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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0

&nsp; &nsp;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참전,3.사랑,4.브리세이스,5.헥토르와 대결,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11,12,13. 올림픽 1,2,3,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33,34,35,36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8,9,10,11--오늘 이야기

37.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35.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0. 영화와 역사사이 4

 

◆ 1. 록사네가 흑인?

 

영화 [알렉산더]의 배역 가운데 가장 눈에 거슬리는 대목은 알렉산더와 결혼한 첫번째 부인 록사네다. 검은 피부로 흑인 혼혈의 인상을 심어 주는데... 이는 진실과 부합하는 내용일까? 혹시 잘못된 역사해석에서 오는 왜곡은 아닐런지. 알렉산더가 록사네를 만난 지역은 박트리아 즉 오늘날 중앙아시아다. 키르키즈스탄이나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이곳에는 오늘날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남부 인도로 내려와야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살지만, 알렉산더는 남부 인도로 내려간 적이 없다. 인더스강에서 철군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알렉산더가 박트리아인들과 화해를 축하하는 공연장에서 흑색피부의 록사네에게 반해 결혼하는 것으로 나온다. 알렉산더와 록사네가 공연도중 만났다는 설과 알렉산더가 박트리아와 화해하기 위해 정략결혼 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찌됐든 양측이 화해를 하고 평화를 맺었으니까 공연도 이뤄진 것이므로 큰 틀에서는 정략결혼설이 더 적합해 보인다. 문제는 록사네가 검은 피부를 가진 혈통이냐 하는 것.

 

다리우스 3세의 얼굴. 오늘날 이란지역에서 보는 모습 그대로다. 페르시아 계열 남자가 이렇게 생겼으면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록사네는 페르시아 혈통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서쪽으로 이집트와 터키, 오리엔트 전역, 동으로는 박트리아와 간다라, 인더스강 유역까지 지배했다. 지배지에는 사트라프(총독)를 남겼다. 총독은 페르시아 혈통이다. 총독은 실질적으로 현지에서 독립 왕국의 왕노릇을 했다. 페르시아 왕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고 세금을 바치면 된다. B.C 331년 과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붕괴됐지만, 과거 페르시아 왕에 의해 임명된 각지의 총독 가운데 일부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 록사네의 아버지 옥시아르트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박트리아 고산지대를 배경으로 결사항전의 자세를 굽히지 않아 현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알렉산더를 크게 괴롭혔다. 인도 정벌이라는 먼길을 떠나지 못하고 발목 잡힌 알렉산더가 서둘러 옥시아르트레스와 강화를 맺고 그녀의 딸 록사네와 결혼한 것이다.

 

록사네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에서 다리우스 3세의 왕비인 스타티라 다음가는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런데 검은 피부설정은 역사적 진실 여부를 떠나 영화에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또, 페르시아 제국이나 기타 지역에 대한 서양의 우월감이나 의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다. 더구나 알렉산더가 록사네를 강제로 취해 첫날밤을 보내는 듯한 구성은 극적 흥미를 돋우려 한 것이라 해도 상식을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정복자의 아내로서 평화조약의 결과물로서 아내가 취할 행동으로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른다. 록사네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인도 유럽어족으로 오늘날 이란의 아름다운 미인을 연상하면 좋을 것이다. 흰 피부에 왕방울 처럼 빛나는 큰 눈, 검은 눈동자, 짙은 눈썹, 오똑한 콧날에 가는 입술, 치렁하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

 

헬레니즘기를 거쳐 로마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미이라의 관에 그려진 얼굴이다. 로마지배층인지 아니면 페르시아나 기타 중동지역 출신인지... 모습은 일단 금발이 아니고, 검은 머리에 왕방울 만한 갈색 눈동자, 짙은 눈썹, 흰 피부, 길고 오똑한 콧날, 세련된 치장이 돋보인다. 페르시아 혈통의 록사네나 스타티라는 아마도 이런 모습의 미인이었을 것이다. 루브르. ⓒ김문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트린 뒤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결정했다. B.C 2천 5백년전 수메르 문명기부터 발달하던 역사의 고도(古都). 앗시리아에 이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로 웅장한 도성과 화려한 건물로 가득했던 당시까지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 비옥한 주변 토양에서는 많은 물자가 생산됐다.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를 포기하고 수도로 삼을 충분한 이유가 넘쳤다. 바빌론에서 제국을 다스려 나갈 작정이라면 결혼도 페르시아인과 하는 것이 현명하다. 적은 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현지 지배계층을 포용하는 것이다.

