남편이던 데이포보스의 집으로 쳐들어가 데이포보스를 죽이고 헬레네 마저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알테스 박물관. ⓒ김문환

 

메넬라오스가 느낀 배신감이 어땠을까? 여자로부터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남자는 이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남자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불타오르는데... 어제까지 내사랑이었던 여인이 어느날 갑자기 남의 사랑이 돼 있을 때 느끼는 참담함이란... 사실, 메넬라오스는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것처럼 늙고 추한 남자가 아니다. 세련되고 잘 생겼으며 마음씨도 착한 남자였다. 헬레네가 남편감으로 메넬라오스를 고른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외간 남자가 있는데도 아내를 믿고 출타했다는 데서 그의 맑은 성정을 읽어 볼 수 있다. 처음 아내가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메넬라오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배신감은 곧 복수심으로 바뀌었다. "두고 보자". 당장 형에게 달려갔다.

 

그리스 문명권 최대 강국 미케네의 왕이던 형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결혼당시 오디세우스가 냈던 제안 즉 [헬레네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약속에 응하라고 각국에 통문을 보냈다. 트로이 정벌군이 결성되고, 전쟁을 시작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숱한 사람이 죽어 나갔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헥토르, 아킬레스, 누구보다 헬레네를 보쌈했던 파리스도 죽었다. 이젠 누구를 위한 응징이요,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그럴수록 메넬라오스의 가슴에는 아내 헬레네에 대한 배반과 복수의 쓰라린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복수의 불길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목마작전이라는 아테나 여신의 선물 덕에 트로이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헬레네가 용감무쌍하게 나를 죽여보라고 창을 잡는다. 살려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지만, 죽이라고 달려드는 헬레네의 말에 메넬라오스는 깜짝 놀란다. 더욱 놀란 것은 아내 헬레네의 변함없는 아름다움. 이때 사랑의 신 에로스가 접근해 메넬라오스의 가슴에 사랑을 지핀다. 페르가몬 뮤지엄. ⓒ김문환

 

목마의 뱃속에 숨어 며칠을 기다리다 트로이 사람들이 잠든 새벽 목마에서 나온 아카이아 용사들.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 네오프톨레모스... 다른 용장들이 트로이 시민들을 도륙내는 동안 메넬라오스는 헬레네가 사는 집으로 가장 먼저 달려갔다. 파리스가 죽은 뒤 데이포보스와 재혼해 살고 있던 헬레네. 메넬라오스는 잠자던 데이포보스를 단칼에 벴다. 이어 헬레네를 불러 세웠다. 아! 이여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울분 속에 보내야 했는가? 와신상담(臥薪嘗膽).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새웠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었다. 칼자루를 쥔 메넬라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 헬레네의 가슴을 향해 메넬라오스의 칼이 움직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예측 가능하게 흐르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없다. 밋밋하다. 메넬라오스가 칼을 들이대는 대목에서 헬레네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 평범한 여자라면 살려 달라면서, 잘못했다면서 무릎 꿇었을 것이다. 그러나, 헬레네는 달랐다. 남편과 딸을 내팽겨치고 외간 남자를 따라 나선 여자다. 그 남자가 죽자 다시 그 남자의 동생이랑 살던 여자. 자기 때문에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헬레네는 이미 보통의 여자가 되기엔 너무 험한 인생길을 달려왔다. 헬레네는 가슴을 풀어 헤치며 죽여보라고 당차게 대들었다. 인간의 운명이란 게 자신이 원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 쯤, 원하지 않아도 그리 갈 일이라면 간다는 이치 정도는 체득하고 있던 여인 헬레네. 그녀에게 두려운 게 그 무엇이랴.

 

방패를 든 메넬라오스가 칼을 놓는다. 오른쪽 아래로 메넬라오스의 손에서 떨어지는 칼의 모습이 보인다. 에로스가 가운데서 날며 사랑을 싹틔우려 노력한다. 이 도자기에서는 헬레네가 도망가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도자기 화공은 도망가는 헬레네를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진메넬라오스를 그렸다. 루브르. ⓒ김문환

 

