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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서진 룸살롱 사건…'사형수'가 된 '키다리 아저씨' 고금석 이야기

'꼬꼬무' 서진 룸살롱 사건…'사형수'가 된 '키다리 아저씨' 고금석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가 공개됐다.

12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 중 하나였던 서진룸살롱 사건과 사형수 고금석에 대해 조명했다.

강원도 정선 산골 오지에 자리한 한 분교, 학생 수는 28명에 교실도 하나였던 학교의 아이들은 매번 5만 원과 함께 편지를 보내오는 한 아저씨를 기다렸다. 그러나 선생님 조차 아이들에게 편지와 돈을 보내주는 아저씨의 정체는 몰라 모두들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렀다.

하루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한 번도 바다에 가 본 적이 없다며 바다에 가고 싶다고 답장을 했다. 이에 키다리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8월 12일, 부산 해운대로 초대할게"라고 회신했고 아이들은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편지 후 아저씨의 편지는 뚝 끊어졌다.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고 8월 3일 해운대의 삼중 스님에게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삼중 스님은 이 전화를 받고 오열했다. 그는 50여 년을 교도소를 왔다 갔다 하며 300여 명의 사형수의 곁을 지키며 사형수의 아버지라고 불린 인물.

이에 삼중 스님은 "고금석의 사형이 내일 오전 서울 구치소에서 집행된다고 하더라. 내가 그때같이 괴로운 적이 없었다"라며 "그만큼 나는 그를 사랑하고 나보다 더 아꼈다"라고 했다.

그 전화를 받고 곧바로 구치소로 향한 삼중 스님. 그는 25살의 사형수 고금석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 앞에 고금석은 삼배 절을 하고 "왜 이러십니까 하고 나보고 늘 마지막에 웃으면서 멋지게 가라고 하셨잖냐"라고 스님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의 바다 여행을 잘 치러주세요. 위험하지 않게 곁에서 지켜봐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대로 향했다. 그가 바로 산골 분교 아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키다리 아저씨였고 그는 아이들과 바다 여행을 약속한 1주일 전 사형을 당했던 것.

그리고 고금석은 바로 1986년 8월 14일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조폭들 간의 칼부림 사건 '서진룸살롱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이었다.

조직폭력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활약했던 조폭 1기 낭만파 주먹 시대, 그리고 이승만 정권 당시 주먹과 정치가 결합해 공생했던 조폭 2기 정치 깡패 시대, 그리고 이를 지나 지방 조폭들이 상경해 서울 조폭계의 패권을 다투던 조폭 3기 전국구 조폭 시대로 이어졌다.

조폭 3기 전국구 조폭 시대의 조폭 3대 패밀리로 불리던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범서방파, 이동재의 OB파는 모두 호남 출신. 당시 영남으로 치우쳤던 국토 개발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던 호남 출신들이 대거 상경했고 그런 이들의 서울의 밤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서진 룸살롱 사건은 조폭 3기 전국구 조폭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사건이었다.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20분 강남 역삼동 최고급 룸살롱 서진 회관에는 22살의 고금석이 일행들과 함께 16호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고금석이 속한 조직은 서울 목포파. 이들의 아지트였던 서진 회관에는 거구의 사내들 7명이 등장했고 그들은 17호실로 안내되었다.

이미 잔뜩 취한 상태로 서진 회관을 찾은 17호실 손님들은 웨이터를 불러 돈 4만 원을 주고 위스키를 2병 가져오고 안주는 그냥 달라며 강짜를 부렸다. 그들의 분위기와 외향에 압도당한 웨이터는 군소리 없이 자리를 떠났고 17호실 손님들은 시간이 지나도 주문한 것이 나오지 않자 웨이터를 다시 불러 불평불만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방이 왜 작냐고 시비를 걸던 17호실 손님들은 방이 없다는 웨이터의 말에 그를 폭행했고 이후 16호실에 불려 간 웨이터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리고 웨이터는 17호실 손님들이 김태촌의 이름을 언급했다고 말해 분위기는 일순 싸해졌다.

사실 17호실 손님들은 김태촌의 범서방파의 방계 조직 중 하나인 맘보파 소속들이었던 것.

