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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임진왜란 한 서린 '귀무덤'…일본인, 첫 위령제 올린다

[월드리포트] 임진왜란 한 서린 '귀무덤'…일본인, 첫 위령제 올린다

'교토 평화의 모임', 올해 위령제 개최 계획 발표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작성 2020.10.15 09:41 수정 2020.10.15 09:4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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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京都)시 히가시야마(東山)구의 교토 국립박물관 바로 옆에 도요쿠니(豊國) 신사(神社)가 있습니다. 이 도요쿠니 신사는 사실 일본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교토의 도요쿠니 신사가 전국 도요쿠니 신사의 '총본산' 격입니다. 도요쿠니 신사는 1592년 조선 침략으로 우리에게도 악명 높은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武將)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곳입니다. 교토 도요쿠니 신사 앞으로는 남북으로 난 큰 길이 하나 있고, 이 길을 건너면 작은 공원 끝에 오래된 주택가를 배경으로 땅 위로 불룩하게 솟아오른 봉분이 하나 나옵니다. 표지판에는 이총(耳塚), 즉 '귀무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지도에는 공원의 이름도 '이총 공원'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기자가 2016년 방문한 교토 '귀무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익숙합니다. 왜군이 당시 조선에서의 이른바 '전공(戰功)'을 자랑하기 위해 학살한 조선 병사와 민간인의 '목'을 보내는 대신 이송에 편리하도록 귀나 코를 택했다는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도요토미는 보고받은 귀와 코의 숫자에 따라 '영수증'을 써 주고 이를 침략 장수들의 논공행상에 활용했으며, 일본 각지를 돌며 이를 전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토를 포함해 일본 내 5곳-오카야마에 2곳, 후쿠오카에 1곳, 쓰시마(대마도)에 1곳, 교토에 1곳-에 이 '귀무덤'이 있는데 교토 도요쿠니 신사 옆에 있는 귀무덤이 가장 큽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약 조선인 12만 6천여 명의 귀나 코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수학여행으로 가장 많이 찾는 장소 가운데 하나인 교토 한 복판에, 이렇게 큰 귀무덤이 그대로 있는데도 일본은 귀무덤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학교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장에 작은 표지판 하나, 그리고 관리 주체인 교토시청 홈페이지의 간단한 설명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교토 귀무덤 앞에서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교토지부가 10년 넘게 위령 행사를 개최하며 원혼을 위로하는 행사를 가져왔지만, 일부 뜻있는 일본인들 몇몇만 이 행사에 참여해왔을 뿐입니다.

2016년 11월에 개최된 민단 주최 위령제를 다룬 아사히 신문의 기사.
이런 상황에 올해부터는 변화가 생길 것 같습니다. 지난해 12월, '교토에서 세계에 평화를 확산하는 모임', 약칭 '교토 평화의 모임'이 결성됐는데 올해 위령제를 이 모임이 주도해서 개최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민단에서 개최하는 귀무덤 위령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던 현지 다도가 윤도심(63) 씨의 지인인 일본인 오구라(小椋, 96) 씨가 윤 씨를 통해 4년 전 행사에 처음 참석했는데, 이 행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 개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구라 씨는 교토 출신으로 현지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던 전직 관료 출신 아마키 나오토(73) 씨에게 이런 생각을 전했습니다. 외무성에서 주레바논 일본대사까지 지냈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방관하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반대해 외무상 앞으로 전문을 보냈다가 면직당한 아마키 씨는 지난해에는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로 세운 '신당 헌법 9조'의 대표 자격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교토 지역을 중심으로 진보적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키 씨는 '귀무덤'에 묻힌 임진왜란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열자는 오구라 씨의 호소에 공감해 '교토 평화의 모임'을 만들고 올해 처음으로 위령제를 주도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일본인들의 손으로 개최하는 첫 위령제가 열리게 된 셈입니다.

아마키 전 대사는 지난 12일 도쿄에서 기자와 만나 위령제 개최 계획과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귀무덤 위령제'에 대해 설명하는 아마키 전 주레바논 일본 대사.
아마키 씨 본인도 교토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나왔지만 가까이 있던 '귀무덤'에 대해서는 지난해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령제를 열기에는 공부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한 아마키 씨는 귀무덤에 대한 연구에 천착해 온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명예교수의 논문과, 여기에 위령제에 함께 뜻을 모은 '교토 평화의 모임' 참석자들의 특별기고를 묶어서 지난달 한 권의 책을 펴내기에 이릅니다. '기린麒麟이여 오라'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책의 제목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 '기린'을 등장시켜, 한일 양국의 화해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기린이여 오라' 띠지에 적히 문장. "일한화해의 결정타는 이것이다!"
아마키 전 대사는 "현재 한일 양국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과거 역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필요하다"며, "(시대를 막론한) 일본의 만행에 대해 확실한 사과가 있어야 하고,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인식의 공유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교토 평화의 모임'이 주최하는 위령제는 오는 23일에 현지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이 단체는 위령제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당시 희생된 조선인의 혼을 일본인들이 직접 진혼·위로함으로써 과거 일본과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의 은원을 뛰어넘어 일본과 한반도의 장래에 걸친 관계 개선을 기원하고자 한다]

'교토 평화의 모임'은 이번 위령제에 교토시와 한국(민단), 북한(조총련) 관계자의 참석을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아직 어느 쪽도 참석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면서 현재 차갑게 얼어붙은 한일 관계, 북일 관계의 영향도 있을 거라고 분석했습니다.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아마키 씨는, 가능하다면 초청장을 수령한 교토시와 민단, 조총련 모두가 위령제에 참석해 취지를 살리는 데 동참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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