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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nsp;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전 4. 아킬레스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전

4. 아킬레스 3--사랑

5. 아킬레스 4--브리세이스

6. 아킬레스 5--헥트르와 대결

7. 아킬레스 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 올림픽 1

11. 올림픽 2

12. 올림픽 3

13. 올림픽 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 2--오늘 이야기

28.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26.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

 

◆ 1. 그리스 문명에서 마케도니아

 

영화 '알렉산더'가 오늘 전 세계에서 일제히 개봉된다. 지난 봄 '트로이'라는 영화를 화두로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시리즈를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원숭이해(甲申年) 마무리를 몇시간 코앞에 두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란, 참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더니... 굴곡지고 사연 많았던 한해를 보내는 마음은 심난하지만, '알렉산더'라는 그리스 문명권 이야기로 세밑(歲暮)을 맞는다는 것 자체에 묘한 인연의 끈이 느껴진다. 영화담당 기자가 아니니 시사회를 통해 먼저 볼 수도 없고... 설레는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리자니 터지는 궁금증을 막을 길이 없어 자료를 통해 먼저 좀 들여다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순서를 바꿔 2차례 글을 올린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와 마케도니아 출신의 헬레니즘 세계 정복왕 알렉산더는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둘을 책상 위에 함께 꺼내 이모저모 따져가며 키도 재고 몸무게도 달아보는 색다른 재미가 됐으면 좋으련만...

 

알렉산더. B.C 3c 헬레니즘 시대 작품으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견됐다. 앳된 모습이다. 알렉산더는 아킬레스를 자신의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삼고 그를 본받으려 애썼다. 루브르 ⓒ김문환

 

아킬레스 조각. 알렉산더의 조각보다 6백여년 뒤 3c 로마시대 작품이다. 루브르 ⓒ김문환

 

 

알렉산더의 고국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문화권의 최북단을 이루는 나라였다.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을 북방의 거친 야만인과 국경을 맞대고 사는 아주 먼 나라, 험악한 사람들의 나라 정도로 여겼다. 더구나 B.C 5c 이후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가동하던 그리스내 다른 도시국가와 달리 마케도니아는 왕국이어서 민주주의 후진국이요, 전제적인 독재국가로 치부해버렸다. 요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아직도 1인 지배체제 아래 신음하는 일부 제 3세계 독재국가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다고 볼수 있다. 더구나 마케도니아는 B.C 5c 초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아 편에 서기도 해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문명권의 중심국가들 입장에서 보면 별로 달갑지 않은 이웃이었다.

 

한국사람들이 미국을 자랑스런 최고의 친구로 생각하며 온갖 사랑 다 퍼주는 현실. 이와 달리 자국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한국민의 이해에 관계없이 행동하는 미국. 두 나라 사이에 메울 수 없는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스 사람들과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자신들을 자랑스런 그리스 민족의 일원으로 여겼다. 특히 그리스어에 가까운 고유한 언어가 있었으면서도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문화적으로는 B.C 5c 말 이후 그리스 문명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자신을 그리스 문명권의 핵심부에 포함시키려 애썼다. 군대 주변에 모여 군대밥 신세지며 군대 냄새 물씬 풍기지만,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기지촌(基地村).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문명의 기지촌이었다면 물론 조금은 심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튼 마케도니아는 아테네를 정점으로 그리스 문명이 만개했을 때 문화적으로 열등하고,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며 군사적으로도 주목받지 못하는 나라였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이던 펠라.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문명권의 변방이었다. 정치문화적으로 뒤떨어졌지만, 그리스 각 도시국가들이 쇠퇴한 틈을 타 그리스 문명권의 최고 맹주로 떠오른다. ⓒ김문환

그러던 마케도니아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B.C 4c 중반이다. B.C 359년 왕이 된 필리포스 2세 때다. 이무렵 마케도니아를 제외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오랜 내전으로 피폐(疲弊)해질 대로 피폐해진 시기다. 아테네는 B.C 5c의 황금기를 지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패하면서 석양에 떨어지는 태양 신세였다. 스파르타 역시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아테네를 눌렀지만, 권세를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B.C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에 참패해 무적 최강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과거의 아테네, 스파르타 와 같이 주도권을 쥔 세력이 없어졌다. 각 도시국가들이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지리멸렬, 사공 많은 배 산으로 가는 형국이었는데...