이후 고금석과 일행은 화장실에 다녀왔고 복도에서 17호실의 최두석과 마주했다. 190cm 키에 100kg 거구였던 최두석은 헤비급 복서 출신으로 1:1 싸움으로는 김두한 이후로 최고라고 불릴 정도의 강자였고 그는 맘보파의 행동대장이었다.

그는 고금석 일행과 시비가 붙었고 그러던 그때 고금석의 일행이 최두석을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다. 최두석과 고금석의 일행은 동향 선후배 사이였던 것. 그런데 이를 보던 고금석은 일면식 없는 최두석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고 이에 최두석이 고향 선배도 몰라보냐며 고금석의 따귀를 여러 차례 때렸다. 그리고 고금석은 최두석을 노려보았고 신경전을 펼치던 둘은 결국 싸움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에 최두석은 17호실 일행들을 소환하고 이들은 고금석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보던 고금석의 일행들도 모두 나와 싸움을 벌였다.

사실 맘보파는 이런 싸움에는 이골이 난 상태라 여유로웠다. 그러나 서울 목포파는 모두 같은 대학 유도학과 선후배 사이로 그들과는 조금 다른 마음이었다. 당시 서울 목포파 두목 장 씨는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한 상태로 사무라이, 마피아 문화를 동경하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는 전국 조폭계를 정화하겠다는 목표로 조직을 만들고 합숙, 지옥 훈련까지 했다.

맘보파와 서울 목포파의 싸움이 계속되던 그때 서울 목포파 행동대장이 발목에 있던 칼을 꺼냈다. 그리고 이를 본 최두석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찌를 테면 찔러봐"라고 도발했다. 순식간에 치킨 게임이 된 상황에서 서울 목포파 행동대장은 칼로 최두석의 팔을 내리치고 고금석은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맘보파 조직원들은 놀라서 최두석을 데리고 일부는 화장실로 도망가고 몇몇은 17호실로 대피했다. 그리고 서울 목포파는 차 트렁크에 있던 야구 방망이, 칼을 가지고 와서 무장해 맘보파를 위협했다. 일부는 화장실로 가서 공격하고 일부는 역기로 17호실 문을 열고 들어가 순식간에 칼부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가장 앞에서 칼을 휘둘렀던 이가 바로 고금석이었다.

그는 훗날 법정에서 피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혀서 멈출 수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범죄 사실을 그의 지인들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낙도 학교 선생님으로 섬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아버지와 사랑으로 고금석을 키운 어머니 사이에서 고금석은 누구보다 바르게 자랐고 그에 대한 칭찬은 마을 내에 자자했다. 그런 그는 돈을 벌면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위해 자가용을 사드리겠다는 꿈이 있었다.

이에 대학 입학 후 아르바이트도 하며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았던 고금석, 그런 그는 고향 선배 장 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를 눈여겨본 장 씨가 그에게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지신을 도와주면 돈을 벌 수 쉽게 벌 수 있다는 것.

당시 100kg의 건장한 체격에 유도 유단자였던 고금석에게 장 씨는 천호동 나이트클럽 카운터를 보라고 했고 어렵지 않은 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선배의 호출로 간 곳에서 흉기를 들고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선배들을 목격한 고금석은 싸움에 휘말리고 싸움이 끝나자 큰돈을 주는 상황에 그는 조금씩 조금씩 조직 세계에 더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 사이 순수했던 섬마을 소년은 흉악한 칼잡이가 되어 갔던 것.

당시 취재 기자들은 사건 현장인 서진 회관 내부를 보고 "그곳에 들어갔을 때 마치 지옥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던 사건, 그리고 국민들은 당시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범인들의 뻔뻔함에 분노했다.

당시 두목 장 씨는 25살 행동대장 김 씨는 23살로 어리다면 어린 20대 청년들이었던 그들은 4명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일말의 죄의식은 느껴지지 않았고 언론은 이들을 향해 10인의 살인 폭력배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들은 검거 보름 후 진행된 현장 검증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검거 당시와 달리 죄를 뉘우치고 사죄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던 이들. 그제야 자신들이 갖고 있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서울 목포파 10인은 대부분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고금석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뜻밖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너무도 끔찍한 사건으로 조폭을 뿌리 뽑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범죄와의 전쟁 선포했던 것. 범죄와의 전쟁은 헌범이 부여한 모든 권한을 동원해 조폭을 소탕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한 이등병의 양심선언으로 밝혀진 국군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이에 비난을 면치 못한 노태우 정권은 이 사건 폭로 열흘 만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

당시 정부는 경찰 16000명 충원했고 이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하루 16시간 이상 근무를 했다. 이에 당시 격무에 시달리던 경찰청 형사국장 과로로 사망했고 그 외에도 당시 순직한 경찰 126명, 부상이 2000명이 넘었다.