 

현지 지배층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 외에 더 적합한 방법을 찾기는 어렵다. 마케도니아로 돌아갈 꿈을 꾸고 있던 장군들은 순수 마케도니아 혈통을 고집할 수 있지만, 세계 제국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알렉산더에게는 힘있는 페르시아 지배층 왕녀가 천생연분(天生緣分)의 배필(配匹)로 제격이었다. 인도원정 도중 사나운 박트리아에서 B.C 327년 록사네와 결혼하고, 이어 인도원정에서 돌아와 B.C 324년 수사에 맡겨 두었던 다리우스 3세의 아름다운 딸들과 다시 결혼식을 올린 알렉산더의 머리 속에는 늘 이런 세계지국을 그리고 있었다. 록사네나 스타티라나 모두 페르시아의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 2. 클레오파트라가 검은 머리?

 

록사네 배역 설정은 이보다 앞서 지난 50년대 만들었던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려 준다. 역사속 실존 인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오해를 전 세계에 퍼트린 영화 [클레오파트라]. 지금은 아주 늙어 버린 당대 최고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스트레이트 파마 모양새의 흑색머리를 가지런히 빚고 열연한 영화 [클레오파트라]. 이 영화 한편으로 전세계 영화팬들은 '클레오파트라' 를 검은 머리 흩날리는 이집트 여인으로 잘못 생각하게 됐다. 서양 영화는 주기적으로 역사속 인물의 배역 설정에서 편견에 찬 오류를 되풀이 하는 것인지... 록사네를 흑인으로 묘사한 영화 [알렉산더]는[ 클레오파트라]의 전철을 되밟고 있다.

 

타나그라 조각상. 알렉산드리아의 공동묘지를 비롯해 헬레니즘 세계 전역에서 발굴되는 그리스 여인상. 그리스 본토 보이오티아 지방의 타나그라에서 처음 시작돼 '타나그라의 여인'이라고 부른다. 당시 그리스 문명권의 미인 얼굴이라고 보면 된다. 알렉산드리아 공동 묘지에서 출토되듯, 클레오파트라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클레오파트라, 정확히 클레오파트라 7세. 마케도니아에서 온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을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 시작해서 남자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2,3,4...세로 표현하고 왕비나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1,2,3..세로 이름 붙였다. 클레오파트라 외에 [아르노시에]라는 여자이름도 사용했다. 아르노시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어머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실 계보를 보면 아르노시에는 4세까지 클레오파트라는 7세까지 이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 7세로 알렉산더를 호종했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8대손이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이집트 이름이 아니고, 코카서스 인종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 이름이다.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를 어떻게 생긴 여인으로 봐야 할지 답이 나온다. 백옥같은 피부에 치렁한 금발, 그리고 푸른 눈의 여인이다. B.C 3c 알렉산드리아의 지배층 무덤에는 '타나그라의 여인' 이라고 하는 20cm 안팎의 여인네 점토상이 다수 발굴된다. 타나그라는 그리스 본토의 중부 보이오티아 지방의 도시 타나그라를 말한다. 타나그라에서 B.C 4c 처음 시작돼 헬레니즘 세계 전역으로 퍼진 조각 양식이어서 '타나그라의 여인'이라고 불린다.

