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아네트'와의 조찬 간담회가 있었던 다음 날인 지난 17일, 이번에는 한국 언론재단 12층 재단연수센터에서 아침 10시<전쟁보도의 진실과 국익>에 대한 강연회가 있었다.
어제는 10여명의 기자들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었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큰 강당에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단에 앉아 있는 '피터아네트'씨의 얘기를 듣는 자리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오늘 분위기는 조금 더 자유로웠다.
피터 아네트씨는 먼저 전쟁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언급했다.
그는 가능하면 전쟁의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라크전을 예를 들어보면 미군들에 대한 비판 정보도 들어야 하고 중동의 반미정서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담후세인의 음성이나 비디오가 방송국에 전달되면 그러한 내용들도 가능한 한 많이 보여져야 한다고 것이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러한 독재자의 음성이나 비디오 파일을 방송국에서 자주 내보내면 그들에 의해 이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피터 아네트씨는 시청자들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했다. 그들의 주장도 들어봐야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미국 관료들은 시청자들이 전쟁의 상황을 전체로 이해할 만한 판단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체검열을 통해 국익을 보호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고위층(특히 파월 미 국무장관과 라이스 백악관 국가 안보보좌관)들은 국내외의 정보를 막아 시청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시청자나 독자에 대한 도전이고 세계 언론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쟁보도와 국익에 있어 언론이 자제해야 하는 보도도 있을까?
아네트씨는 미국의 경우 언론이 전쟁보도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도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기사로 인해 군사 작전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경우와 그 기사가 군사들의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경우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의 기자들은 그런 경우만큼은 아무리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고 해도 보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언론이 정부정책을 비난해야 그나마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전쟁시 언론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면 결국은 정부의 문제점들이 적군에게 노출되는 결과를 가져와 더 어려워진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주장이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일 수록 열린 사회, Open Information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떻게 40년 간 어떻게 하다가 20개가 넘는 전쟁을 취재하는 종군기자가 됐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살 때 지역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스포츠나 정치 분야였지 전쟁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19, 20살이 됐을 때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뉴질랜드 젊은이들이 파병을 위해 군대로 가게 되자 그는 전쟁에 연루되기 싫어서 호주로 갔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종군기자로 유명해진 그도 당시에는 군대에 가기 싫어서 호주로 도망가듯이 갔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아름다운 영국여성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남성들은 아름다운 여성에 의해 인생이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라고 물어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 영국 여성은 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던 기자로 50년대 동남아시아 취재를 자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여성과 사랑에 빠졌던 아네트씨도 이 여성과 함께 태국 방콕으로 가게 됐고 거기서 영국신문사의 기자 겸 편집자로 터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아시아의 매력에 빠져버려 자신이 사랑했던 영국여성이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아시아에 남았다고 했다. 그리고 60년에는 비앤트 라오스라는 주간지에서 일하면서 파트타임으로 미국 AP통신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다.
그때부터가 그의 기자 인생에서는 황금기가 되는데 60년 라오스에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정부에 반하는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쿠데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사와 여권을 입에 물고 메콩강을 헤엄쳐 태국으로 넘어가서 기사를 전송하기에 이르렀다. 쿠데타가 나기 전까지 라오스는 중국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선의 마지 노선으로 미국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미국정부와 국민들은 라오스의 쿠데타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쿠데타가 일어나자 모든 통신이 끊어져 기사 전송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국에서 텔레콤으로 전송된 기사들은 당시의 라오스 사태를 정확히 전달해주었고 아네트씨는 특종을 하는 쾌거를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62년 베트남으로 파견이 됐는데 그는 거기서 종군기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베트남전이 아직 큰 전쟁이 아니었던 62년부터 취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전쟁을 보면서 본인의 용기도 점점 커졌고 훗날 퓰리처상을 받은 많은 훌륭한 기자들을 만나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당시 AP통신의 기자로 3천건이 넘는 기사를 전송했고 13년동안 이어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면서 자신의 가야할 길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종군기자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난 뒤 종군기자로서의 자기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었다. 이번 이라크 전쟁을 취재할 당시의 모습이었다.
바그다드에서 폭격이 이뤄지던 날...생방송으로 리포팅을 하는 피터 아네트의 모습이었다. 그는 호텔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폭격의 모습을 보면서 위성전화로 리포팅을 하고 있었고 카메라는 호텔 옥상에 2대, 방안에 한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방안의 카메라는 리포팅을 하는 아네트씨의 모습을 잡고 있었고 옥상의 두 카메라는 멀리 보이는 폭격의 현장들을 담고 있었다. 그는 91년의 첫 걸프전 때부터 이라크를 오가면서 알게 된 이라크의 한 친구가 만약 바그다드에 폭격이 이뤄진다면 이 호텔에서 가장 잘 보일 것이라고 귀뜸을 해줬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예견은 바로 적중해 피터 아네트씨가 미국 NBC방송을 통해 보여준 화면들은 마치 미군들의 공격지점을 바로 알고 대기한 것처럼 생생한 화면을 잡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이라크전이 발발했을 당시 피터 아네트씨는 CNN을 떠난 지 4년이 된 상황으로 기자보다는 애널리스트와 평론가로 일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91년 걸프전당시 바그다드에서의 1보를 전해 유명해진 덕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익스플로러에서 자신을 취재하길 원했었고 두번째 이라크전이 발발했을때 마침 그들은 바그다드에 있었던 것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익스플로러는 미국의 케이블 방송인 MSNBC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MSNBC의 자회사인 NBC가 그에게 이라크전 취재를 도와줄 것을 요청해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91년 걸프전 때문에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전쟁중의 미국 공격상을 전달하고 사상자 위주의 기사를 주로 다루면서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 98년 사담후세인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을 때도, 과연 독재자의 얘기를 그렇게 들어주어야 하는냐는 논란에 휩싸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보도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일일보도 말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조건으로, 또 자신이 기획해서 취재하고 싶은데로 취재하는 조건으로 NBC의 취재를 돕기로 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취재는 하루에 20시간동안 이뤄졌고 그는 이라크 군쪽을 위주로 취재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전쟁발발 8일쯤 됐을때 이라크 국영 TV에서 이번 전쟁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자신이 느꼈던대로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미국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전망은 맞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전쟁이 시작되면 이라크 군인들이 바로 항복할 것이고 이라크 시민들이 꽃을 들고 와서 미군들을 환영할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러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라크 TV와 한 이 인터뷰 내용은 미국을 비난하는 기사로 이용되었고 그는 미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더이상 NBC와 일을 하지 못하게 됐는데 엄연히 따지면 해고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NBC랑은 계약이 돼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탁에 따라 도와주고 있었던 것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NBC랑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되자 바로 런던의 데일리 미러지와 다른 4개의 TV 방송사에서 그를 고용해 그는 전쟁동안에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바그다드에 계속 남아 이라크의 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의 이라크 상황에서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국익을 위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현재 이라크의 혼란을 보면 그것은 그만되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의 언론의 역할은 이라크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뭐가 필요한지를 알아서 알려주는 것이 기자의 몫이라고 했다.
거기까지가 그의 강연내용이었다. 강연이 있은 뒤에는 역시 질문 시간이 이어졌다.
***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