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전 4. 아킬레스 3--사랑 5. 아킬레스 4--브리세이스 6. 아킬레스 5--헥트르와 대결 7. 아킬레스 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 올림픽 1 11. 올림픽 2 12. 올림픽 3 13. 올림픽 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오늘 이야기 28.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27.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2. 우정과 결혼
◆ 1. 알렉산더, 아킬레스 '부하와 동거동락' 전쟁과 정복만을 생각했던 알렉산더는 전장에서 부하 병사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하기로 이름 높았다. 교통로도 운송수단도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정복전쟁은 끝없는 행군을 의미한다. 사막, 험준한 산악지대, 밀림을 걸어서 지난다. 장비나 보급품은 노예들이 지거나 끌며 날랐다고 하지만, 수백리 수천리를 걸어다닌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을 넘는다. 그것도 폭우가 쏟아지거나 눈이 내리고, 뜨거운 햇볕 아래라면... B.C 6c 이집트를 침공했던 페르시아의 대군이 사막을 행군하다 모든 군사들이 열사(熱沙) 위에서 미이라로 변한 사건은 행군의 비극을 전해주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알렉산더와 관련된 행군 일화도 지금까지 전하는데... 부하와 동거동락하는 알렉산더의 인간미를 보여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알렉산더가 인더스강에서 인도정벌을 포기하고 귀환하는 도중이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남부로 이어지는 죽음의 게드로시아 사막을 통과할 때. 타는 목마름... 작열(炸裂)하는 태양 속에 갈증은 병사들의 목을 점점 조여 왔다. 하나 둘 쓰러져 갔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시게 해줄 오아시스는 어디 있단 말인가? 병사들은 극한 상황에서도 말라붙기 일보 직전의 오아시스를 어렵사리 발견해 투구를 채울 만큼의 물을 간신히 떠서 알렉산더에게 바쳤다.
이물을 알렉산더가 마셨을까?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아니다. 행군은 실패하고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자신이 허겁지겁 물을 마실 경우 병사들의 어려움을 뒤로 한채 저만 살겠다는 소인배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병사들은 오아시스에 남은 물을 갖고 서로 마시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일게 불을 보듯 뻔했다. 알렉산더가 취한 행동은? 물을 마실 수 없다면서 타들어가는 모래밭에 쏟아 버렸다. 화로점설(火爐点雪)이 된 물 한 바가지는 고난을 함께 하는 대왕의 위엄을 살려줬을 뿐 아니라 믿음과 희망의 부메랑이 돼 알렉산더에게 숱한 영광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전리품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으로 획득한 재산을 부하들에게 두루 나눠 줬다. 전투원을 확보하고 추종자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자기 것만 챙겨서야 부하들이 따르겠는가! "재산을 다 나눠 주면 대왕은 무엇을 갖느냐"는 측근의 질문에 "나는 희망을 갖겠다"고 대답했다는 알렉산더. 그 부하는 더 걸작의 명언을 남겼다. "저도 그 희망을 나누겠습니다." 친구간, 상하간 수작(酬酌)이 이 정도는 돼야 세상을 구한다는 허언(虛言)일 지언정 통(通)하지 않을까! 아킬레스 역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묘사된 내용을 보면 전리품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가멤논이 화해를 청하기 위해 막대한 선물공세를 펴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 자신이 갖고 있던 많은 재물을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추모경기에 경품으로 쾌척(快擲)한다. 오로지 무공으로 적을 무찌르는 정복에만 몰두했던 알렉산더와 아킬레스는 닮은꼴이 아닐 수 없다.
