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나이쯤 이면 ‘문학청년’이라는 말을 그리 낯설게 느낄 세대는 아닌데, 나는 문학을 경외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야 읽을 거리가 별로 없었으므로 세계명작동화나 세계문학전집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시나 소설 따위는 잘 읽지 않았다. ‘80년대 대표 소설’, ‘80년대 대표시’ 이런 짜깁기 책들은 싸구려 의무감에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같은 난해한 시집은 겉 멋으로 뒤적거려봤지만. 내가 주로 서성거린 책들은 거의 인문과학 서적이나 사회과학 서적이었다. 전공 탓도 있지만 이런 책을 읽어야 뭔가 남는 게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른바 ‘교양서’로 통칭되는 온갖 분야의 잡다한 책들도 좋아한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없던 교양이 조금은 쌓인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문학책들을 종종 보게 됐다. 전작주의자는 아니지만 특정 소설가의 책은 출간되는 족족 사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시집도 사 본다. ‘문학은 죽었다’고 말하여지는 시대에 거꾸로 가는 것 같아 좀 머쓱하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현상과 사상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읽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뭔가 손으로 물을 퍼 담는 느낌을 준다면, 문학은 사상과 현상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뭔가 손에 잡힐 듯한 직관적인 깨달음을 주는 것 같다. 또 문학이 남기는 이런 저런 해석의 여지 속에서 안도와 위안을 찾는다. 심지어 자연과학자인 다윈도 ‘과학적 진리를 탐구할 때는 은유(Metaphor)를 사용하지 말하야 한다'는 통념과 달리 은유를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어쨌든, 최근 시집 한 권을 샀다. 한 일간지에서 우연히 시 한 편을 본 뒤였다. 그 시를 소개한 기사 제목은 좀 생뚱맞았다. “도시인 심금 울리는 ‘쿨’ 한 詩”. 기사는 최근 네티즌과 잡지 편집자들 사이에서 화제에 오른 시가 있다면서 지난달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황인숙 씨의 시집 <자명한 산책>의 첫번째 시 ‘강’을 소개했다.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강가에서는 우리 연말에 이런 시를 접하니 찡한 구석이 있다. 다들 한 해를 보내면서 후회스러운 일, 기뻤던 일, 울고 싶었던 일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있다 누구에겐가 털어놓고 싶은 계절이 아닌가. 이런 때에 그런 얘기를 들어주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말자니. 그런데도 이 시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다니. 사람들은 이제 제 고민하기도 바빠 남의 고민 들어주기는 힘에 부치는 것일까. 가끔 사는 게 피곤하거나 누군가가 부러울 때면 생각한다. 부자든 빈자든, 들었든 비었든, 잘 나가든 못 나가든, 다들 비슷한 크기의 번민과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산다고. 세상에 뭐 부러울 게 있을까 싶은 사람도 알고 보면 불면의 밤을 지새고 있다고. 그건 사람마다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 깜냥이 다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못 배우고 없이 살아도 큰 고통주머니를 가지고 태어나 웬만한 고통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이 배우고 없는 거 없이 살아도 작은 고통주머니를 달고 태어나 고통이 조금만 차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다. 고통은 모르는 데서(不知), 없는 데서(無所有) 오는 것이 아니라 아는 데서, 있는 데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삶에는 또 한계행복체감의 법칙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를 ‘쿨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누구나 다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고 산다. 시끄럽다. 나도 힘들다. 너나 나나 같은 사람인데 네 일은 네가 해결해라.” 새해에는 우리, 웬만하면 하소연하지 말자. 쓸데없는 불평도 그만 하자. 하지만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 ‘이미 그 강에 가서 털어놓아 봤지만 그래도 힘에 부쳐 찾아왔으려니’ 하고 꼬옥 잡아주자. 고통은, 털어놓으면 부피는 줄지 않아도 무게는 가벼워지니까. (*SBS 매거진 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
'江에 가서 말하라'
&nsp; 내 나이쯤 이면 ‘문학청년’이라는 말을 그리 낯설게 느낄 세대는 아닌데, 나는 문학을 경외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야 읽을 거리가 별로 없었으므로 세계명작동화나 세계문학전집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대학에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