 

바로 이때 마케도니아에 필리포스 2세가 왕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필리포스 2세는 고분고분하지 않던 귀족들을 길들이고, 각 지역 호족들의 준동을 잠재운 뒤 군비를 강화해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사국가로 탈바꿈 시키는데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힘빠지고 분열된 그리스 문명권 내부로 침략해 들어왔다. 마침내 B.C 338년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헬라스 동맹을 결성해 맹주가 됐다. 그리스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체제다. 모든 도시국가의 위에 군림하는 패자(覇者)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에 자치를 인정받았지만, 주권은 마케도니아 손으로 넘어갔다. 필리포스 2세는 이어 마케도니아를 주축으로 각 도시국가들을 참여시킨 페르시아 정벌 연합군을 조직했다. 비록 B.C 336년 암살되지만, 왕이 된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페르시아를 멸(滅)하면서 아프리카 북부와 오리엔트, 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 2. 아킬레스를 넘는 알렉산더의 업적

 

B.C 336년 20살에 왕이 된 알렉산더는 B.C 323년 33살로 죽을 때까지 13년간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그보다 천년 전 신화 속 트로이 전쟁의 아킬레스를 방불케 하는 삶의 궤적을 남겼다. 아킬레스가 신이 만들어 준 번쩍이는 최고의 무구로 적진을 벌집 쑤시듯 쑥대밭 냈던 것처럼 알렉산더는 왕을 상징하는 빛나는 투구와 갑옷에 창을 들고 싸웠다. 이는 아주 무모한 짓이었다. 쉽게 적의 표적이 돼 공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전선의 맨 앞에서 신의 은총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어느 병사보다 용감하게 창칼을 휘둘렀다. 왕이 최고의 용기로 투혼을 발휘하는데, 일반 병사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이렇게 싸웠던 알렉산더의 잔인성은 유명하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정복계획에 반대하는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또 원정도중 반항하는 적에게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트로이군을 도륙(屠戮)하던 아킬레스의 잔인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 다리우스 3세군을 물리치고 있다. 이때 나이 23살의 총각이었다. 이수스는 오늘날 터키남부로 시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지역이다. 이수스 전투에서 대승으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그리스 민족의 오랜 공포를 털어내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킬 자신감을 갖게 됐다. 로마시대 모자이크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냉혹한 정복자 알렉산더가 그리스 문명권 인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공을 세우며 대제국을 일궈 나가는 과정을 들여다 보자. B.C 338년 18살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주도하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참가하는등 아버지가 헬라스 동맹을 건설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훗날 로마 제국의 완성자 옥타비아누스도 비슷한 나이에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신임 아래 전투에 참가했었는데... 알렉산더는 2년 뒤 페르시아 원정을 추진하던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20살의 나이로 왕이 됐다. 자신이 죽었다는 풍문에 반란을 일으킨 테베를 침략해 전 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다른 도시국가에 본보기를 보인 잔혹한 징벌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다시 한번, 아니 더욱 확고하게 그리스 내 수백개 도시국가들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제 어느 국가도 마케도니아에 맞설 수가 없었다. 세계 제국 페르시아도 실패한 일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 내부를 다지는데 성공한 알렉산더는 B.C 334년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아버지가 추진했던 과업을 계승한 것이다. 알렉산더는 B.C 333년 오늘날 터키 남부로 시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대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오리엔트의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을 장악했다. 이어 찬란한 문명의 보고 이집트로 기수를 돌려 손아귀에 넣었다. 이집트에서 전열을 정비한 알렉산더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 깊숙이 즉 메소포타미아 내부로 들어갔다. B.C 33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핵심부로 오늘날 미군의 집중포화에 시달리는 티그리스 강변 정확히 한국의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과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궤멸시켰다. 다리우스 3세는 도망쳤다가 부하에게 암살됐고, 페르시아 제국은 문패를 내렸다.

 

페르세폴리스. B.C 330년 과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궤멸시킨 알렉산더는 곧바로 바빌론을 점령하고, 수사를 거쳐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진격했다.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페르세폴리스는 이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거대한 석조유적이 남아 당시 위용을 전해준다. ⓒ김문환