메넬라오스는 순간적으로 두번 놀랐다. 첫번째,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哀乞伏乞)해도 분이 안 풀려 저승으로 보내 줄 참인데 당차게 대들 때. "이여자 어디서 도대체 이런 담대한 용기가 나오는가?" 여기까지는 놀라움일 수 있다. 두번째, "아! 아름답다". 너무 오랜만에 다시 본 아내의 몸. 풀어 헤친 옷가지 사이로 드러난 아내의 가슴. 예전 그대로 여전히 아름다운 헬레네의 젖가슴을 보자 살기(殺氣)가 그만 애정(愛情)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래도 되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가 공중을 한바퀴 휙 돌면서 금색화살을 쏘고 난 다음 상황은 더욱 분명해 졌다. 메넬라오스는 칼을 놓치고 말았다. 더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칼을 놓친 손은 자기도 모르게 헬레네의 손으로 갔다. 이내 허리춤을 부여 안고, 마침내는 가슴을 힘껏 껴안고 마는 게 아닌가! 남녀간, 부부간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 오랜 기간 비극을 불러왔던 두 사람의 갈등 역시 봄눈 녹듯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시 사랑의 불길이 지펴졌다.

 

◆2. 사랑을 확인하고 고향으로

칼을 놓치고 다시 헬레네를 사랑하게 되는 메넬라오스. 메넬라오스가 떨어트린 칼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다시 사랑의 감정에 불타오른 메넬라오스가 칼 대신 헬레네의 손을 잡으러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B.C 470년 작품.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사랑을 확인한 둘은 재결합을 굳게 다짐했다. 이제 둘은 사랑하는 연인으로 되돌아갔다. 20여 년 전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처음 결혼하던 그 시절이 다시 왔다. 메넬라오스의 인격이란... 남편과 자식을 배신하고 떠난 여인을 용서하고 다시 아내로 받아들인 심성. 사랑에 눈먼 바보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용서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도자적 사랑의 쟁취자인가?

 

이 풍진(風塵) 세상 속을 살아가는 범부(凡夫)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과연 부정했던 여인과 다시 손잡을 수 있을까? 글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를 쌓아 나가는 게, 화해하며 같이 가는 게 아름다운 것일지 모른다.

 

헥토르의 죽음으로 종결되는 [일리아드]에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가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일리아드의 후속편 격인 [오디세이아]에 둘이 다시 결합해 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오디세이아] 이외에 일부 전승에서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결합에 대한 해석이 좀 다르게 표현된다. 헬레네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게 메넬라오스의 사랑이 아니고, 아카이아 연합군이 살려 줄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 10여년 동안 아카이아 연합군은 트로이를 함락시킬 여러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 일환으로 오디세우스가 첩자로 두번이나 트로이 성안에 잠입한 적이 있다. 변장을 하고 들어갔지만 헬레네는 그를 알아 보았다. 자신에게 결혼을 신청하러 왔다가 단념하고, 자기 사촌 페넬로페와 결혼한 오디세우스를 헬레네가 몰라 볼 리 있겠는가? 헬레네는 그러나 오디세우스와 그 음모를 고변(告變)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정은 이렇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가 이제 다정히 손잡고 다시 사랑을 맹세한다. 용서와 사랑의 승리자 메넬라오스. 메넬라오스는 아내의 과거를 모두 묻어주고 아내를 받아들인다. 포용력의 남자인가? B.C 450년 작품. 페르가몬 뮤지엄. ⓒ김문환

오디세우스가 첫번째로 왔을 때 헬레네는 시어머니 헤카베에게 알렸다. 그러나, 헤카베는 그를 참(慘)하지 않고 너그럽게 돌려보내 줬다. 목숨을 구하고 두번째 잠입한 오디세우스는 헬레네를 믿고 그녀와 트로이 점령 계획을 논했다고 한다. 여기서 헬레네의 협력에 대한 밀약을 맺어지고...

 

두번째 주장을 계속 인용하면 이렇다. 트로이 함락의 밤. 시논이 화살을 날려 신호를 보낸 게 아니라 헬레네가 성벽으로 올라가 횃불로 테네도스 섬의 아카이아 연합군에게 신호를 보냈다. 더구나 재빨리 자기 집으로 돌아와 남편 데이포보스의 무기를 슬그머니 감춰 버렸다. 그리고, 대문을 열어 놓으니... 전 남편 메넬라오스가 들이닥쳐 손쉽게 데이포보스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어 메넬라오스와 병사들이 헬레네를 죽이려 달려들자 오디세우스가 나서 자신이 첩자로 들어왔을 때 헬레네의 협력 내용을 설명하며 헬레네가 조국을 배신한 게 아니라 납치됐다고 이해시켜 목숨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메넬라오스는 오디세우스의 말을 바로 이해했지만, 병사들은 오디세우스의 설명에도 노여움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간 겪은 고생을 생각해서 그랬을 터인데... 글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술렁이던 아카이아 연합군 병사들이 말문을 열었다. "헬레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살려둔단 말인가? 말도 안돼지. 해치워 버려". 병사들은 칼과 돌을 들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 본 헬레네의 아름다운 자태. 그만 모두들 넋이 빠지고 말았다. "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현신인가!" 결과는? 병사들이 메넬라오스 처럼 칼을 모두 땅 바닦에 떨어트렸다. 아름다움이(美)이 칼(劍)을 눌렀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3. 헬레네에 대한 다른 기록

