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1. 트로이 연합군 2. 고대 그리스의 전투 3. 헥토르 1--삶과 죽음--오늘 이야기 4. 헥토르 2--신들의 분노와 시신훼손 5. 헥토르 3--시신송환과 장례 6. 아에네아스 7. 파리스 8. 트로이로스 9. 펜테질레아와 아마존 10. 멤논과 이디오피아 11. 에오스 12. 사르페돈, 돌론 13. 아폴론, 아프로디테, 제우스 3. 헥토르 1--삶과 죽음
◆ 1. 인간 헥토르 아카이아 연합군에 아킬레스가 있었다면 트로이에는 헥토르다. 트로이 프리아모스왕과 왕비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트로이를 이끈 실질적인 지도자로 일리아드에는 묘사된다. 국민들의 신뢰를 받았고, 의회를 주도했다. 신중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깊었던 헥토르는 미시아 지방에 있던 테베의 왕 에이티온의 딸 안드로마케와 결혼했다. 그녀와 사이에 아들 한명을 뒀다. 헥토르는 아들에게 스카만드리오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러나, 트로이 사람들은 그를 아스티아낙스(도시의 왕, 즉 트로이의 왕)이라고 불렀다. 일리아드에 아내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장군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데, 헥토르는 예외다. 헥토르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전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만나는 장면은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과 헥토르의 자상한 면모가 잘 드러난다.
아내 안드로마케는 남편 헥토르를 보자 눈물부터 쏟아낸다. "여보. 전투에 나서지 마세요.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여의었습니다. 아킬레스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지요. 일곱 형제들도 모두 아킬레스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것. 당신도 잘 아시지요? 당신을 잃으면 오직 슬픔만 남을 것입니다. 나를 생각해 전투에 나서지 말고 집에 머물러 주세요. 아빠 없는 자식, 남편 없는 아내를 만들지는 않으시겠지요?"
듣는이의 마음을 적시는 절절한 호소다. 안드로마케는 아카이아 연합군이 헥토르를 죽이려 혈안이고, 헥토르가 죽으면 트로이가 함락될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투에 나서지 말라고 더욱 간절하게 애걸한다. 그러나 헥토르는 결연하다. "나도 곰곰 생각했는데. 전투를 피한다면 무슨 낯으로 트로이 백성들을 볼수 있겠어, 여보. 트로이군의 맨 선두에서 싸워야 해. 빛나는 트로이가 언젠가는 불타겠지. 하지만, 나는 아들이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모든 형제들이 불타는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크게 슬프지는 않을거야. 내 걱정은 오직 당신뿐. 아! 내가 죽으면 당신은 노예가 되겠지. 아카이아 연합군의 야만적인 손에 끌려 아르고스로 가 길쌈을 하고 물을 깃는 고된 일을 할거야. 그리고, 그들의 억센 손에..." 아내 걱정을 하던 헥토르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듣고 있던 안드로마케는 울음을 터트리고... 헥토르는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안아보려 하지만, 아들은 엄마를 따라 울기만 하고...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전쟁의 비극...
그렇게 슬픔 속에 일가족은 최후의 만남을 가졌다. 헥토르가 아들을 안았다가 아내에게 다시 안겨주며 말한다. "너무 슬퍼마오, 인생은 운명이 다하면 용자든 겁장이든 한번은 가는 것. 집으로 돌아가 할 일에나 전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보." 남편이 의연하게 말을 마치자 안드로마케는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어 남편을 보낸다. 하지만, 미소 속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남편. 아!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한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생이별 해야 하는데... 인간은 언제나 이런 비극적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많은 선각자들이 악의 원천이라고 진단했던 미국. 벨룸 아메리카나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사실은 헥토르도 겁이 났다. 최강 아킬레스와 붙을 경우 승산이 없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트로이라는 도시의 책임자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결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내에 대한 따듯한 사랑,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보여 준다. 아카이아 연합군이나 트로이군을 합쳐 단순히 싸움꾼 전사(戰士)로서만 비쳐지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인간의 캐릭터를 지닌 유일한 장군 헥토르의 모습이다.
◆ 2. 헥트르와 大아이아스의 대결
헥토르는 아킬레스가 아가멤논과의 갈등으로 전투에서 손을 뗀 뒤 더욱 맹활약한다. 아카이아 선단 깊숙히 공격해 수만은 아카이아 연합군 병사의 목을 벴다. 제우스가 무척 아끼던 헥토르를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이 열심히 도와준 덕분이었다. 아킬레스가 발을 뺀 전투에서 아카이아 연합군은 곧 헥토르의 손에 끝장 날 것 같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몰렸다. 이때, 아카이아 연합군을 지원하는 아테나와 트로이를 지원하는 아폴론이 만나 모종의 합의에 서명했다. 헥토르와 아카이아 연합군 최고의 장군이 대결을 벌여 승부를 가르자는 것. 양측의 모든 군대가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먼저 트로이 진영에서 헥토르가 나와 대결태세를 갖췄다. 아카이아 연합군에서는? 낭패였다. 아킬레스는 이미 전투에서 발을 뺀 상태고...
