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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눈보라.밀리언달러베이비

제가 사는 동네에 사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왕복 4차선 도로와 왕복 2차선 도로가 만나는 곳이죠.출퇴근 시간을 빼면 교통량이 많지 않은 이 곳에는 원래 신호등이 4차선 도로 위에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사는 동네에 사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왕복 4차선 도로와 왕복 2차선 도로가 만나는 곳이죠.
출퇴근 시간을 빼면 교통량이 많지 않은 이 곳에는 원래 신호등이 4차선 도로 위에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늘 작동이 멈춰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서 좌회전을 하거나 가로지르려면 모두들 상당히 조심조심 운전을 해야했습니다.

또 사거리 중간에서 차가 엉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차를 타고 이 곳을 지나다가 신호등이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이제 사거리에 질서가 잡히겠군. 하지만 결과는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좁은 2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섰고, 4차선 도로가 텅 빌 때도 차들은 꼼짝못하고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결국 이 일대 교통 흐름은 엉망이 됐고 며칠 뒤, 신호등은 다시 꺼졌습니다.

사실 겨울이 가기 전에 이 글을 쓰려 했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눈 이야기를 꺼내는데는 그래도 겨울이 제격이니까요.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이 지난(!) 겨울 한 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눈은 절대로 작은 결정들로 그냥 떨어지지 않고, 솜털같은 작은 덩어리로 뭉쳐서 천천히, 제멋대로 내린다. 그 눈송이들은 인간들이 그렇듯이 모두 다르다. 만약 과학자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뽐내거든 그들에게 눈에 대해 설명하라고 요청해보라. 그들은 설명할 수 없다.' ... '어렸을 때 여러분들은 또한 얼음 결정체가 6각형이기 때문에 눈의 결정도 6각이라고 배우지만, 이것은 터무니 없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직육면체의 돌덩어리들로 지어졌기 때문에 정사각형의 밑바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론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은 과학자인 러플린은 경제를 말하기 위해 눈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한동안 생각해 보면서 나는, 눈의 형성이 경제생활과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경제생활도 대단히 아름답고, 단순한 기초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또한 너무나 복잡해서 이런 기초들로부터 예측을 할 수는 없으며, 쉽게 확인하고 측정할 수 있는 몇가지 중요한 대략적 특징들을 갖고 있고, 원시적인 환경 통제만으로도 조작할 수 있지만 달리는 할 수 없으며, 미세한 관리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난다.

여하튼, 경제는 사실 이런 눈보라 ―하늘의 모든 트럼핏들이 내뿜는 환상적이면서도 야만적인 것이라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싯귀처럼― 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차 안에서 들었다. 그것은 매우 기쁘고도 복잡미묘하다. 그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 동네 사거리를 떠올렸습니다.

사거리를 지나는 차량들의 운전자들은 -노선 버스를 제외한다면- 왜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를 지나게 됐는지, 왜 하필 그 시간에 4차선 도로보다 2차선 도로에 차들이 많았는지, 왜 질서와 통제는 효율과 자율을 저해하는지, 또 그런 현상은 도로의 규모와 교통량에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다 해당되는지, 인간 의지와 우연이 배제된 계량화의 의미와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애초 계량화가 불가능하다면 이를 바탕으로한 평가와 판단이 의미가 있기나 한지.

또 저는 일흔다섯 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떠올렸습니다.

매기는 왜 권투가 좋은지, 왜 운명은 끝까지 매기의 편이 되지 못하는지, 그래도 매기는 행복했는지, 과연 그걸 우리가 알아낼 수 있기는 한 건지. 매기는 둘째치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지, 우리 인생의 신호등은 과연 있는 것인지, 꺼진 것인지. 아님 애초부터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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