 

조각속의 여인네 차림새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아름답고 세련된 금발 백인여성을 보여 준다. 옷매무새와 머리모양도 정성을 들여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스 미인들의 전형,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로 온 마케도니아 여성의 전형일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이시스 여신상. 이집트풍이면서도 유럽의 냄새가 물신 풍긴다.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마케도니아 출신 여성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루브르. ⓒ김문환

알렉산드리아는 국제도시였다.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토착 이집트인들이 다수였지만, 유대인이나 과거 페르시아 제국시절 이주해온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아르메니아인, 이집트 남부에서 온 누비아인(흑인)도 살았다. 후대로 가면서 로마인의 유입도 크게 늘었고, 멀리 중국에서도 상인들이 왔다. 그렇다면 혼혈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마케도니아를 비롯해 그리스 각지에서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은 제 1시민으로 상류층을 구성했다. 이들이 사는 구역은 따로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통치기간 내내 그리스인과 이집트인의 결혼을 금지했다.

 

하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순수 마케도니아 혈통을 유지하며 도시내 다른 구역과 궁정을 철저히 갈라 놓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은 순수 혈통 보존을 위해 마치 우리의 신라말기나 고려시대 처럼 형제자매등 왕실 자식들끼리 결혼해 마케도니아의 피를 유지했다. 이집트인의 피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보편주의를 추구했던 알렉산더의 이상과도 다르고 셀레우코스 왕조등의 정책과도 다르지만...

 

아무튼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이집트 고대 고분 벽화 스타일로 나온 장면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 3. 헬레니즘의 수호자 클레오파트라 7세의 운명

 

이시스 여신상. 로마시대 만들어진 이집트 전통의 이시스 여신상이다. B.C 150년 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나일강의 풍요 즉 곡물을 상징하는 이삭과 코브라 뱀이 얹혀 있다. 왼손에는 나일강의 물을 담는 물단지를 들고, 오른손에는 팔목을 감아 돈 뱀을 움켜쥐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이 대략 이랬을 것인지... 길이는 85cm.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 ⓒ김문환

클레오파트라 7세에 대해 좀더 들여다 보자.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는 흔히 사랑 타령으로만 기억하고 지나치는 게 전부다. 카이사르와 사랑을 나누고 안토니우스와 결혼하고... 그러나 그녀는 헬레니즘 제국의 마지막 왕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최후를 장식한 왕이다. 그녀는 능란한 권력가요 진정한 애국자였다. 권력을 위해 사랑을 이용할줄 알았고, 그녀의 최종 목표 즉 로마라고 하는 떠오르는 세계 제국에 맞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는 헬레니즘 세계의 마지막 유산을 지키는 것에 몰두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여성이라고 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로마에 패했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평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지키거나 되찾기 위해 혈전도 감내하던 권력의 화신이자, 기울어져 가는 조국과 헬레니즘 세계의 운명을 되돌려 보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애국자로서 클레오파트라의 면모는 그 동안 스쳐지났던 게 사실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69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태어났다. 클레오파트라가 10살을 갓 넘겨 소녀티를 벗으려 할 때 장래의 남편이 될 로마의 카이사르는 갈리아(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총독이 돼 호전적이고 거친 켈트 계열 갈리아인들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가 성장할 무렵 헬레니즘 계열 다른 나라들은 모두 로마에 복속됐고, 자신의 조국 이집트 마저도 로마의 영향력에 좌지우지되는 허약한 체질로 전락해 바람 앞의 등불같은 누란지위(累卵之危) 상태였기 때문이다. B.C 51년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18살 꽃다운 처녀 클레오파트라는 10살 짜리 큰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면서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됐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유언이기도 했다.

 

폼페이우스. B.C 64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를 무너트린 주역이다.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패한 뒤 자신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도움 준 사실을 기억하고 이집트로 오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가 카이사르에게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패한 것을 알고 암살한다.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로마제국은 카이사르 단독의 독재 통치시대로 넘어갔다. 루브르. ⓒ김문환

