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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철거된 어릴적 동네, 11년 만에 돌아오다

[인-잇] 철거된 어릴적 동네, 11년 만에 돌아오다

파파제스 |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예쁜 딸을 키우는, 육아하는 아빠

SBS 뉴스

작성 2020.11.20 11:05 수정 2020.11.20 14:3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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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릉 스르릉'

방에 누워 있으면 쇠 파이프 끄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 밤 용역 직원이 저런 소리를 내며 동네 구석구석을 다닌다. 골목 끝에서 시작된 소리는 집 앞을 지날 때 가장 커진다.

'스르릉 스르릉'

한강로 3가 63번지. 나는 이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교를 거쳐 군대까지 갔다 왔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 동네에 새로운 이름이 붙어져 있었다.
 
'용산4구역 도시환경 정비구역'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된 우리 동네는 곧 철거된다고 했다. 한 집 두 집 동네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사 간 집에는 빨간 스프레이로 '공가'라는 글씨가 써졌다. 늘 인사하고 지내던 앞 집도, 옆집도 이사를 가고 대문에는 크게 '공가'라는 글씨가 칠해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문은 비틀어져 있고 마당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흉물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이 골목에서 남은 집은 우리 집과 골목 끝 슈퍼마켓 뿐이었다.

사람이 떠나 간 동네는 밤이 되면 더 적막해졌다. 인기척 없는 골목에 어둠이 내리면 묵직한 적막을 뚫고 '스르릉' 하는 쇠 파이프 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은 골목과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있어 그 소리가 매우 선명하게 들렸다. 소리는 골목이 끝나는 곳까지 이어지다가 희미해지면서 동네 어딘가로 향해 사라져 갔다.

'저 쇠파이프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누굴까?' 동네 사람들은 그들을 용역 직원 또는 '용역 깡패'라고 불렀다. '스르릉'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용역이 그대로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일 밤 불안했다. '왜 이사를 가지 않냐?'고 아버지를 재촉했지만 그때마다 '이 보상비로는 어디 갈 데가 없다'는 말씀만 하셨다. 어디라도 빨리 이사 가자는 어머니와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아버지 사이에 매일같이 말다툼 있었다. 내게 집은 더 이상 쉼터가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라도 도서관 문 닫는 시간까지 버티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듬해 1월 겨울방학, 아침 일찍 영어 학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여느 날처럼 삼희약국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용산역 쪽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불길함이 엄습해 왔지만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아침 8시까지 영어 학원에 가야 했으므로 발길을 서둘렀다.

"야, 오늘 용산에서 불났대. 엄청 큰불이라던데"
'어? 용산이면 우리 동넨데..'

그날 점심시간, 나는 밥 먹던 숟가락을 멈추고 그 친구에게 물었다.

"용산 어디?"
"용산역 앞이라는데... 사람이 죽었대"

나는 순간 아침에 봤던 그 검은 연기를 떠올렸다. '에이 설마.' 내가 지나친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을 리 없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이 번졌다. 그 화재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사망자 중에는 경찰도 있었고 동네 주민도 있었다. 남일당, 전철연, 경찰특공대, 강제 진압, 화재. 그런 단어들을 기사로 접했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우리 동네에서 사람이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 사고를 '용산 참사'라 불렀다.

사고가 난 남일당 앞에서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임시 분향소가 차려졌다. 각계 인사들이 분향소를 찾고 사회 곳곳에서 희생자를 애도하는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현장에 갈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버스를 타러 갈 때도 남일당을 피해 빙 둘러 갔고 관련 기사도 일체 찾아보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우리 동네에서 사람이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당시 세입자, 철거, 참사와 같은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군대를 전역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고 알바와 과외를 병행하며 가까스로 학기를 마쳤다. 대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누구는 여행을 가고 누구는 인턴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근근이 학업을 이어 가는 상황이었다. 이제 곧 4학년이 되어 취업 준비해야 하는 상황인데 학점도 토익 점수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공부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내 마음을 추스를 방법이 없었다. 그땐 공부만이 이 참담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용산 참사와 나를 분리함으로써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사고 이후에도 그 동네에서 두 달 남짓 더 살았다. 그해 봄 우리 가족은 동빙고동에 있는 반지하에 월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볕이 안 들긴 했지만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 좋았다. 이듬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몇 년 후 누나와 나는 결혼을 하고 출가를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용산 참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11년이 더 지난 지금 다시 용산 참사를 꺼내 본 이유는 저번 달에 부모님이 그 동네로 다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철거민 중 우리 부모님은 공공임대주택 입주 조건에 맞아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분이 겨우 지낼 작은 평수지만 햇볕도 잘 들고 쫓겨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내려다보였고 자주 갔던 놀이터도 여전했다. 오래 걸렸어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분들이 있다. 옛 남일당 자리에 우뚝 솟아 있는 고층 빌딩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더라도 함께 할 수는 없었을까. 건물이 조금 늦게 올라가더라도 분명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집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 집은 재산을 불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집은 가족이 함께 모여 따뜻한 밥을 먹고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와 쉬는 곳이며, 밤에는 편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다. 더 이상은 '스르릉' 쇠 파이프 소리를 들으면서 불안에 떠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매일 밤 각자의 보금자리에서 편안하게 잠자길 바라는 게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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