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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기자회견 취소하고 청구서 내밀기…'용병 인증' 에스퍼의 난장

[월드리포트] 기자회견 취소하고 청구서 내밀기…'용병 인증' 에스퍼의 난장

김수형 기자 sean@sbs.co.kr

작성 2020.10.16 11:2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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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급 난장'…돌연 취소된 워싱턴 국방장관 기자회견

어제(15일) 워싱턴 펜타곤에서 열렸던 한미안보협의회는 역대급 난장판 수준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한국에서 국방장관이 오면 의장대 행사를 마친 뒤, 국방장관 회의와 공동 기자회견을 한 뒤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매해 공식처럼 반복되는 일이었습니다. 의전을 다른 조직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국방부에서 이런 행사가 뒤죽박죽 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기자들에게 행사 당일 양국 국방장관의 공동 기자회견이 돌연 취소됐다는 통보가 왔습니다(미국이 취소 의사를 전한 건 전날이었다는데, 밀당이 오가다가 현장에는 당일에 통보됐다고 합니다). 미국 측 요청에 의한 취소였는데, 사유를 들어보니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민감한 시기여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장관이 모이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런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은 대단한 외교적 결례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부처 실무자들이 사전 조율을 했을 텐데, 준비 기간 동안 아무 문제없이 행사 순서를 결정했다가 느닷없이 당일 취소를 통보하는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개인이 식당 예약을 했다가 '노쇼'를 해도 욕을 먹을 판에 장관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올해 초, 워싱턴에서 한미 국방장관 회의가 열렸을 때 펜타곤 기자실에서 에스퍼 장관에게 직접 현안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기자 2명, 미국 기자 2명에게 질문을 받았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하는 기자회견처럼 몇 시간씩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답변도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올해는 워낙 심각한 미국의 코로나 상황 때문에 현장에 접근하는 취재 인원 자체가 제한돼 있어, 격렬한 문답이 오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다 알면서 펜타곤이 갑작스럽게 통보했다는 건 일부러 상대국을 모욕 주려는 의도가 읽혔습니다. 민감한 시기를 이유로 취소를 하려고 했으면, 처음부터 공동 기자회견은 안 한다고 일정 조율을 했었어야 합니다. 만약 사전에 양국 장관의 공동 기자회견은 없었다고 조율됐다면 우리 정부나 기자들도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스퍼 미 국방장관 (사진=연합뉴스)
● 보기에도 민망한 청구서 내밀기…"미국 납세자에 불공평해서는 안 돼"

언론에는 양국 장관 회담의 시작 발언만 공개가 됐는데, 에스퍼 장관은 거의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조급하게 방위비 분담금 청구서를 들이밀었습니다. 올해 초 장관 회담에서도 분담금 압박을 하기는 했지만, 올해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었습니다. 에스퍼 장관은 "방위 비용 부담이 미국 납세자에게 불공평하게 지워져서는 안 된다"며 다분히 대선을 의식한 정치적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납세자를 거론한 건 미국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발언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좋아할 만한 언급이었습니다. 한국도 나토와 함께 집단안보를 위해 더 기여하라고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선거 때문에 예민해서 공동 기자회견을 취소했다지만, 정작 에스퍼 장관은 트럼프 선거에 도움되는 정치적 발언은 한참을 이어갔던 겁니다.

양국 장관의 공동 성명에서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내용을 빼버린 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였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와서 매티스 장관 때부터 양국 장관의 공동성명에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내용은 항상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문구 자체는 선언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걸 빼버리는 순간 그건 삭제를 요구한 쪽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넣자고 했는데 미국이 거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미국은 돈을 더 뜯어내기 위해서 주한미군 감축을 카드로 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넣고 싶었던 겁니다.

에스퍼 미 국방장관, 서욱 국방장관, 한미 안보협의회 (사진=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 호의를 악의로 되갚은 미국…우리 준비는 문제없었나

서욱 국방장관은 에스퍼에게 줄 선물도 챙겨 왔습니다. 부채에 초상화를 그린 것이었는데, 미국 국방부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다.

에스퍼 미 국방장관, 서욱 국방장관, 한미 안보협의회 (사진=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첫 상견례를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사전에 노력했던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가 손님 불러 망신주기를 택하면서 우리의 호의를 악의로 갚은 꼴이 됐습니다. 한국 기자로서 이런 장면을 지켜보는 게 내내 마음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거가 임박한 상황에 워싱턴에 들어오는 우리 국방장관이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이든 후보에 큰 격차로 여론조사에서 밀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기세입니다. 다니는 현장 유세마다 동맹의 갈취를 비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홈그라운드에 들어올 때 미국 국방부가 어떻게 나올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면도 있습니다. 공동성명 문구 조정부터 행사 준비까지 물 밑에서 조율하며 미국 측의 돌발 행동에 더 면밀하게 준비했어야 합니다. 우리 국방부가 미국이 과연 이렇게 나올지 몰랐을지는 의문입니다. 그걸 알고도 행사를 진행했다면 무모한 것이고, 모르고 강행했다면 무능하다는 비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에스퍼 미 국방장관, 서욱 국방장관, 한미 안보협의회 (사진=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 트럼프 경질 1순위…에스퍼가 남긴 '용병 미군'

에스퍼 장관은 한때 '예스퍼'라고 불릴 정도로 트럼프의 맹목적 충성파로 분류됐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을 들끓게 했던 인종 차별 반대 시위를 거치면서 트럼프의 눈 밖에 완전히 났습니다. 폭동 진압법으로 시위대를 밀어버리고 싶어 했던 트럼프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대통령이 갈아치우려고 했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최루탄 쏘며 시위대 해산시키고 트럼프 대통령과 사진 찍으러 같이 교회에 갔다가 군을 정치에 활용한 최악의 장관이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은 모르고 따라갔다고 해명하기는 했지만, 트럼프한테도 좋은 소리 못 듣고, 군 조직에도 인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트럼프가 재선해도 경질 1순위, 낙선하면 자연스럽게 공직을 정리해야 하는 수순입니다. 하지만 이번 행사를 지켜보면서 에스퍼는 여전히 장관직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굳이 트럼프와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국에 무례함을 드러내며, 거칠게 몰아세우는 방식을 취하는 게 결국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미군 가운데 자신이 용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에스퍼 국방장관이 보여준 태도는 군인의 명예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용병 같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관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국에 뭔가를 요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분담금 협상 당사자도 아닌 국방장관이 굳이 나서서 정치 행위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수십 년간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동맹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하나씩 멀어지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에스퍼 장관 트위터 캡처, 국방부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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