그러나 남매이자 부부의 사이는 좋을 리 없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10살짜리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은 B.C 49년 클레오파트라는 축출했다. 권력을 둘이 나눠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B.C 48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한 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자신이 한때 돌봐줬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나라 알렉산드리아를 찾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추종세력들은 폼페이우스가 패한 사실을 알고 그를 죽임으로써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폼페이우스를 잡으러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온 카이사르. 정적의 죽음에 눈물을 보이는 사이비 예를 올릴 겨를도 없이 B.C 47년 국외추방당한 상태이던 클레오파트라를 몰래 불러 들였다. 22살 짜리 아름다운 금발 미인에 카이사르는 넋이 나갔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언대로 클레오파트라와 공동통치 하라는 카이사르의 요구를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이 거부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절대열세이던 카이사르가 구원군의 응원을 받아 승리를 거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죽음을 맞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열두살이 된 다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해 다시 공동 통치제를 확립했다. 이렇게 일을 갈무리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던 6개월 사이 클레오파트라는 아기를 가졌고, 아들을 낳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B.C 46년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2년도 채 안된 B.C 44년 3월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지키려는 공화파 의원들에게 무참히 암살되고 말았다.

 

알몸의 카이사르. 근엄하게 토가를 입거나 군장 차림이 아니라 벌거벗은 몸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군과 싸우면서 세계 지식의 보고 무세이온과 대도서관을 불사른 혐의를 받고 있다.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22살이던 클레오파트라와 만나 사랑을 불태웠다. 그사이에서 나온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는 이집트 왕이 된다. 그러나, 뒷날 카이사르의 친아들인 그는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인생이란게... ⓒ김문환

로마는 친 카이사르파와 반 카이사르 즉 공화파로 갈려 내전 상태로 빠졌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재빨리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남편이자 동생인 15살 짜리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카이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를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삼아 자신과 공동 통치자임을 선포했다. 이집트 내부 문제는 정리되는가 싶었는데, 로마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카이사르파가 카이사르 반대파인 공화주의자들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승리 뒤 카이사르파 안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내분이 생겨 평화가 깨진 것이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와 함께 2차 3두정치에 가까스로 합의해 제국을 3분할 하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본토와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안토니우스는 그리스와 시리아를 비롯한 동방을 차지했다. 동방의 책임자 안토니우스는 B.C 41년 클레오파트라를 오늘날 터키 남부의 타르수스로 소환했다. 재판한다는 명분이었는데 그만 사랑잔치로 변질돼 버렸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이 만남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아내이던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를 차버리고, B.C 37년 클레오파트라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동방의 맹주와 이집트가 결혼한 것이니 세계 최강국이 태어날 운세였다. 영토적으로만 보면 과거 알렉산더가 이룩했던 제국의 판도와 비슷했다. 물론 메소포타미아 내부와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본토는 파르티아 제국의 손에 넘어가 있었지만... 아무튼 대 이집트 제국의 탄생을 축하라도 하듯 둘 사이에 아들 한명이 더 태어났다.

 

타르수스. 클레오파트라의 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처음 만난 장소. 카이사르가 암살 당한 뒤 2차 3두정치를 연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차지했다. 그는 오늘날 터키땅인 타르수스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했다. 그러나 재판은 흐지부지 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클레오파트라의 문]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뒤에 보이는 문이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다. ⓒ김문환

 

마침내 B.C 34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부부는 이집트 제국을 선포한다. 클레오파트라의 큰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르 소생)는 이집트의 왕, 알렉산더 헬리오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쌍둥이 남매 가운데 아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지역의 왕, 두살짜리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작은 아들)는 시리아의 왕,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쌍둥이 남매 가운데 딸)은 키레네 여왕이 됐다. 날로 쇠약해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될 만하다.

 

로마에 밀려 국운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지만, 클레오파트라의 능란한 외교술과 안토니우스를 휘어잡은 매력이 거둔 성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 영토에 더해 오리엔트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다. 비록 오리엔트는 파르티아 제국과 싸워 되찾아야 하는 것이었지만,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이집트 제국을 선포한 3년 뒤 B.C 31년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이듬해 B.C 30년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도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리비아에서 아르메니아까지 이집트 제국을 일궈 헬레니즘 문명을 지키려던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사랑의 여인이자 권력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역사는 39살에 그렇게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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