헥토르가 외쳤다. "누구든 나와라. 내가 죽으면 내 무기를 가져가되 시신은 돌려다오. 내가 너희 대표를 베면 역시 무기는 내가 가져가고 시신만은 돌려주겠다." 아카이아 연합군 진영이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헥토르의 기상과 고함에 모두 놀라 움츠러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전쟁을 처음 제안했던 메넬라오스가 책임을 느껴 일어났다. "무엄한 지고. 아카이아를 무엇으로 보고 함부로 나서는가. 너를 들개밥으로 만들어 주겠다". 말을 마치고 달려 나가려던 메넬라오스는 그러나,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형 아가멤논이 메넬라오스의 팔을 잡아챈 것이다. "아우야, 경거망동 말거라. 아킬레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헥토르를 네가 대적해서 이길 수 없으리라. 앉거라." 아카이아 연합군은 노장군 네스토르의 제안에 따라 제비뽑기로 헥토르와 대적할 장수를 골랐다.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 大아이아스, 디오메데스... 쟁쟁한 아카이아 연합군 장수 9명의 이름이 올라왔다. 누가 될 것인가?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직접? 너무 늙었고... 오디세우스? 지략은 최고인데 용맹함이 요구되는 결투에서... 大아이아스? 힘은 역발산(力拔山)인데 머리를 당할 수 있을지... 디오메데스? 빠르고 잘싸우지만 힘에서... 뭔가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결정은 내려야 하고. 병사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네스토르가 제비를 뽑았다. 아가멤논의 투구에 이름을 적어 넣고... 결과는 大아이아스(이후 아이아스로 표현). 많은 병사들이 바라는 바였다. 힘이 천하장사로 아킬레스 다음 가는 용맹한 장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이아스는 헥토르와의 대결이 자신도 바라는 일이었다면서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아스는 "헥토르를 무찌르게 돼 기쁘기 이를 데 없다"면서 청동 무장을 갖추고 헥토르 앞으로 뛰어나갔다. 바람을 가르며 먼지를 일으키는 그의 우람하고 용맹한 모습에서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양군 진영 모두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헥토르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둘이 창을 던질 사정거리에 안에 마주섰다. 아이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킬레스 말고도 아카이아 연합군에 어떤 맹장이 있는지 보여주마". 헥토르가 받았다. "공개장소에서 그대를 처단 하리라". 헥토르가 먼저 창을 던졌다. 아이아스의 방패는 힐레 출신의 티키우스가 만든 것으로 일곱 겹의 쇠가죽을 겹친 뒤 청동으로 씌운 최고의 방패였다. 헥토르가 던진 창은 여섯 겹의 쇠가죽을 뚫었지만, 일곱번째 쇠가죽에서 막히고 말았다. 이어 아이아스가 창을 던졌다. 창은 헥토르의 방패를 뚫었다. 헥토르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일단 아이아스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어 둘은 방패에 꽂친 창을 꺼내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아이아스의 창이 다시 방패를 뚫고 헥토르의 목에 상처를 입혔다. 흐르는 피에 아랑곳하지 않고 헥토르가 큰 바위를 들어 아이아스에게 집어던졌다. 이를 피한 아이아스가 더 큰 돌을 던져 헥토르에게 명중시켰다. 헥토르가 나자빠졌다. 싸움이 격렬해져 누군가 죽어야 할 상황에 몰렸다. 전세는 헥토르에게 불리해 보였다.