이 범죄와의 전쟁으로 조직폭력배 조직 274개를 소탕했고 1421명을 검거했으며 1086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폭 시대의 종말이 찾아왔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목포파가 꿈꿨던 일이었던 것.

고금석은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수로 수감 생활을 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불교에 귀 이해 새벽마다 일어나 참선을 하고 참회의 절을 매일 삼천 번씩 올렸다. 이에 삼중 스님은 "끊임없이 참회했다.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천일 동안 기도를 했다"라고 그를 떠올렸다.

고금석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옥중 편지도 남겼다. 그는 편지를 통해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철없는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에 파리 모기에 시달려도 한 마리도 죽일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라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후회했다.

사건 발생 3년째가 되던 1989년 8월 3일 사형을 앞둔 고금석은 삼중 스님에게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게 도와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금석이 사랑한 여인은 그의 첫사랑이었던 윤 씨.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 윤 씨는 고금석을 매일매일 면회를 왔고 그와 옥중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윤 씨는 고금석의 사형이 확정된 줄 알면서도 옥중 결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지만 법무부는 미결수의 옥중 결혼이 불가능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윤 씨는 "사형이 집행돼도 두렵지 않아요. 여승이 되어 평생 그의 명복을 빌면서 살게요"라고 끝까지 매달렸고 결국 고금석은 윤 씨를 위해 그의 면회를 모두 거부했다. 그러나 윤 씨는 매일같이 고금석을 찾아갔다.

평소처럼 면회를 온 윤 씨, 그러나 이 날 교도관은 평소와 반응을 보였다. 교도관은 윤 씨에게 "오늘 아침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라고 고금석의 사형집행을 알렸다. 이에 윤 씨는 그 자리에 앉아서 오열했고 이를 보던 교도관도 그를 안타까워했다.

고금석이 떠나고 1주일 후, 삼중 스님은 산골 분교 아이들과 해운대 여행을 했다. 그리고 곁에는 윤 씨도 함께 했다. 사랑했던 고금석의 소원을 자신이 대신했던 것.

그리고 이날 삼중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번 바다 잔치는 한 아저씨가 베풀어 준거란다, 그 아저씨는 여기 올 수 없었어. 그 아저씨 이름은 고금석이다"라고 했다. 이후 아이들은 삼중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이들은 편지에 "고금석 아저씨는 우리들을 바다에 보내주셔서 고마운 분이에요, 고금석 아저씨가 우리가 바다에 가서 놀고 있는 것을 못 보고 돌아가셨나요? 돌아가셔서 안됐어요. 그럼 몸 건강하세요"라는 진심을 담았다.

얼마 후 산골 분교에 야외 교실이 지어졌고 이 곳의 이름은 금송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금석이 모은 영치금을 지은 이 곳에 고금석의 법명을 붙인 것.

고금석이 남긴 염주를 아직도 지니고 있는 삼중 스님은 "난 금석이를 늘 만난다. 물론 그는 사형수였다. 사형이라는 죄목에 대해서는 억울하니 할 이야기는 없고,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배운다"라며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떠날 때 보면 안다. 고금석은 내게 그런 사람이다"라고 그를 회상했다.

고금석의 이야기를 들은 한지은은 "어떤 이유였던 사람을 죽인 것은 굉장히 잘못한 것임에 분명한데도, 내막을 들여다봤을 때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나를 복잡하게 한다"라고 했다.

또한 김동현은 "나쁜 면은 자기가 누르고 평생 누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터져 버리면 누구나에게 독이 되어 올 수밖에 없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준혁은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른 것인데 그것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라며 "나를 세우는 것은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다"라며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망쳐 버린 인생에 대해 말했다.

장항준은 "조직폭력배에 대한 동경을 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에 인생은 너무 아깝다. 순간은 되돌릴 수 없다"라고 조언했다.

(SBS 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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