부하들을 다루는 방법에서도 알렉산더는 신화속 대선배 아킬레스를 본 떴다. 아킬레스는 아가멤논과 갈등을 겪자 전투에서 빠져 우울증 비슷한 증세로 틀어박혔다. 전투는 아카이아 연합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아카이아 연합군은 그때서야 아킬레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아킬레스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도움을 청할 수 밖에... 트로이 군을 앞에 두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려 한 아킬레스의 '침묵 수법'이 먹혀든 것이다. 물론 어머니 테티스가 알려준 방법이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 문명권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아킬레스의 무용담을 전해 들으며 자신도 언젠가는 아킬레스와 같은 무공으로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마음을 다지곤 했다. 알렉산더 역시 아킬레스를 우상으로 삼아 본받거나 그 행동을 따라하려 했다. 더구나 알렉산더는 무예뿐 아니라 그리스 고전에도 밝아 호메로스의 저작을 끼고 다니면서 읽은 것으로 전해지니 더욱 그렇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전진에 또 전진, 정복전쟁을 지속하는 알렉산더의 강행군을 부하들이 제대로 따라가기는 힘에 부쳤을 것이다. 정세 판단 잘못한 채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한다"고 국회에서 막무가내(莫無可奈)로 외쳤다가 정치무대에서 불명예 퇴진한 전(前) 국회의장을 생각해보면 역시 전진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 보다. 부하들은 무리한 전진만을 독려하는 알렉산더에게 명령 불복종 기미를 보였다. 그럴 때마다 알렉산더는 숙청을 단행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칩거(蟄居)상태에 들어갔다. 알렉산더가 빠지면 전열이 흐트러지고 전투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불안감은 물론 자신들의 용기없음에 수치심까지 느낀 병사들은 더욱 분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알렉산더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고, 알렉산더는 슬그머니 전쟁광의 제자리로 돌아와 군대를 이끌곤 했다.
◆ 2.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우정의 화신 잔인한 전쟁을 통해 정복욕을 실현하고 이를 큰 명예로 여겼던 아킬레스와 알렉산더. 둘은 인간적인 면모에서 아주 비슷한 특성을 하나 보이는데 바로 친구와의 우정이다. 우정(友情).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무엇이든 돕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생과 사를 함께 하는 전우였다. 이런 관계는 개인의 삶을 넘어 조직 전체의 흥망성쇠와도 밀접히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사회적인 관계로 승화되는 우정의 사회학이다. 욕정을 만족시키거나 감정적 유대에 그치고 마는 남녀간의 사랑학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쟁의 난세를 풍미하며 나라를 열고 천하를 다퉜던 2c 중국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의 유비, 관우, 장비의 삶과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우정의 사회화를 전하는 동양의 영원한 고전으로 손색없다.
신화속 트로이 전쟁의 아킬레스에게 파트로클로스가 있다면 역사속 페르시아 정복전쟁의 알렉산더에게는 누가 있었을까? 헤파이스티온이다. 알렉산더는 휘하 장수와 병사를 모두 사랑했지만, 그가 특히 신뢰를 보낸 것은 마케도니아 출신 장수들이었다. 사실 알렉산더 이전 마케도니아의 왕권은 그리 강력하지 못했다. 지방에 할거(割據)하던 각 호족이나 귀족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왕이 죽으면 곧 이들의 대결로 새 왕이 결정되곤 했을 정도다. 왕이라 해도 귀족 출신 장군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 전통에서는 왕이나 왕자도 귀족이나 그 자제들과 친구관계를 형성하며 우의를 다졌다. 우리네 전통에서 왕자나 왕이 신하와 친구사이란 개념은 쉽게 설정되지 않지만, 그나마 호족의 세력이 막강하던 고려 초기를 떠올리면 이해에 다소 도움이 된다.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 장군 가운데서도 유난히 아끼던 헤파이스티온은 마케도니아 귀족출신으로 알렉산더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 역시 어릴 적 아킬레스의 아버지 펠레우스의 궁정에서 아킬레스와 함께 자란 고귀한 혈통의 피붙이다.
