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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고대 그리스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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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4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2(
트로이 연합군)


1. 트로이 연합군

2. 고대 그리스의 전투--오늘 이야기

3. 헥토르 1--트로이의 희망

4. 헥토르 2--시신훼손

5. 헥토르 3--죽음과 장례

6. 아에네아스

7. 파리스

8. 트로이로스

9. 펜테질레아와 아마존

10. 멤논과 이디오피아

11. 에오스

12. 사르페돈, 돌론

13. 아폴론, 아프로디테, 제우스

 

2. 고대 그리스의 전투

 

◆1. 상설군이 없었다.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대결하던 미케네 시대 전투에 대한 기록은 미케네의 벽화나 호메로스가 B.C 8c 기록한 일리아드등을 통해 전해진다. 이시기는 왕이 있었고, 왕의 명에 따르는 군대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B.C 5c 고전기가 되면 그리스 사회 체제와 전쟁 수행방식이 달라진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군사제도와 전투에 대해 살펴본다.

 

브리티시 뮤지엄. B.C575년 작품. 전투장면. ⓒ김문환

고전기 그리스 군사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상설군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일반 시민들이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로 나가는 시스템이었다. 농민, 상인, 수공업자, 문학가, 예술가... 18살에서 60살에 있는 시민은 언제라도 조국이 부르면 창칼 들고 달려가야 했다. 그러나 실제 50세 이상은 소집한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 기록된다. 노예나 외국인은 군역을 지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질 리 없었다. 각종 현물을 바치고 군역을 면제받는 일도 허용되지 않아 백골징포(白骨懲袍) 같은 균역법의 폐해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민란이 일어날 일도 없었으리라... 장군들이 이용한 전차(戰車)는 미케네 벽화를 근거로 볼 때 B.C 15c 무렵으로 보인다. 오리엔트에서는 이보다 앞선 B.C 2천년경 부터 사용됐다. 물론 전투의 주역은 전차 뒤를 따르는 보병이었다.

 

 

 

◆2. 시민 스스로 장비 마련

 

갑옷, 투구, 칼. 로마 박물관. ⓒ김문환

중무장 보병(중장보병, 호플리테. Hoplite. 큰 방패 호플론, Hoplon에서 유래된 말). 방패, 창, 갑옷, 투구로 온몸을 칭칭 둘러맨 뒤 전투에 나서는 병사를 말한다. 방패는 나무로 만들고 청동을 씌워 직경 90cm에 무게가 9kg 정도 나갔다. 창은 길이 2m-2.4m나 됐다. 칼은 허리에 찼고, 청동으로 만든 18kg 무게의 갑옷(일부는 가죽갑옷)을 입었다. 청동 투구. 청동 정강이 받이. 발목까지 올라오는 군화. 이렇게 중장비로 제몸은 보호하면서 남을 죽일 준비를 마쳤다.

문제는 중무장 보병들은 군장비를 본인이 직접 마련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방패며 창이며 주는 게 아니었다. 이런 군사장비들은 값이 꽤 나갔다. 그래서 군장비를 갖춰 전투에 나간다는 것은 최소한 중농(中農) 이상의 재력을 갖춰야 가능했다. 국민스스로 장비를 마련해 전쟁하는 시스템. 쉽게 나와 내 가족, 우리사회의 안전은 스스로 지킨다는 민병대, 자발적인 독립군을 연상하면 쉽다. 장비를 마련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 보통 황소 6마리에 해당하는 돈이 들었다고 한다. 장비만이 아니다. 식량도 스스로 조달해 지고 다녀야 했다.

해외 원정등을 제외하면 국가에서는 군량미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유층은 무기와 군량미를 지고 따라다니는 노예를 데리고 다녔다.

 

◆3. 중무장 보병 중심

 

미케네 시기까지 중무장은 장수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아르카이크기를 거쳐 고전기로 들면서 철기가 보편화되고, 살기 넉넉해진 시민들도 차츰 중무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부유해진 상인이나, 농민들이 중장보병대를 형성해 전투를 치르면서 자신들이 공동체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국을 위해 몸바쳐 싸우는 것을 큰 영예로 여겼다. 당연히 전투가 아닌 평시에도 민회등을 통해 발언권을 높이는 계기가 마련됐다.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해서 중장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았다. 이들은 기본적인 전투도구를 들고 인해전술로 외곽에서 중장보병을 도와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창병이나 활을 쏘는 궁수는 직접 교전하지 않기 때문에 장비도 보잘 것 없고, 신분도 낮은 사람들이었다. 말을 타는 기병은 말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부유층 몫이었다. 지휘관도 부유층이 맡았다.