메넬라오스와 헬레네가 재결합을 확인하고 고국 스파르타로 돌아오는 길도 다른 아카이아 연합군 장수들 처럼 순탄치는 않았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8년간 지중해를 떠돌았다. 지중해를 방랑하는 동안에 특히 이집트에 오래 머물렀는데, 고대 지중해 연안 알렉산드리아 항의 파로스 섬과 근처 고대 도시 카노페는 헬레네와 관련 있다고 한다. 카노페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를 태우고 가던 배의 키잡이 카노푸스에서 따온 이름이요, 파로스는 헬레네가 트로이를 탈출해 스파르타로 돌아가다 풍랑을 만났다는 설에 등장하는 뱃사공 이름이다.

 

얼굴 모습 클로즈업. 다정히 손잡은 둘의 얼굴. 메넬라오스가 다시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는 계기가 됐다는 헬레네의 가슴이 돋보인다. 도자기 화공은 일부러 봉긋하게 강조했을 것이다. 페르가몬 뮤지엄. ⓒ김문환

이런 전승 외에 헬레네의 최후에 관한 수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그만큼 트로이 전쟁에서 헬레네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초 트로이로 간 여인은 헬레네가 아니라 제우스 혹은 헤라가 만들어 준 헬레네의 허상(虛像)이라는 것이 주를 이룬다. 후대에 친(親)헬레네 입장에서 신화를 정리하던 사람들의 주장으로 보인다. 한편, 헬레네가 이피게니아에게 잡혀가 희생당했다고도 한다. 헬레네 때문에 생긴 전쟁에서 이피게니아가 희생당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개념으로 본 전승의 한 갈래다. 신원설화(伸寃說話). 추녀(醜女) 춘향의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한 소설이었다는 춘향전과 같은 배경.

 

 

귀국선에 오르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 손을 잡고 귀향길에 오르는 둘을 그렸다. 둘은 스파르타로 돌아오는데 큰 고초를 겪었다. 무려 8년간 지중해안 여기저기를 방랑하게 된다.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고국으로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헬레네와 행복하게 산 것으로 기록된다. [오디세이아]에 기록되는 모습이다. 여기서 잠깐 헬레네의 인생을 돌아보자. 어릴 적 너무 예뻐 일찌기 아테네의 테세우스에게 납치됐다 풀려난다. 테세우스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설과 처녀의 정조를 간직했다는 설이 엇갈리는 헬레네는 이후 메넬라오스와 결혼해 헤르미오네를 낳는다.

 

파리스를 만난 뒤에는 그를 따라 재보를 모두 싣고 트로이로 간다. 파리스와는 딸 헬레나를 비롯해 부니코스, 코리토스, 아가노스, 이다이오스의 아들 4명을 본다. 이들은 트로이가 함락될 때 모두 죽었다. 파리스가 죽자 헬레네는 데이포보스와 재혼했지만, 여기서는 자식이 없다. 트로이 함락뒤 메넬라오스 품으로 다시 돌아온헬레네는 2명의 아들 니코스트라토스와 메가펜테스를 더 얻는다.

 

일설에는 헬레네가 아킬레스와 결혼했다고 한다. 헬레네의 공개 결혼 당시 아킬레스는 어린애였다. 구혼경쟁에 끼어들 입장이 못됐다. 한번도 헬레네를 본 적이 없던 아킬레스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궁금했다. 이를 안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둘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들의 사랑을 실현해주는 모성애... 이후 아킬레스는 파리스의 화살에 맡아 죽지만, 영생을 얻어 흑해 연안의 한 섬에서 헬레네와 살았다는데, 에우포리온 이라는 아들까지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설을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아킬레스와 헬레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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