알렉산더는 헤파이스티온과 숱한 전투현장을 누비며 고난과 영광을 함께 나눴다. 알렉산더의 과오나 공적 모두 헤파이스티온과 떼서 생각할 수 없다. B.C 334년 그리스에서 출발해 소아시아를 거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본토, 박트리아,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장정(물론 그보다 2백년 전 페르시아의 정복왕 다리우스 1세가 먼저 이 정복 루트를 다녔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B.C 5c 초 아테네 정복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까지 역사에서는 가장 광범위한 지역을 원정한 위대한 정복자였다)도 헤파이스티온이 없었다면 힘든 일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은 알렉산더의 빛이요, 그림자. 희망이자 곧 삶의 의지였다. 혼자만으로는 존재의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찰떡 궁합의 우정. 어느 한쪽이 없으면 안되는 수어지교(水魚之交)였음이 증명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헤파이스티온이 죽으면서 나타나는데... 알렉산더는 트로이 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가 죽었을 때 아킬레스가 보여준 이상의 우정을 과시한다. 이 부분은 다음편 글에서 자세히 살핀다.
◆ 3. 알렉산더의 결혼 1. 록사네 알렉산더는 결혼에 무심했다. 여자를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도통 결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전통상 남자 후계자가 성인이 되지 못할 경우 왕위가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는 게 다반사였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역시 형이 왕이었지만, 변방에서 전투를 치르다 형이 죽자, 그의 두살난 아들, 즉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됐다. 조선의 7대 세조? 그러니,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결혼을 독려할 수 밖에. 정복을 좋아하는 알렉산더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 빨리 후사를 봐 어른으로 키우는게 좋지 않은가! 나중에 현실화되는 올림피아스의 염려는 나중에 다시 살핀다.
알렉산더에게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후사문제를 확실히 다진 뒤 전쟁에 나서라는 충고 따위가 안중에 없었다. 20살에 왕이 돼 정복 전쟁을 시작했지만, 장가를 든 것은 29살이 돼서다. 그것도 정복 전쟁도중 B.C 327년 초 추운 겨울 페르시아 지배를 받던 주(州)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하면서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전투를 조기에 마무리 짓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결혼이었다. 박트리아는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인 간다라 지방 북서쪽에 자리한다. 카자흐스탄 남부와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트르크메니스탄을 합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페르시아 지배지역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알렉산더가 죽자 그리스 군인들은 이 지역에 B.C 264년 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중국역사에서는 대하(大夏)라고 부른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거부하는 박트리아 지역의 반란을 하루속히 마무리 짓고 인도 정벌에 나서야 했다. 인도를 지구의 반대쪽 끝으로 보고 인도 정벌을 마치고 기수를 돌릴 참이었다. 그런데, 강력한 토착부대를 이끄는 페르시아 계열의 박트리아 지도자 옥시아르트레스의 반발이 걸림돌이 됐다. 더 이상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알렉산더는 더 큰 목표인 인도정벌을 위해 평화를 택했다. 방법은 아버지 필리포스 2세도 취했던 '적과의 동침'. 진짜 동침(同寢)인 결혼 정책이다. 필리포스 2세는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에페이로스를 잠재우기 위해 에페이로스의 공주인 올림피아스와 결혼했다. 알렉산더 역시 평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치렀던 것이다. 희대의 영웅 알렉산더와 만난 박트리아 공주의 이름은 빼어난 미모의 록사네.
◆ 4. 알렉산더의 결혼 2. 스타티라 록사네와 결혼한 알렉산더는 한번 더 공식적인 결혼식을 치른다. 이 역시 정략적이다. 원정의 큰 줄기가 마무리된 B.C 324년 2월.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겨울수도이던 수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수사는 오늘날 이란 남부지방으로 이라크와 국경을 이루는 비옥한 평야지대다. B.C 538년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하면서 바빌론에 있던 함무라비 법전을 수사로 가져왔다. 함무라비 법전은 B.C 18c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1왕조 함무라비 왕이 만든 최초의 성문법이다. 키루스 대왕이 가져온 전리품 함무라비 법전을 수사에서 발굴해 낸 것은 프랑스 고고학팀이다. 20c의 문을 막 연 1901년의 일. 한편,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에서 '바빌론의 유수'로 노예살이 하던 유대인을 풀어 준 유대인의 은인이기도 하다.
