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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무덤덤하게 넘기기가 아쉬웠던지 세밑을 코 앞에 두고 누군가가 차 범퍼를 잔뜩 찌그러뜨려 놓고 달아났습니다. 보험회사에 전화했더니 얼마나 부서졌냐고 묻더군요. 40 센티미터쯤이라고 하자 귀에 익은 질문이 돌아옵니다. “그게 몇 인치인데요?” “이 사람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란 거요?”라는 불평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부랴부랴 인치 자를 찾았습니다. 전세계가 합의해 사용하는 미터법을 무슨 심보로 혼자 거부하는 건지. 미국에 살다 보면 이런 <미국의 잣대>와 불쾌한 조우를 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잣대의 눈금은 예외 없이 미국의 이익에 맞춰져 있지요. 세상에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는 미국의 잣대가 다른 점은 길이가 맘에 들지 않으면 맞도록 재단하는 시퍼런 칼날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시의 놀라운 재단 솜씨 2005년은 바로 이 날 선 잣대를 근래에 보기 드물게 잘 다루는 대통령이 집권 2기를 시작하는 해입니다. George W. Bush. 시사 주간지 TIME은 부시를 2004년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원대한 비전은 로널드 레이건에, 치밀한 전술은 빌 클린턴에 필적하는데 상하 양원에서 모두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정치력의 성적표는 두 대통령을 압도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설명이 짓궂더군요. “부시가 전세계적으로 극단적인 애증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라는 점이 고려됐다.” 이 능숙하고 요란한 재단사가 이 달 20일에 취임식을 갖고 집권 2기의 비전을 공개합니다. 세계는 그날 부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벌써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2005년 형 새 잣대의 포장을 뜯는 날인 것입니다. 지난 해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미국 민심은 이왕이면 세계가 공유하는 표준에 근접한 자를 만들어 보자는 케리를 외면하고, 남이야 뭐라 하든 우리에게 익숙한 자로 속 편하게 살자는 부시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결국 부시 2기도 1기와 별 차이 없이 <인치 자>로 <센티미터의 세상>을 측정하고 재단하는 4년이 될 것이 유력해 보입니다. “부시를 또 뽑다니 바보 아니야?”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까지 미국인들이 <인치의 세상>에 집착하는 것은 몇 해째 마음을 짓누르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센티미터의 세상>이란 곳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삭막한 고원에 숨어 살면서 세계의 심장부에 항공기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도 그렇고, 곳곳에 밥 굶는 아이들이 널린 땅 구석에서 핵과 미사일로 미국과 대적하겠다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꽤 괜찮은 친구로 알고 있던 유럽마저 심심치 않게 남의 속을 긁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이라크에 파병된 아들과 딸이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합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편치 않은 것이지요. 고무 팔찌로 불안감을 해소한다? 마음이 불안하면 뭔가 믿고 의지할 게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가위에 눌린 아이가 헝겊 인형이라도 끌어안아야 다시 잠을 청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미국인들에게 그런 헝겊 인형이 하나 생겼습니다. Livestrong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란색 고무 팔찌입니다. 암을 이기고 투르 드 프랑스 6관왕의 위업을 이뤄낸 랜스 암스트롱이 만든 암 치료 지원 재단에서 기금 마련을 위해 보급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Live>와 <Armstrong>을 합성해 <Livestrong>이란 신조어를 새겨 넣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대선 때 부시와 케리가 이 팔찌를 찬 모습이 텔레비전에 몇 번 비치자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아이들이 서 너 개씩 주렁주렁 차고 다니더니 어느 새 굵직하고 털이 부숭부숭한 어른들 손목에도 흔히 눈에 띱니다. 이제는 유사품들이 쏟아져 나와 종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유사품에 새겨진 단어들이 재미있습니다. <Friendship 우정>, <Serenity 조용함>, <Spirituality 영성>, <Peace 평화>, <True Love 진정한 사랑>. 한결 같이 마음의 위안에 관한 것들입니다. 개인들이야 이런 식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면 그만이지만 국가마저 팔찌 하나 달랑 차고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불안의 원인이 있으면 정부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인치 자>를 갖고 <센티미터의 세상>을 재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작업이 거의 마무리 됐고 이라크는 한창 칼질이 진행 중입니다. 오는 30일로 예정된 이라크 총선은 911 테러 이후 계속돼 온 중동 재단 작업의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이것만 성공하면 미국인들은 큰 걱정 하나를 더는 셈입니다. 북핵 재단의 향배는? 북한 핵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관리들은 6자 회담에 시한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 정부의 애절하기까지 한 러브 콜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벌써 반 년 이상 협상을 지연시켜 왔습니다. 넉 달 남짓은 “혹시 부시가 낙선하지나 않을까”하는 기대로, 나머지 두 달은 “부시가 재선됐으니 어떤 정책을 펼까”하는 탐색으로 시간을 보낸 셈입니다. 부시의 취임식이 끝나고 나서도 대답이 없으면 미국은 슬슬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서랍을 뒤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이거 세상이 예전과 달라진 같다”는 불안감을 안고 자신들의 <인치 자>로 세계 곳곳을 다시 측정하던 즈음 우리는 <미선이 효순이> 이후 불붙은 촛불 시위를 통해 한국의 자도 <인치 자>와는 꽤 다르다는 점을 그들에게 일깨워줬습니다. 부시 2기는 이 깨달음을 한미 동맹의 현실에 적용하는 출발점입니다. 워싱턴 링컨 기념관 근처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에 새겨진 한 비문을 읽어볼까요?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미국은 생전 알지도 못했던 한 나라와 만나본 적도 없는 한 민족을 지켜주라는 요구에 응한 조국의 아들과 딸들을 기립니다.” 비문이 말하는 <아들과 딸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기억과 함께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습니다.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월 탓입니다. 새로운 시대 맞는 한미 동맹 이들의 퇴장과 함께 한미 동맹의 2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동맹 1기를 이끌어온 동력이 전우애적 유대감이었다면 2기의 그것은 이해 득실입니다. 미국에게 뭔가를 얻어내러 백악관이나 국무부를 찾아갈 때는 가는 길 내내 우리가 줄 대가는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안보 때문에 미국측에 “북한을 너무 자극하지 말라”고 요구했다가 “당신 누구 편이오”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초강대국이 불안하면 지구촌은 격변을 피하기 어렵다는 게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을사조약이라는 문서 몇 장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05년 그 해에도 세계사는 거대한 용트림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물정 모르고 우왕좌왕하다 낭패를 당해야 했지요. 어느 지도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눈을 감은 채 신념만 고집하다 망국을 자초했고 다른 지도자는 신념은 헌 신짝처럼 팽개치고 약삭빠르게 세계 정세의 잔가지 흐름만 좇다가 시신이 썩어 흙 먼지가 된 지금까지 매국노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국제 정치의 방정식을 숙제로 떠안고 국치의 해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세상 보는 밝은 눈과 건강한 신념을 함께 가진 지도자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 이 글은 SBS 매거진 신년 특집에 실린 내용입니다. |
인치 자로 재단 하는 센티미터의 세상
왜 미국만 인치 자를 쓰는 거야?한 해를 무덤덤하게 넘기기가 아쉬웠던지 세밑을 코 앞에 두고 누군가가 차 범퍼를 잔뜩 찌그러뜨려 놓고 달아났습니다. 보험회사에 전화했더니 얼마나 부서졌냐고 묻더군요. 40 센티미터쯤이라고 하자 귀에 익은 질문이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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