 

머리 묶고 무장 갖춰 출전. 루브르. ⓒ김문환

중무장 병사들은 방진(方陳, 직사각형) 일명, 팔랑크스(Phalanx) 대형으로 뭉쳤다.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창을 든 병사들이 줄을 맞춰 어깨와 어깨를 걸치고 나란히 선다. 이렇게 8줄이나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직사각형이 형성된다. 가장 강한 병사들이 맨 앞줄에 섰는데, 용기있게 적군과 몸을 부딪치며 밀쳐야 하기 때문이다. 또 맨 뒷줄에도 강한 병사들을 배치했다. 가운데줄 병사들이 겁먹고 뒤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병사들 개개의 힘이 아니라, 전체의 힘으로 싸우는 전술, 즉 단체전이었다. 맨 앞줄에서 직접 방패와 방패를 맞대고 밀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초등학교 운동회 기마전을 떠올려주는 대목이다.

수십 수백명이 직사각형으로 줄이 맞춰져 도망갈래야 갈 수도 없었다. 앞줄이 무너지면 뒷줄이 밀고 올라가야 했다. 어차피 움직일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다면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밀고 갈 수 밖에 없다. 아주 잔인한 전투방식이었다. 또, 힘을 모아야 살기 때문에 진한 전우애와 연대의식이 싹텄다. 이렇게 8줄의 방진대형으로 양측이 평야에서 맞붙어 단시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전쟁을 치렀다. 로마의 군단에 패하기 전까지 그리스의 방진대형 보병 전투법은 지속됐다. 평소 강인한 육체를 길렀던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은 그리스 안에서도 최강으로 꼽혔다.

 

◆4. 해군은 부유층 몫

 

해군은 부유층 몫이었다.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이 직접 배를 건조해 국가에 바쳤다. 배를 국가의 돈으로 건립하는 경우라도 운영비용은 부유한 시민이 댔다. 특별한 대가는 없었고, 그냥 사회기부로 여겼다. 해전이 벌어지면 기부자가 함장(트리에라르코스)을 맡았다. 노젓는 사람들은 노예나 하급계층이었다. B.C 5c 2차 페르시아 전쟁 살라미스 해전을 치를 무렵에는 3단 갤리선(트리리메, 2단 갤리선에서 진화. 노젓는 노대를 3층으로 설계. 그만큼 더 많은 노를 달아 빠르게 움직임)이 나왔다. 여기에는 대략 2백여명이 탔다. 170명은 노잡이요, 정작 전투가 붙었을 때 싸울 중무장 보병은 10여명. 나머지 20여명은 항해등에 필요한 인력이었다. 배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에 최대한 배를 가볍게 했고, 최고속도는 시속 24km를 낸 것으로 보인다. 장거리 원정을 떠날 때는 식량이나 보급선을 별도로 대동하고 다녔다. 해전 초기에는 배와 배가 맞닿은 가운데 중무장 보병들이 육지에서 처럼 싸워 승부를 냈다. 그러나, 차츰 배 자체가 무기가 됐다. 뱃머리를 날카롭게 만들어 상대편 배를 들이받아 부수는 전술로 변했다.

 

그리스 시대 배 모형. 튀니지 바르도 박물관. ⓒ김문환

중무장 보병의 대표격이 스파르타였다면,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최고의 해군력을 보유했다. B.C 483년 대규모 은광을 발굴해 거기서 나온 돈으로 3백척의 병선을 건립한 덕분이었다. 중장보병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처럼 해군의 발전도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무기를 마련하지 못해 중장보병이 될 수 없었던 하층 노동계급. 전쟁 승리에 기여하지 못하던 이들은 해군이 발전하면서 노잡이로 일할 수 있게 돼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다. 하층민에게도 민회 투표권이 동등하게 부여되는 기회를 만드는 계기였다. 전쟁이 민주주의를 앞당긴 역설이다.

 

◆5. 신의 뜻을 물어 전투

 

전쟁을 벌일 것인가, 전쟁에 들어가면 언제 전투를 개시할 것인가? 신의 뜻, 신탁(神託, Oracle)에 따랐다. 신의 허락에 이어 좋은 징조를 얻으면 승리 기원제를 올린 뒤에 싸웠다.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전투에 나서는 상대 역시 똑같은 신에게 신탁을 구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게 신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 주는 게 아니다. 신관의 입을 통해서다. 쉽게 표현해 신관이 들려주는 말일 뿐이다. 그리고 신관은 언제나 모호하게 말한다. 듣는 사람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그러니, 신탁을 구한 사람이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전투여부를 결정하는 게 관행이었다.