수사에서 알렉산더와 결혼식을 올린 여인들은 누구인가? 붕괴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조의 왕녀들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 3세가 B.C 331년 과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더에게 패한 뒤 박트리아로 도망가 재기를 꿈꾸다 그 곳 총독이자 사촌인 베수스에게 B.C 330년 죽으면서 찬란한 영광의 막을 내렸다. 다리우스 3세도 죽고, 왕조도 무너졌지만, 왕조의 딸이나 왕비등 많은 왕녀들은 살아 남았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왕녀들을 전쟁 전처럼 고결하게 살도록 보호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왕녀 가운데 빼어나고 지체 높은 여인을 골라 자신의 왕비로 맞아 들였다. 누구일까?
페르시아 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 다리우스 3세의 아내 스타티라는 이미 B.C 332년(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패한 다리우스 3세가 도망가 알렉산더의 포로 신분이 됨) 아이를 낳다 수사에서 사망했다. 대안이 남았다. 다리우스 3세와 스타티라 사이에서 태어난 큰 딸 스타티라(고대 그리스 로마는 딸의 경우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따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를 닮아 역시 빼어난 미인이었다. 스타티라와 함께 다른 왕녀도 한명 더 취해 결국 록사네를 두고도 2명을 새로 얻은 것이다. 페르시아의 일부다처(一夫多妻) 전통을 따른 것인데... 하긴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도 여러 여자와 결혼해 알렉산더는 이복형제를 둬야 했다.
5. 결혼정책이 헬레니즘을 낳다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들도 아케메네스 왕조 출신 왕녀나 귀족, 메드 출신 귀족 여성과 결혼했음은 물론이다. 헤파이스티온은 스타티라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이제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서지간의 인척이 됐다. 이른바 알렉산더의 동서(東西) 융합정책의 일환으로 펼쳐진 집단 결혼식. 언젠가 모 종교단체에서 펼치던 수백, 수천쌍의 체육관 집단 결혼식이 떠오른다. 이때도 국적과 민족을 떠나 맺어진 부부가 결혼식을 올렸으니 알렉산더의 통혼정책이 그 원조인가? 말이 동서융합이지 실은 알렉산더가 광대한 정복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도입한 정책이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했다고는 하지만, 지역 주민 모두를 죽인 것은 아니고, 언제든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꾀할 수 있었다. 이를 막고 알렉산더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 출신 장수들과 페르시아 출신 여성들을 결혼시켜 아이를 낳는 혈연적인 유대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봉하는 구약성경에도 같은 맥락의 얘기가 나온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어머니 레베카의 조카 라헬과 결혼한 뒤 가족을 이루며 살다 양을 몰고 도망가지만, 라헬의 아버지가 도망자 야곱을 죽이려다 결국 단념하고 만다. 우세한 군대로도 죽이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의 사위와 외손자들을 죽여야 하는 하는 것이니...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던 것. 당시 풍습상 가장 화려하게 치러진 마케도니아 장군과 페르시아 왕녀들의 결혼식은 고려(高麗)를 창건한 왕건을 떠올려 준다. 각 지방 호족의 반란을 막고 자신의 지배를 공고화 하기 위해 혼인으로 인척(姻戚)관계를 맺은 왕건. 좁은 나라였지만, 왕건은 무려 호족의 딸 29명과 전략 결혼식을 올렸다. 이에 비하면 알렉산더는 참 양호한 남자다.
알렉산더는 정복과 원정기간 내내 정복지를 철수할 때마다 신도시를 만들고 마케도니아나 그리스 출신 군사들을 남겼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퇴역 그리스인들은 임시로 주둔하는게 아니라 새정복지에서 현지민과 결혼해 아예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가 정복지인 과거 페르시아 지역으로 이식됐고, 현지 문명과 자연스럽게 합쳐져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냈다. 이를 헬레니즘 문명이라고 부른다. 간다라 미술은 불교라는 현지 종교와 그리스 조각 예술이 만난 헬레니즘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역사적 구분으로 헬레니즘시기를 가리킬 때는 B.C 336년 알렉산더가 왕이 된 뒤부터 B.C 30년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고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살할 때까지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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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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