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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마법 같은 칩인 이글' 이미림 "헐, 대박!…내가 미쳤구나"

[취재파일] '마법 같은 칩인 이글' 이미림 "헐, 대박!…내가 미쳤구나"

서대원 기자 sdw21@sbs.co.kr

작성 2020.09.15 17:0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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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마법 같은 칩인 이글 이미림 "헐, 대박!…내가 미쳤구나"
어제(월) 끝난 LPGA투어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이미림 선수가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최종 라운드 17번 홀까지 선두 넬리 코르다(미국)에 2타를 뒤져 승부는 이미 끝난 듯 보였지만 이미림은 믿기 어려운 반전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지막 18번 홀(파5), 그린 밖에서 친 세 번째 샷을 그대로 집어넣어 '칩인 이글'을 잡아 기어이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고, 기세가 오른 이미림은 코르다, 브룩 헨더슨(캐나다)과 펼친 연장 첫 홀에서 가볍게 버디를 잡아 두 선수를 따돌리고 우승했습니다. 3년 6개월 만에 우승을 추가한 이미림은 LPGA 투어 통산 4승을 생애 첫 메이저 우승으로 장식했는데, '마법 같은 칩인 이글'로 더욱 짜릿한 우승이었습니다. 전화 인터뷰로 이미림 선수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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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홀 세 번째 샷이) 들어갈 거라고는 진짜 생각 못 했어요. 그냥 핀에 잘 붙기만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고, 볼이 굴러가는 속도도 좀 강했거든요. 그래서 '아, 조금 지나가겠구나' 싶었는데, 그게 핀 쪽으로 가더니 그냥 들어가더라고요."

-'칩인 이글'이 나온 순간 어떤 느낌?
"완전 "헐, 대박!"이었죠. 운이 좋은가 내가? 그 순간 그 생각이 딱 들었고."

-우승 소감은?
"사실 지금도 제가 우승했다는 게 잘 안 믿겨요. 그냥 내가… 미쳤구나. 그래. 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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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투어 5대 메이저대회 가운데 하나인 ANA 인스퍼레이션은 1972년 창설돼 1983년 메이저대회로 승격됐습니다. 2014년까지는 '나비스코 챔피언십'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다 2015년부터 일본 항공사 ANA가 메인 스폰서를 맡으면서 'ANA 인스퍼레이션'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미림은 박지은(2004년), 유선영(2012년), 박인비(2013년), 유소연(2017년), 고진영(2019년)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역대 여섯 번째로 이 대회 챔피언이 됐습니다. 이 대회는 우승자가 18번 홀 그린 옆에 있는 '챔피언 연못'에 뛰어드는 전통이 있는데, 힘차게 몸을 날린 캐디에 비해 정작 주인공인 이미림은 너무 조심스럽게 입수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좀 무서웠던 걸까요?

"멋있게 뛰어들고 싶었는데, 막상 물 앞에 딱 서니까 그런 생각은 안 들고 너무 무서운 거예요. 생각보다 물이 깊어 보여서. '아, 어떻게 하지? 너무 깊은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점프를 좀 멋없게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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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번 우승을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하지만, 이미림 선수는 여자골프계의 소문난 '노력파'입니다. 국내 2부 투어를 거쳐 2010년 KLPGA 정규 투어에 데뷔한 이미림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해마다 꾸준히 1승씩 올렸고, 특히 2012년에는 최고 권위 메이저대회 한국여자오픈을 제패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말 미국 무대 도전을 선언하고, 퀄리파잉 스쿨을 거쳐 2014년 LPGA투어에 데뷔한 이미림은 데뷔 첫해 2승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미국 무대에 안착했습니다. 2014년 당시 역시 2승을 올린 '천재 소녀' 리디아 고(뉴질랜드)와 신인왕 경쟁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미림 2014년 LPGA 투어 레인우드 클래식 우승
이미림은 국내에서 뛸 때부터 왼쪽 손목이 좋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훈련량 탓에 '피로골절'이 생겼고, 이 때문에 LPGA투어에서 활동하면서도 오랜 기간 고생했습니다. (이번 대회에도 부상 방지를 위해 왼 손목에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경기했습니다.) 고질적인 손목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이미림은 성공적인 데뷔 시즌 이후에도 LPGA투어에서 꾸준한 성적을 냈습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4년 연속 시즌 상금 랭킹 20위 안에 들었고, 2017년 3월에는 KIA 클래식 우승으로 통산 3승도 챙겼습니다. 하지만 이미림은 세 번째 우승 이후 긴 부진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2018년 상금 랭킹 68위, 지난해는 44위에 그쳤고, 올 시즌엔 ANA 인스퍼레이션 전까지는 두 대회에 출전해 모두 컷 탈락했습니다.

손목보호대를 착용한 이미림 선수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요. 많이 힘들었죠. 가족, 후원사(NH투자증권) 그리고 주위의 고마운 분들이 많이 기다려 주시고 힘을 주신 덕분에 메이저 우승이라는 엄청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지난 7월부터 함께 호흡을 맞춘 스윙 코치 김송희 프로의 도움도 컸습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LPGA투어에서 활동한 김송희 프로는 당시 우승은 없었지만, 준우승을 여섯 번이나 했고 LPGA투어 통산 상금 367만 달러를 획득했을 만큼 선수 시절 '실력파'로 인정받았던 지도자입니다. 이미림의 국가대표 2년 선배이기도 한 김 코치는 현역 시절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 이미림에게 기술적인 조언과 함께 자신감을 불어넣어줬고, 이미림의 '메이저 퀸' 등극에 든든한 조력자가 됐습니다. 이미림도 우승 후 SNS에 "언니 덕분이에요"라며 김 코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현역 시절 김송희 프로 이미림 선수 인스타그램
메이저 우승 덕분에 이미림의 세계 랭킹은 지난주 94위에서 이번 주 21위로 73계단이나 수직 상승했습니다. 오랜 침체기를 겪으면서 세계 랭킹 100위 가까이까지 떨어졌던 이미림은 자존심 회복과 함께 이제 새로운 꿈도 꿀 수 있게 됐습니다. 바로 '올림픽'입니다. 내년 7월로 1년 연기된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에 한국 선수는 4명 출전이 확실시되는데, 이미림은 이번 우승으로 단숨에 '한국 선수 톱10'에 진입했습니다. 이번 주 랭킹 기준으로 이미림은 한국 선수 가운데 세계 랭킹이 10번째로 높습니다. 내년 6월말까지 한국 선수 상위 4명 안에 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고 현재 순위로는 쉽지 않은 목표지만 새로운 꿈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건 이미림에게는 큰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은 올림픽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난 3년간 워낙 성적도 잘 안 나고 했기 때문에 올림픽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질 못했죠. 그런데 아마 아무래도 이번 우승을 계기로 목표가 좀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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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데, 이렇게 해외에서나마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많은 응원 보내주셔서 항상 너무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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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림을 '메이저 퀸'으로 만들어준 '마법 같은 칩인 이글'은 그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부상과 부진으로 힘겨웠던 시간을 끊임없는 노력으로 견뎌낸 이미림에게 찾아온 보상 같은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가 있는데, 1990년생, 올해 서른인 이미림의 잔치는 이제부터입니다.

(사진=연합뉴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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