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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8. 폴릭세나 ◆1. 아킬레스와 만남
폴릭세나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다. 딸 가운데는 막내다. 앞서 [70. 트로이로스]에서 살펴봤듯이 폴릭세나에 관한 신화는 그녀의 오빠 트로이로스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처음 아카이아 연합군이 트로이에 도착했을 때 예언가들은 트로이로스가 어른이 되기 전에는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아카이아 연합군 장수들은 놀랐다. "아니 그러면 십년 이상 싸워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던 장군들은 아예 트로이로스를 죽여 그런 예언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 행동대장은 물론 아킬레스가 맡았다. 아킬레스는 트로이로스가 여동생 폴릭세나와 함께 성문 밖 우물가로 말에게 물을 먹이러 나올 때 급습하는 작전을 짰다.
어느 여름날. 폴릭세나와 트로이로스가 우물가로 나왔고, 매복해 있던 아킬레스는 단칼에 트로이로스를 쓰러트렸다. 그러나, 폴릭세나는 재빨리 피신할 수 있었다. 아킬레스가 그녀마저 죽이려 달려들었지만 시종들의 도움을 얻어 성안으로 도망쳤다. 오빠가 먼저 죽는 통에 누이는 무사히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폴릭세나는 사력을 다해 살상의 현장을 떠나는데 성공했지만, 한가지를 현장에 빠트리고 말았다. 아니 본의 아니게 남겼다. 어여쁜 자신의 모습. 폴릭세나가 남긴 잔상(殘像)의 위력은 컸다. 아킬레스는 도망가는 폴릭세나를 보고 반해 버렸다. 아킬레스는 앞으로 이런 경험을 더 하게 되는데, 트로이 응원군으로 참전한 아마존 여왕 펜테질레아를 죽이던 순간 연정을 느끼는 엽기를 저질렀다. 아무튼 아킬레스는 폴릭세나를 그리며 어떻게든 그녀를 품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신들은 그의 사랑을 쉽게 실현시켜 줄 뜻이 없었다. 아킬레스가 폴릭세나를 만나 사랑의 불씨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한 것은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야 했을까? 폴릭세나와 아킬레스의 재회와 관련된 얘기는 전혀 다른 전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사연은 이렇다. 트로이 공략 10년째를 맞아 아카이아 연합군은 결정적인 공세의 전기를 맞는다. 귀향하려던 아킬레스가 마음을 바꿔 먹고 참전해 트로이의 지도자 헥토르를 베면서 부터다. 트로이왕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적진으로 아킬레스를 만나러 떠나는데... 이때 혼자 간 게 아니라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물론 여동생 폴릭세나도 동행했다는 것이다. 아킬레스는 거금을 줄 테니 시신을 돌려 달라는 늙은 프리아모스의 간청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헛수고이니 돌아가라면서 들은 척도 않던 아킬레스가 등을 돌리던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프리아모스 뒤에 서있던 폴릭세나를 본 것이다.
아킬레스는 아주 오래 전 일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처음 트로이에 도착해 트로이를 공격하던 시절 칼카스의 예언대로 트로이 왕자 트로이로스를 죽이던 때. 함께 나왔던 폴릭세나도 죽이려고 달려 들었다가 놓치고... 도망가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아! 천진난만한 얼굴의 폴릭세나가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돼 눈앞에 다시 선 게 아닌가! 아킬레스는 눈을 비비며 다시 바라봤다. 한밤중에 트로이에서 사람들이 그것도 왕이 와서 시신을 돌려 달라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여기에 한때 꿈속에서도 가슴에 사무칠 만큼 그리워했던 여인까지 와 있으니... 아무리 천하무적, 무쇠같은 용장의 마음이라도 무엇인가에 홀린 느낌을 가졌을 게 틀림 없다.
폴릭세나의 미모라는 함정에 다시 빠져 버린 아킬레스는 아주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죽음을 부르는 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트로이로 전향해 트로이를 위해 싸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조건은? 무엇 때문에 아킬레스가 조국까지 배반하겠다고 한 것인가? 폴릭세나와 결혼이다. 프리아모스는 반갑게 이를 받아 들였다. 아킬레스는 주저없이 트로이로 갔고, 신전에서 신성한 서약식까지 마쳤다. 안타깝게도 아킬레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 바람에 모든 것은 다시 10년 전처럼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일부에서는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스를 죽이기 위해 신전에서 결혼 서약식을 가졌고, 매복해 있던 파리스가 아킬레스를 죽인 것이라고도 한다.
◆2. 비운의 죽음
폴릭세나와 아킬레스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죽으면서 모든 게 끝나는 듯 했지만, 그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있었다. 조국 트로이를 배반한 헬레노스가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예언을 내놓자, 오디세우스가 스키로스로 달려가 네오프톨레모스를 데리고 왔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버지가 참전한 뒤 외할아버지의 나라 스키로스에 살고 있었다. 사위가 죽은 전쟁에 손자마저 잃을까 염려한 외할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참전한 네오프톨레모스. 혁혁한 공을 세우더니 마침내 트로이 함락시 폴릭세나까지 포로로 잡았다. 2대째 이어지는 악연. 네오프톨레모스는 폴릭세나를 만나자 마자 "아! 이 여인이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던 트로이 공주란 말인가!"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 젖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효자였다.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주고 싶었다. 비록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고향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고 말았지만... 이역만리 타향, 아니 적국에서 한줌 재가 돼 저승으로 간 아버지. 그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인이라면 저승에서라도 맺어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아니 적어도 아버지의 한이라도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네오프톨레모스. 답은 자명했다. 희생의식을 치르면 된다. 망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 고대 사회 순장(殉葬)과 비슷하게 행해지던 풍습이다. "폴릭세나를 죽여 아버지 영전에 바치자."
네오프톨레모스는 포로로 잡은 폴릭세나를 데리고 아버지의 묘소로 향했다. 아킬레스의 묘소에 이른 네오프톨레모스. 무덤 앞에 제단을 만들고, 폴릭세나를 앞으로 끌어냈다. 병사들이 폴릭세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방에서 꽉 붙잡았다. 이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폴릭세나는 의외로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폴릭세나를 바라보던 네오프톨레모스. 말없이 칼을 꺼내 폴릭세나의 목을 푹 찔렀다. 폴릭세나의 목에서 피가 용솟음 쳤다. 폴릭세나의 목숨은 꺼졌다.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폴릭세나의 영혼이 저승에서 아킬레스를 만나 사랑할 수 있었을까? 저승에서 둘의 영혼이 하나가 될 운명이었을까? 너무 처참한 죽음이라서기 보다 아킬레스가 사랑했던 여인이 한둘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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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폴릭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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