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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여전히 계속되는 모두의 이야기…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북적북적] 여전히 계속되는 모두의 이야기…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20.11.15 07:1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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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66 : 여전히 계속되는 모두의 이야기…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메리 카마이클이 천재도 아니고, 돈과 시간, 여유 같은 바람직한 조건들도 부족한 상황에서 침실 겸 거실 한 칸에서 첫 책을 쓰고 있는 무명의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며 (누군가 거실의 커튼을 젖혀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코와 맨 어깨가 적나라하게 보였지요) 그녀에게 100년이란 시간을 더 주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녀에게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를 주자. 그녀가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지금 쓴 것의 절반을 빼 버리게 놔두자. 그러면 그녀는 조만간 더 나은 책을 쓸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메리 카마이클이 쓴 <생의 모험>을 책장 끝에 꽂으며 그녀는 시인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말이지요."

세기의 명작: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지만, 읽은 사람도 없는 책.

우리가 많이 쓰는 관용구들의 '진짜 뜻'을 담은 사전을 만든다면 '세기의 명작' 항목에는 대략 위와 같은 설명이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세기의 명작' 중에는 실제로 읽어보면 "아니, 이렇게 재미있는데, 왜 이제야 읽을 수 있게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명작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가지 요소 중 일단 1번 요소가 재미, '흡인력'일 텐데, 막상 '세기의 명작' 반열에 오르고 나면 거창한 수식어에 짓눌려 그 재미가 보이지 않게 되는 거겠죠.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그야말로 '세기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입니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읽은 사람도 없는. 저 역시 영문과를 나왔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재미있다니! 이렇게 신랄한 유머를 적재적소에 구사하다니! 그리고 한 줄 한 줄 이다지도 유려한 문장으로, 하는 말마다 쾌감이 느껴질 만큼 폐부를 파고드는 적확하고 강력한 통찰을 제공한다니.

책 한 권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탁 덮는 그 순간, 그 작고 각진 물건으로부터 말 그대로 '오라' 같은 게 피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 내가 엄청난 걸 읽었구나.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과 그 이후는 다를 수밖에 없겠구나. [자기만의 방]은 바로 역사 속의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울프가 1928년 10월,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의 여대였던 뉴넘과 거턴 대학에서 했던 강연의 내용을 줄여 담았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처음 이 에세이집을 접했을 무렵의 나이와 비슷한, 당시의 여자 대학생들을 상대로 들려준 말들을 정리해서 출판한 겁니다. '여성과 픽션'이란 주제로 젊은 여성들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해주면 될까. 그 고민에서 태어난, 여성과 문학, 문명에 대한 통시적이고 다각적인 통찰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답고 유연한 문체와 구성 속에 담겼습니다.

"여기서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여성들이 왜 시를 쓰지 않았는지 묻고 있지만,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글 쓰는 법을 배우긴 했는지, 자기만의 방이 있었는지,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출산한 여자는 얼마나 되었는지, 간단히 말해 그들이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돈이 없었습니다. …… 셰익스피어에게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누이, 이를테면 주디스라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마치 울프가 시공을 뛰어넘어 제게 다가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모든 말들이 그야말로 가슴에 쏙쏙 파고들어와 박혔습니다. 그전까지 제가 깊이 고민했고, 궁금해 했고, 좌절감을 느꼈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미 100년 전에 이렇게 정리해 준 언니가 있었던 거예요!

어째서 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이 보이지 않을까. 여성은 어떻게 해서 문명의 주역이 아니라, 문명의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는 존재들이 되었나. 최소한의 교육을 확보하고, 복수심이나 외부의 논리에 조종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개성과 여성적 특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예술의 경지에 단 몇 명이라도 이를 수 있는 환경에 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틈틈이, 서재 없이 식탁에서 몸부림쳐 왔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여러분 뉴넘과 거턴대학교 학생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면 될까. 인생 후배 여대생들을 둘러보며 버지니아 울프가 풀어놓았던 언니의 마음, 그 위대한 마음이 이후 100년 간 문학 여성주의의 토대가 됩니다.