이제 발길 닿는 대로 알렉산더의 세상이었다. 페르시아 관할 아래 있던 문명의 고도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해 나갔다.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로 위용을 자랑하던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의 점령 뒤 의문의 불길에 휩싸여 불타고 말았다. 방화인지 실화인지... 페르세폴리스는 그렇게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알렉산더는 중앙아시아 카스피해까지 간 뒤 북동진해서 우리가 오늘 서역(西域)이라고 부르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가 다시 인더스강까지 진군했으니... 비록 인도 원정은 포기하고 돌아왔지만, 가는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 무려 70개의 도시(알렉산드리아)를 만들었다. 그가 다닌 궤적은 당시 까지 최고의 업적이었다. 영토의 확장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융합을 가져왔으니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바가 크다. 우리의 자랑스런 세계 문화 유산, 석굴암. 불상(佛像)이란 게 그가 남긴 간다라 미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산더는 이제 자신의 업적을 돌아봤다. 아킬레스가 세운 공로보다 자신의 공로가 더 높고 크다고 여길 수 있게 될 만큼 자신의 업적이 어느새 하늘 만큼 높아져 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 잠깐 아킬레스가 이룬 업적을 들여다 보자. 그래야만 아킬레스와 알렉산더에 대한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해 진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공적을 말하도록 한다. 아킬레스가 브리세이스 문제로 아가멤논과 다투고 전쟁에서 발을 빼자 아가멤논의 청으로 오디세우스와 大아이아스가 아킬레스의 마음을 돌리려 사절이 돼 찾아왔다. 아킬레스는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지만, 참전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업적을 늘어놓는다.

 

아킬레스 왈(曰). "점잖고 현명하기로 소문난 오디세우스 장군이시여. 나는 말이외다. 밤낮으로 피비린내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더는 13년 정복기간동안 아프리카와 오리엔트, 중앙 아시아에 자신의 이름을 단 70개의 신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아직까지 그 이름이 그대로 전해지고, 도시 유적도 남은 지역은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유일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 헬레니즘 세계의 문명 중심지로 군림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터. 지금은 이집트 국기가 나부끼는 성으로 변했다. ⓒ김문환

나는 전쟁터를 누비며 싸웠소.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지요. 누구는 여인네 때문이지만 말이오. ... <중략> ... 선단을 이끌고 무려 12개 도시를 함락시켰소이다. 이뿐이 아니라오. 트로이 주변 11개 도시에 침공해 부하들과 함께 수많은 재물을 약탈해 왔다오. 그리고 이 재물은 모두 아가멤논에게 바쳤고요. 그런데..." 12개 도시 함락과 11개 도시 공략. 이것이 아킬레스가 쌓아 올린 업적이다. 수백개 그리스 도시국가를 정복해 발아래 둔 알렉산더의 위업에 크게 못미친다. 헥토르를 죽인 것 정도를 아킬레스의 업적에 덧붙인다 해도 알렉산더에 비할 바가 못된다. 호메로스의 저작 '일리아드'를 통해 아킬레스를 본받던 알렉산더는 이제 다른 마음을 품게 됐다. 모방의 차원을 넘어서기로 했다. 점차 자신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는 단계로 옮아갔다.

 

◆ 3. 알렉산더, "나를 신이라 불러다오"

 

신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위업으로 자신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졌다. 알렉산더는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한 뒤 동맹국으로 삼고, 이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물론 그들은 신에 준하는 예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더에 반대했던 테베가 끔찍한 종말을 맞았던 사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를 원정하면서는 리비아 쪽으로 시와 오아시스까지 강행군을 하고 들어갔다. 시와 오아시스에 정복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유는 하나. 이집트의 태양신 아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다. 시와 오아시스의 아몬 신전에 들어가 마침내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신관을 통해서다. 힘빠진 신비의 제국 이집트의 신관이라고 목이 여럿이 아니었을 테니, 알렉산더가 원하는 답이 무엇일지 눈치채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리라.

 

태양신 아몬신을 모시던 나일강 상류 룩소르의 카르나크 대신전의 아멘호테프 3세 열주랑(列柱廊).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뒤 서부 리비아 국경의 사막지대 시와 오아시스로 천 km를 행군해 아몬 신전에서 '신의 아들'이란 말을 신관으로부터 들게 된다. ⓒ김문환

 

파라오를 신이라고 여겼던 이집트 전통은 물론 그리스 문명권에서도 인간세에 사는 신의 아들은 불가능한 설정이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툭하면 인간과 사랑을 나눠 자식을 낳지 않았던가! 헤라클레스가 대표적이고. 아킬레스 역시 신의 아들이다. 많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사실로 믿었다. 여기에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위대한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알렉산더를 신의 아들로 간주하는 일이 그리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던 게 당시 분위기였을 것이다. 일련의 신격화 조치는 병사들에게 알렉산더에 대한 신비감과 신뢰, 복종심을 높이는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스 문명권의 젊은이들처럼 알렉산더도 처음엔 마음속에 아킬레스를 그렸지만, 나중엔 그 자신이 헬레니즘권 사람들의 가슴속에 신의 전설로 남게 됐다.