이때, 헥토르가 휴전을 청한다. 아이아스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인간의 진정한 승부는 없다. 자신이 유리해 보이는 것도 헥토르가 모자라 보이는 것도 모두 신의 뜻. 언제 신의 변덕으로 승부가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아스는 헥토르의 휴전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둘 사이에 휴전이 성립됐다. 아직 둘 가운데 누구도 죽을 때가 아니라는 신의 뜻이었다. 헥토르가 먼저 입을 열어 아이아스의 무공을 칭찬한 뒤, 다음에 다시 붙자는 제안으로 싸움을 멈췄다. 이어 은으로 장식한 칼과 가죽으로 만든 칼집을 선물로 건넸다. 아이아스는 진홍색 허리띠를 답례로 줬다. 살벌한 전쟁판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다. 트로이 전쟁은 원한과 증오에 사무쳐 무자비하게 상대를 죽이기만 하는 잔인한 전쟁이었다. 바람난 왕비를 찾아온다는 대의명분도 어느새 희미해지고, 오직 재물이나 여자같은 남성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치러지는 추악한 전쟁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서로를 적장으로 존중하고 예절을 지키는 사람들의 결투는 색다른 면모다. 호메로스가 오직 증오심 하나로 트로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자신의 조국이라고 여긴 아카이아 연합군을 미화하는 필법에서 벗어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일리아드 전체에서도 이색적인 장면이다. 마치 전후반 90분에 연장 30분의 혈전을 치르고도 무승부 끝에 돌아서며 유니폼을 바꿔 입고 다음 시합을 기약하는 선수들처럼 아름답다. 이라크전이 이렇게 보기좋게 마무리될 가능성은 없을까?
◆ 3. 죽음
헥토르와 아이아스가 다시 만날 일은 없어졌다. 아킬레스의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아킬레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는 말에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울부짖던 아킬레스는 싸늘해진 친구의 시신 앞에서 헥토르를 응징하기로 굳게 맹세한다. 이어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어머니로부터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새 무구를 받아 재참전했다. 헥토르는 아테나 여신의 술책에 말려 마침내 아킬레스와 일전을 치르게 되고... 헥토르는 거기서 죽었다. 헥토르가 죽는 과정은 앞서 아킬레스 편에서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복수심에 불탄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어떻게 훼손하고 학대하는지 들여다 본다. 헥토르는 아킬레스로부터 최후의 일격을 받고 쓰러진다. 눈을 감기전 헥토르는 자신의 시신을 제발 트로이군에게 넘겨주라고 부탁한다. 이미 최후의 결투에 들어가기 전에도 아킬레스에게 이긴 사람은 무구만 빼앗아 갖고 시신은 상대진영에 돌려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주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다.
당시 그리스 문명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잘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줘야 편안히 저승으로 갈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창에 찔려 죽어가는 순간에도 헥토르는 자기 시신을 들개가 뜯도록 내버려 두지말고, 제발 자기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찾아오면 넉넉하게 돈을 받고 넘겨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다시한번 간청했다. 물론 아킬레스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만다. 아킬레스는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일말의 자비심을 보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헥토르의 읍소(泣訴)를 단호하게 자르며 말한다. "웃기는 소리 마라. 돌려주지 않고 들판에서 들개밥이 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으므로써 헥토르에게 더욱 철저하게 복수하고, 트로이 진영을 괴롭히려 한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체념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트로이성 스카이아 성문에서 파리스와 아폴론의 손에 너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마지막 목소리를 남겼다. 그 순간 죽음이 그의 무거운 눈꺼풀을 밑으로 잡아당겼다. 한때 영롱했지만 생기를 잃고 풀려 버린 동공을 덮었다. 부초(浮草)처럼 덧없이 살다 가는게 인생인 것. 헥토르라는 인간이 인생의 막을 내렸다.
헥토르와 아킬레스의 최후 결전은 트로이 성문 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트로이 사람들은 결투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을 비롯해 트로이 사람들은 아연실색(啞然失色). 납빛이 된 얼굴로 오열했다. 서로 부둥켜 안으며 울부짖었다. 헥토르의 죽음은 헥토르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트로이의 운명도 다해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주곡이 아닌가. 얼른 시신이라도 거둬와야 하지만 감히 성문을 열고 아킬레스를 대적해 시신을 찾아올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타까운 트로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타들어가게 만든 대목이다. 전쟁광 아킬레스가 취한 다음 행동은? 헥토르의 시신에 대한 무례. 적장에 대한 예우가 아닌데...
아킬레스는 생명이 끊어져 축 처진 헥토르의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빛나는 갑옷을 벗겨냈다. 그 갑옷은 사실 아킬레스 자신의 것이었다. 파트로클로스에게 빌려줬지만, 그가 헥토르에게 죽으면서 헥토르가 빼앗은 무구였다. 원래 주인에게 돌아온 셈. 여기 까지는 원래 제물건이니 그렇다고 치고... 아킬레스가 갑옷을 벗겨 헥토르를 알몸으로 만들어 놓자, 숨죽여 구경하던 아카이아 연합군 병사들이 우뢰(雨儡)같은 함성을 지르며 구름처럼 몰려들어 헥토르의 시신을 에워쌌다. 그의 알몸을 들여다 봤다. 비록 죽었지만, 헥토르의 수려한 용모와 체구에 모두들 감탄의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창으로 저마다 한번씩 찔러 보는게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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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헥토르 1--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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