B.C 490년 페르시아 전쟁 때 마라톤 전투를 앞두고 10명의 장군 가운데 전투 지휘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전투 전날 염소를 죽여 태운 뒤 그 내장을 살펴 승리의 징조를 알아챘다고 한다. 전투 개시. 같은 시간 총사령관 칼리마코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전쟁에서 이기면 숨진 페르시아 병사수 만큼 염소를 바치겠다"고 맹세하고서야 신의 가호가 뒤따를 것이란 자신감을 갖고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 아테네가 대승을 거뒀지만, 페르시아 측도 물론 신탁을 구하고 치른 전투였다.

 

기병과 보병이 얽혀 싸움. 루브르. B.C 6c 말. ⓒ김문환

B.C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르 왕은 부친 다리우스왕의 마라톤전 패배의 치욕을 씻겠다면서 대군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 왔다.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은 아테네는 10년전 처럼 다시 신탁을 구했다. 델피의 피티아가 내뱉은 말은 "아테네가 불타니 나무벽으로 피하라." 나무벽이 도대체 어디인가? 혹자는 예전 아크로폴리스에 나무울타리가 있었으니 아크로폴리스라고 말했고, 다른 이는 나무로 만든 배라고 말했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살라미스 해전을 구상했다. 아테네는 소개됐고, 여자와 어린이는 살라미스 섬으로 피했으며 남자는 배를 타고 해전을 준비했다. 텅 빈 아테네는 불탔지만, 배를 탄 해전에서 아테네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6. 패하면 노예

 

전투에서 패한 국가는 잔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남자는 학살당하고, 여자나 어린이는 노예로 팔렸다. 일리아드에 기록되는 트로이 전쟁시기 뿐아니라 아르카이크기나 고전기에도 노예의 주공급원은 전쟁포로였다. 외국뿐 아니라 같은 그리스인 도시국가와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됐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동안인 B.C 416년 아테네는 에게해 남단의 스파르타 동맹국가인 작은 섬 멜로스를 공격했다. 멜로스는 그리 중요한 나라가 아니었지만, 아테네 입장에서 보면 스파르타에 대한 지원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던 참이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지지철회를 거부한 멜로스를 공격해 섬의 남자들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여자와 어린이는 모두 노예로 삼아 팔아 넘겼다.

 

출전. 아테네 박물관. ⓒ김문환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아테네가 패해 노예로 팔려간 경우다. 멜로스를 물리친 다음해 B.C 415년 아테네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략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라쿠사는 당시 지중해 연안 그리스 문명권 도시 가운데 부유함과 번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세였다. 훗날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나 활약하게 될 시라쿠사를 아테네는 너무 앝잡아 봤다. 자신의 해군력만 믿은 결과다.

알키비아데스라는 유력한 정치인은 시킬리아에 있던 아테네의 동맹국 세게스타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시라쿠사를 공략하자고 민회를 설득했다. 민회의 승인을 얻은 아테네 해군은 시라쿠사로 떠났다. 그러나, 이렇다할 승기를 잡지 못하다 B.C 413년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포로로 잡힌 아테네 군사들을 가두었던 석굴 감옥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최고 문화 선진국 아테네의 노예라! 시라쿠사 여인네들에게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7. 전쟁에도 항명은 있었다.

 

전쟁에도 파업이 있었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전쟁 시기에도 군사들이 장군들에게 항명하는 대목이 여러번 나온다. 아킬레스가 아울리스에서 이피게니아의 희생을 반대해 목숨을 구명해 보려다 성난 병사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화는 유명하다. 알렉산더의 계속되는 진군 명령에 휘하 장군들이 반대를 했고, 알렉산더는 항명하는 장군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지만, 결국에는 뜻을 받아들여 인도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했다. 한니발은 진군을 두려워 하는 병사들을 순순히 돌려 보냈다. 로마시대 카이사르의 병사들도 항명한 적이 있으니...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중요 전투에서도 병사들은 자기의 주장을 말할 권리가 있었다. 생존 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해 뱀같은 야생 짐승을 잡아 먹게 한다는 지옥훈련 얘기는 들었지만, 군기 빠진 훈련병들에게 인분을 먹이는 사건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리스 병사. 알테스 박물관. ⓒ김문환

공무원 파업권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막기만 하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허용범위를 벗어나는 경우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 책임을 묻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다. 인권에도 부합하고 현실적으로도 마찰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무조건 막아 놓고, 파업에 들어가면 흐지부지 뒤로 봐주니 법의 권위는 물론 공공질서에 대한 영이 서질 않는다.

공직사회의 책임의식 결여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군사들도 파업을 했는데... 법으로는 공무원 파업을 허용해 인권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파업이 거의 없어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일이 드문 프랑스 공직사회를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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