 

여기서 잠시 왜 알렉산더가 자신들 그리스 문명권 최고의 신탁소 델피에서 신의 아들로 인정받지 않고 이집트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까지 목숨을 내놓고 행군해 들어갔는지 그 배경을 들여다 보자. 알렉산더가 시와 오아시스의 아몬 신전으로 들어간 이유는? 당시 이집트는 식민지 상태였다. 이미 당시 기준으로 봐도 2천년 전에 피라미드라고 하는 엄청난 위용의 건축물을 남기는등 찬란한 문명의 보고(寶庫)였지만, 군사적으로 힘이 약해져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됐다. 다시 페르시아를 무너트린 알렉산더에게 복속된 상태다. 그러나, 그 찬란하고 유구한 문명의 흔적은 페르시아나 그리스 같은 짧은 역사의 나라들이 감히 넘볼 수준이 아니었다.

 

대형 석조 건축 기술이나 오랫동안 잘 정제된 종교관, 각종 학문의 유산은 그리스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적던 시기는 B.C 8c. 그리스 사회가 아직 찬란한 고전기 문명을 일구기 직전이다.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고 이제 겨우 혼란에서 빠져 나오던 아르카이크기였다. 호메로스는 아니 그리스인들은 이때 이집트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역시 아킬레스의 입을 통해 자신이 바라보던 이집트 문명을 묘사한다.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스를 찾아와 아가멤논과 화해를 원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브리세이스도 돌려주고, 그밖에도 여러 선물을 줄 것이라고 전하자 아킬레스가 거절하면서 입을 연다.

 

아킬레스 왈(曰). "... 아가멤논 그자 말이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자 아닙니까? 그가 준다는 선물이요? 아휴, 고마워라. 그가 줄 선물이라는 것. 그의 재산에서 줄 텐데. 그가 어디 자기 손으로 일군 재산이 하나라도 있답디까? 전부 부하들이 목숨 내놓고 적들을 물리친 뒤 빼앗아다 바친 것 아니오. 그가 약속한 선물의 10배 20배를 준다 해도 내성에 차지 않을 것이니. 그리 전하시오. 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이집트 테베의 재산을 나에게 준다면 모를까. 테베 말이오. 테베는 어찌나 큰 도시인지 성문이 무려 100개라오. 100개 성문에는 군사 200명이 전차를 타고 내달릴 수 있는 그런 정도인데..."

 

알렉산더를 그린 헬레니즘 시기 동전. 페르가몬 박물관. ⓒ김문환

100개의 성문을 갖출 만큼 거대한 규모의 도시 테베. B.C 8c 그리스인들이 바라보던 이집트 문명의 모습이다. 사실 테베(룩소르)를 오늘날 방문해 봐도 정말이지 입을 벌리고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규모의 석조 신전과 나일강 건너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되는 초화화 무덤 부장품과 미이라... 당시 그리스에서는 신전 지으면서 지붕에 풀잎 엮어 올리는 수준이었으니... 기자의 피라미드나 테베의 석조 건축 신전의 위용을 본 그리스인이라면 아킬레스의 표현이 정말이지 실감났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집트에 들러 그 위용을 직접 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호메로스보다 2c 뒤 B.C 6c 아테네에 살며 아테네 민주주의 개혁 입법가로 활약한 솔론은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이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을 둘러 봤는데...

 

알렉산더는 아킬레스가 '일리아드'에서 찬양하던 나라. 솔론이 탐방했던 나라 이집트를 꼭 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가야했다. B.C 333년 터키남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페르시아의 본토로 직접 가지 않고 이집트부터 원정한 것도 다 이유가 아니었을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부터 공략해 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아킬레스가 갖고 싶어했던 번영의 이집트 도시, 문명의 도시를 자신의 손에 넣는다면 이는 아킬레스보다 더 뛰어난 업적을 쌓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병사나 정복 민중들에게 자신의 위상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데 이보다 더 상징적인 사건은 찾기 어렵다. 이집트의 상징, 이집트 문명과 종교의 상징, 태양신 아몬 신전에서 신의 아들로 인정 받는 다면 만사형통. 알렉산더가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다. 쉽게, 카톨릭에서 로마를 점령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던 중세 프랑크 왕국 황제를 떠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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