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초,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샌디 앤더슨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야구단의 재정 자문을 맡게 됩니다. 당시 오클랜드의 구단주는 앤더슨의 화끈한 추진력(앤더슨은 베트남전 당시 최대 격전 중에 하나였던 다낭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예비역 해병대 장교였습니다)에 감동했는지, 팀의 단장까지 맡아 줄 것을 제안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야구 방망이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는 앤더슨에게 말이죠. 신임단장이 된 앤더슨은 지금까지 그가 속했던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오클랜드 구단을 휘어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죠. 구단 사무실의 왕은 단장이었지만, 필드의 왕은 감독이었으니까요. 감독 뿐만 아니라 선수단 전체가 그랬을 겁니다. ‘야구라곤 쥐뿔도 모르는 작자가 단장이라니!’ 사실 앤더슨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둥뿌리부터 확 바꿔서 ‘내 조직’으로 만들고 싶은데, 야구에 대해 뭐 아는 게 없으니 ‘말빨’이 설 리가 없죠. 하지만 어느 날 서점에서, 앤더슨은 드디어 ‘야구단 장악의 무기’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초기 세이버메트리션 가운데 한 명인 에릭 워커의 ‘불길한 1루수’라는 소책자였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간단했습니다. 야구는 한 이닝당 세 개씩의 ‘아웃이라는 판돈’을 놓고 벌이는 도박과 같다. 따라서 공격에서 아웃을 유발하는 모든 행위는 나쁘거나, 나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아웃을 당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지표는 ‘출루율 (제가 앞서 ‘최희섭과 출루율’이라는 글에서 쓴 것처럼, 출루를 한다는 건 아웃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의어이니까요)’이다. 앤더슨에게 이 책은 복음서와도 같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논증과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변호사 출신의 앤더슨 단장에게, 지금까지 어느 야구의 전통적 관념도 설명해주지 못했던 ‘야구 공격의 메커니즘’을 명쾌하게 풀어주고 있었으니까요. 앤더슨은 이 새로운 ‘출루율 최우선 철학’을 가지고 오클랜드 구단 산하 각급 팀들을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일정 수치 이상의 출루율을 기록하지 못하는 타자는 제 아무리 타율이 높아도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지 않았습니다. 속한 리그에서 팀출루율 1위를 기록하지 못한 마이너리그 팀의 코칭스태프에게는 강한 질책, 심지어는 해고 통보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루율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볼넷입니다. 점차 오클랜드 산하 마이너리그팀의 타자들은, 스트라이크존을 극단적으로 좁혀서 최대한 많은 볼넷을 골라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새로운 타격 철학을 몸에 익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 개조 실험’도, 일단 메이저리그 승격이 되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아직도 메이저리그 선수단은 앤더슨 단장으로서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금단의 구역’이었기 때문이죠. 마이너리그에서 ‘최대한 참을 것’을 교육 받았던 타자들은, 빅리그에 올라오는 순간 ‘공이 보이면 그냥 자신있게 쳐!’라며 격려하는 타격코치의 달콤한 말에 순식간에 예전의 공격성을 되찾았습니다. 게다가 ‘인간 개조 실험’의 성공 여부가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았습니다. 오클랜드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부자구단’이었습니다. 구단주 월터 하스 주니어는 야구단 운영을 ‘부의 사회환원’ 차원으로 생각했고,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좋은 선수들을 모아 강팀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대부분의 훌륭하고 비싼 타자들은 타율과 출루율, 장타율이 다 좋기 마련입니다. 오클랜드에겐 비싼 선수를 계속 보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밖에서 사 올 충분한 자금력이 있었습니다. 단장 입장에서도 덜 골치 아픈 시절이었죠. 오클랜드는 88년부터 92년 사이에 네 번이나 지구 우승, 89년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행복한 시절을 보닙니다. 하지만 1995년, 오클랜드의 호시절은 끝납니다. 하스 구단주가 사망하며 오클랜드 구단은 오클랜드 지역의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넘어갑니다. 지금까지도 오클랜드 구단의 오너들인 이 사람들은 앤더슨 단장에게 긴축재정을 요구합니다. 더 이상 자선사업은 할 수 없다는 거죠. 순식간에 오클랜드는 부자구단에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을 돌파할 무기는 ‘출루율 철학에 따라 철저히 팀을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위기 돌파의 선봉장은 97년에 오클랜드의 새 단장으로 임명된 빌리 빈이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