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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 사랑의 힘과 늙음의 당당함

우리 삼남매의 할머니 어릴적 우리 집에는 살림을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나보다 세살 아래의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께서 수소문해서 모셔온 할머니는 허리가 거의 90도 가까이 굽

우리 삼남매의 할머니

어릴적 우리 집에는 살림을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나보다 세살 아래의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께서 수소문해서 모셔온 할머니는 허리가 거의 90도 가까이 굽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고 정확한 연세는 할머니 본인도 가물가물 한지라 대략 칠순을 훌쩍 넘기신 나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이런 꼬부랑 할머니가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 일을 하실 수 있을까'하고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10년 가까이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삼남매를 키워주셨습니다. 흔한 감기 몸살도 좀처럼 앓지 않을 만큼 타고난 건강체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시골에 계서서 자주 못 뵙고 코흘리개 시절 돌아가신 친할머니보다 더 친할머니같이 여겨졌고 그 친숙함은 도를 넘어서 만만하기까지 했습니다.

개나리 담배를 즐겨피시던 할머니가 수돗가에서 일을 하다가 "상석아! 담배 불좀 붙여와라!" 그러면 나는 호기심으로 한모금 빨아본 뒤 캑캑거리면서 갖다 드리다가 꿀밤을 맞기도 했고, 밤에 코고는 할머니를 흔들어 깨우며 코골지 말라고 하소연 하기도 했고, 엄마 아빠가 우리를 혼내거나 매들 들려고 할때는 쪼르르 할머니 품안으로 도망가고는 했습니다.

나는 가끔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여쭤보았고,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 모두 상복을 입고 곡을 했던 고종 황제의 장례식때의 기억부터 6.25때 코 찔찔흘리며 긴 소총을 질질 끌고가는 의용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해 하기도 했고 젊은 시절에 하도 먹을 것이 없어 황토흙을 파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었습니다.

그 뒤 제가 5-6학년쯤 되었을때 할머니도 기력이 날로 약해지시고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져 결국 눈발이 흩날리는 어느 추운 겨울날, 한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한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우리들에게 "추워...어여 들어가..."하시면서 고향인 경북 상주로 떠나셨습니다.

몇달이 지나도록 제 여동생은 "할머니가 보고싶다. 할머니 다시 데려와라" 하고 투정을 계속하더니 그만 마음의 병이 났던 모양입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20분쯤 떨어진 산동네에 그 할머니의 따님 한분이 살고 계셔서 가끔씩 우리 집에도 놀러오고 해서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그 분 집의 위치는 우리 식구 누구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제 여동생이 대충 짐작으로만 그 동네를 찾아가 헤메인 끝에 할머니 딸의 손을 잡고 매달리며 할머니를 돌려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그 동네에 사는 우리 반 친구에게서 들었을때 당혹스러워 한참 동안 말을 못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여동생에게는 어쩌면 할머니가 엄마보다도 더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나서 이 할머니 생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3년 만에 돌아온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 가운데서도 국가 대표급 감독으로 2001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해 일본내에서 실사영화들을 제치고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는가 하면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상인 금곰상을 수상한 사상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됐습니다. 이 작품을 정점으로 이제 애니메이션으로 이룰 것은 다 이룬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할 것이다, 후진 양성에 전념할 것이다라는 무성한 소문 끝에 다시 새로운 작품을 들고 우리 곁에 찾아왔습니다.

유럽 어딘가의 작은 마을에 소피는 모자가게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갑니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꽃미남 마법사 하울을 만나게 되고 소피의 마음속에는 은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같은 마법사이지만 포악하기로 소문난 황야의 마녀는 소피와 하울의 관계를 오해하고 소피에게 저주를 내리는데 그만 70살 먹은 쪼글쪼글 할머니로 변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의 내용을 말할 수도 없고 마법을 건 마녀는 저주를 내릴 수는 있지만 풀 수는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자 소피는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순무로 만든 허수아비의 도움으로 하울의 성을 발견하고 그곳의 청소부로 취직 아닌 취직을 해서 하울의 조수 마르크와 불의 악마 캘시퍼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렇게 대충 줄거리를 적어놓고 보니 이 영화는 줄거리의 전개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실제 칠순을 바라보는 거장 감독이 세상에 던지는 재미있고 아름답고 환상적인 화두라고 해야 걸맞을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녹아든 메시지

영화의 배경 무대인 유럽의 어느 마을과 자연은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이상화된 서양의 모습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게 묘사됩니다. 이런 풍경은 사람의 눈높이 뿐 아니라 감독이 항상 동경하는 비행에의 욕구와 맞물려져서 하늘에서도 내려다보여집니다. 하울이 소피를 위해 숨겨둔 물방앗간이 있는 비밀의 정원 모습은 소피의 말처럼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정서적인 감흥을 안겨주기까지 합니다.

문의 손잡이를 돌리면 바뀌는 배경, 마르크의 깜찍한 변장 마술, 캘시퍼의 익살스런 표정과 몸짓,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늙은 개의 엉뚱한 재롱 등 미야자키 작품 특유의 유머와 여유도 곳곳에 심어져 있어 관객들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합니다.

영화에서 노파로 변해버린 소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하거나 비관하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되니까 놀랄 일이 별로 없어서 좋군' 하는 식으로 영화 곳곳에서 노인이 됐을때의 장점을 독백처럼 늘어놓는데 감독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사실 17세 소녀가 어느날 갑자기 70세 노파로 변했다면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몸져 눕거나 망가졌을 법도 한데 소피는 세상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당당한 행동을 보여줍니다.

하울의 조수 마르크가 늙은 소피의 품을 파고들며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자 "소피는 아무데도 떠나지 않아.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헤어지지 않아."라고 말하거나 자신에게 저주의 마법을 건 황야의 마녀가 자신보다 더 늙고 추한 할머니로 변하자 거둬들이는 모습에서 진정한 노인의 힘을 보여줍니다. 젊음과 맞바꾸는 늙음에는 잃는 것과 아쉬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지혜와 포용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밖에 소피가 가끔씩 혼잣말로 던지는 대사들은 한번씩 곱씹어볼 만한 매력이 숨어 있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힘

권력있는 자의 야욕에서 비롯된 전쟁으로 말미암아 평범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과 자연이 불덩이로 변하는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감독이 이전 작품에서도 꾸준하게 제기해온 반전 메시지도 등장합니다. 그 자신이 태평양 전쟁때 끔찍한 공습의 피해를 겪어보았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그가 전하는 반전 메시지가 그 대상에 대한 구체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전쟁의 주범이었던 감독의 나라 일본이 역사인식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결말은 역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하울, 소피, 허수아비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조급함이 느껴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지만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이기에 토를 달기가 꺼려집니다.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인 [인크레더블]이 고급재료와 온갖 향신료가 들어간 자극적인 맛의 패밀리 레스토랑 음식이라면 [하울..]은 처음에는 심심한 것 같지만 먹으면 먹을 수록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고즈적한 산사에서 차려내온 산중 음식을 맛 보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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