시종일관 신랄한 유머 속에 격정과 분노를 품위 있게 감추며 골몰해 온 문제의식을 풀어놓다가 문득 '인생 후배'들을 향한 간곡한 진심을 드러내는 말미에 다다라,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지난 100년간 눈시울을 붉혔을 겁니다. 이 책에는 너무 유명한 구절과 개념과 표현들이 많아서, 낭독을 듣다가 '어 이거 어디서 다 들은 얘기잖아' 싶어 질지도 모르겠어요. 그 구절과 표현과 개념들이 바로 여기, 이 강연, 이 책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100년 동안 그의 '역사 속 후배'들이 인용하고,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2020년 오늘날 우리 귀에 익도록 남았습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권을 꺼냈습니다. 그것은 책장 맨 끝에 있었는데 <생의 모험>인가 하는 소설로 메리 카마이클(요즘 '부캐'가 유행하죠? 메리 카마이클은 버지니아 울프가 종종 등장시키던 '부캐'입니다.)이 쓴 것이며 바로 이번 달은 10월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녀의 첫 책인 모양이라고, 나는 중얼거렸습니다. …….
그녀가 작가로서의 의무를 다한다면, 나도 독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리라 마음먹으며 책장을 넘기고 읽었습니다. …… 갑자기 중단해서 미안합니다만, 여기에 남성은 한 사람도 없겠죠? 저기 붉은 커튼 뒤에 차터스 바이런 경(1928년 출간된 래드클리프 홀의 레즈비언 소설 <고독의 우물>에 대해 금서 처분을 내린 판사)이 숨어 있지 않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여기 모두 여성들 뿐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제가 읽은 바로 다음 문장을 말해드리죠.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 놀라지 마세요. 얼굴을 붉히지도 마세요. 우리끼리만 있는 자리니 가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자고요. 때로 여성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보다 더 어떻게 자신의 일에 매진하라고 격려할 수 있을까요? 젊은 여성분들, 이제 결론이 나오고 있으니 집중해주십시오. …… 1866년 이래 영국에는 여성을 위한 대학이 적어도 두 곳 존재해 왔으며, 1880년 이후에는 기혼 여성이 재산을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허용되었고, 1919년 –정확히 9년 전이군요-에 여성이 투표권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전문직이 여러분에게 개방된 지 거의 10년째 되어간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드릴까요? 여러분이 이 막대한 특권들과 그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기간을 심사숙고해보고, 이 순간에도 이런저런 방법으로 연간 500파운드 이상을 벌 수 있는 여성이 약 2만여 명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기회가 부족하고 훈련이나 격려를 받지 못했으며 한가로운 시간과 돈이 없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할 겁니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은 시턴 부인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러분도 계속 아이를 낳아야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기로는 열이나 열두 명이 아니라 둘이나 셋이어야 한다는군요."

"이제 나는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여러분과 내 안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반드시 그녀는 살아 있습니다.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이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저 육신을 갖고 우리 사이를 걸어 다닐 기회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힘으로 그녀에게 이런 기회를 줄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100년 정도 살게 되고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각자의 짧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공동의 삶 말입니다- 각자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관을 가지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기회가 다가오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은 그렇게 자주 포기했던 육신을 걸칠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그 100년 뒤가 바로 지금입니다. (정확히는 92년 뒤이네요.) 그러나 그녀가 이 책에서 제기한 많은 문제들은 놀라울 정도로 현재 진행형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긴 지 고작 9년 뒤에 했던 이 강연에서, 너희 대학생들이 나서서, 자신이 상상해 본 '셰익스피어의 죽은 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시인을 너희 안에서 되살려 달라고 간곡히 호소합니다. (메리 카마이클은 이미 그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꼰대죠. "라떼는 말이야~ 지금 너희는 우리와 달리 말이야~" 하는 그 꼰대 맞습니다. 하지만 그 꼰대는 노력해 보다가 깨달았거든요. 어쨌든 변화는 여기서, 나에게서, 우리에게서 시작하는 거야. 내가 던져진 조건만 생각하고 있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어. 이 책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의 '부캐' 메리 카마이클에게 '자, 세상이, 기존 질서가, 기득권 남성들이, 문명의 기록이, 관습이 뭐라고 해대든지 간에, 돌아보지 말고 달려가! 그 말들 듣지 말고 울타리를 넘으라고! 아, 또 울타리가 있다고? 그냥 지치지 말고 계속 뛰라고!' 이런 식으로 채근했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울프가 여대생들에게 던지는 충고는 곧, 그 스스로와 '부캐'가 느꼈던 위기의식인 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목이 조금 멨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샜을 그 수많은 갈등의 밤들과 그 고민 끝에 나온, "나 이 녀석, 두리번거리지 말고 그냥 계속 앞만 보고 정진해!"… 이 주문. 우리 모두 저마다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걸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잖아요.

이 책에 담긴 문제의식들은 92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좀더 긴 시간을 요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버지니아 울프와 메리 카마이클과 그의 역사 속 후배들은 조금씩 세상을 바꾸어 왔으며, 나 역시 셰익스피어와 달리 무명으로 죽은 그의 누이를 되살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지치지 않고 이 자리에서 "나 이 녀석, 그냥 달리라고!" 주문을 외울 거예요. 아마 들어주시는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공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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