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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누가 봐도 진짜배기…이기호 '누가 봐도 연애소설'

[북적북적] 누가 봐도 진짜배기…이기호 '누가 봐도 연애소설'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20.09.13 07:0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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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57 : 누가 봐도 진짜배기…이기호 '누가 봐도 연애소설'

"카드 회사에서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40만 원이 충전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성구가 처음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새 운동화도, 소고기도 아닌, 대학 동기인 유정이었다." ('재난지원금 사용법' 中)

오늘 [북적북적]은 좀 편파적일지도 모릅니다. '팬심'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우리말로 소설을 쓰는 사람 중 최고의 이야기꾼. '이야기 기술자', '이야기 장인'일 뿐 아니라, 늘 본질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뚝심을 버리지 못하는 예술가. 이기호가 쓴 [누가 봐도 연애소설]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2년 만의 작가 단독 단편집입니다. (딱 2년 전이었던 9월초, 제가 [북적북적] 멤버로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해 봄에 나왔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 실렸던 작품들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모두 사랑 이야기랍니다!

단편이라기보단 콩트에 가까운 길이의 작품들이 자그마치 30편 실려있습니다. 긴급재난지원금과 독감이 등장할 만큼, 바로 '오늘 여기' 우리사회의 단면단면들만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30편의 상황과 구성과 결이 하나같이 다릅니다. 반복되는 느낌이라고는 '역시 이기호!'라는 것뿐? 읽는 것만으로도 박자를 타게 되는 리듬감 있고 경제적인 문장, 잘 쓴 콩트 특유의 압축적인 재미 뿐입니다. 특유의 풍자 감각은 날카롭지만 너무 쓰디쓰게 과시하지는 않고, 언제나처럼 재치가 넘치지만 눈살 찌푸려질 만큼 능글거리지는 않습니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입니다. 이 정도로 약을 파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거짓이나 과장은 하나도 없거든요. 대단한 걸 대단하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ㅎㅎ

"쟤 진짜 갖고 갔네."

"뭘?"

민규는 계속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있으면서 남자아이를 집에 들이다니…..

"내가 쓰던 마스크 말이야. 그걸 자꾸 하나만 달라고 해서……"

"네가 쓰던 마스크?"

"응."

"그걸 왜?"

"몰라. 자기도 나처럼 아프고 싶다고."

이것들이 진짜…… 니들이 무슨 사귀는 사이냐? 니들이 무슨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야? 독감 환자 마스크를 왜?

"학원 가기 싫어서라는데…… 난 알지. 쟤가 날 좋아하는 거." 민규는 계속 혼자 쿡쿡거리며 웃는 예은이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독감' 中)

이기호 작가님은 '아직은 차마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해선 손을 못 대겠다'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엄마와 멀리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B형 독감 상황을 먼저 그리면서 손을 푼 게 아닌가. 언젠가… 이 모든 게 어느 정도 지나갔을 때. 그때까지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해서, 이 전염병과 우리들에 대해서 꽉 찬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놓아 줄 거라고 믿습니다.

이 콩트집에 실린 30편의 작품 중 [102호 그 여자, 302호 그 남자]는 "모두,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끝맺습니다. 책 말미 [작가의 말]도 "모두 아프지 않기를." 하고 끝맺어요. 코로나의 한복판에서 2년만의 신작을 내면서, 더 이상의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은 이 맺음말들도 참으로 이기호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겁나요?"

"뭐가요?'

그는 아내에겐 항상 존댓말을 썼다.

"내가 암에 걸렸을까 봐 겁나냐구요."

아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

"겁나죠. 그럼 우리 삶이 많이 변하게 될 테니까요……"

아내는 그의 말에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차 안에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그의 아내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겁내지 말고 화를 냈으면 좋겠어요."아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아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좀처럼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 말은 책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자의 사랑' 中)

이 책에 담긴 30편의 '사랑 이야기'는 테마가 모두 다릅니다. 그래도 여러 편에 걸쳐서 은근히 반복되는 경향이 2가지 정도는 보입니다.

첫번째는 이기호 작가 특유의 "나부터 잘하자" 정신이랄까요. 이 작가는 자신의 남자주인공들을 통해서 자기 연민하지 않습니다. 성찰하고 반성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연민에 문재(文才)를 쏟아붓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작가 자신의 조각조각을 투영하기 마련인 자신의 남자주인공들에 대해 함부로 면죄부를 주지 않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게 불륜이고, 내가 하고 있지 않은 저것이,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르는 저쪽이 로맨스인 건 아닐까' 끊임없이 되새김질합니다.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설교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을 청산유수로 풀어놓을 뿐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묵묵히 '소설적 되새김질'을 멈추지 않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나이로 지천명에 접어드는 이 시대 한국 남성 작가 이기호의 독보적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느낌을 오랜만에 다시 접하는 소설적 쾌감이 유달리 상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계속 모른 척하다가 이번에 병원에서 싫은 소리를 좀 했어요. 302호 영감님 찾아가는 건 좋은데, 그래도 좀 일찍일찍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두운 밤까지 있다가 계단을 내려오니 넘어진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저희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더라구요."302호까지 올라갈 땐 아무 생각 안 나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갈 생각을 하면 저절로 무릎이 아파지는 거야. 젊은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늙은이들 무릎이라는 게 계단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아프거든. 그래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더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뭐."
('102호 그 여자, 302호 그 남자' 中)

두 번째는 노인들의 애정에 대한 따뜻한 시선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낭만성을 부여하고 있는 건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예요.

더 이상 화려하지도 찬란하지도 않고, 육체적인 힘이나 아름다움은 이미 스러졌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애감'에 유달리 공들이고 욕심 내서 로맨스를 조물조물 무쳐주고 있는 게 역력해요. 껍데기가 모두 낡았을 때 비로소 오롯이 드러나는 진정성에 대한 희망을 정성껏 내놓고 있습니다.

이보다 훨씬 유행 타고, 시류 타고, 화려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요즘 스타일'의 재능을 누구보다 갖추고 있는 작가인데, 정작 그 길로 가는 작품을 아직 저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작가님의 전작을 읽은 건 아니지만요.) 아마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을 겁니다. 그의 작가적 마음이 그렇게 시키지 않으니까, 결국 택할 수가 없는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언제나 이기호 작가는 '폼'나지 않는 이면을 고민하고 펼쳐내는 데에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과 노력을 씁니다. 늘 '지금, 바로 여기'를 치열하게 고민하되, '진짜 알맹이'만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담긴 작품들. 이 연애소설들의 생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 안팎에 숨어있는 이 모든 '삶'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배어 있습니다. 소재와 형식은 뭘 취하든, 얼마나 유머감각이 넘치든, 이 점만은 변치 않네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표지에 "이기호만이 쓸 수 있는 누가 봐도 '진짜' 연애소설"이라는 소개문구를 넣은 편집자는 그의 작품세계를 진정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기호는 그렇게 독보적인 이야기꾼이고, 그런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사랑 안의 삶을 보는 '진짜'라는 말이 맞죠. 역시 오늘의 한국 작가는 여전히 이기호, 입니다.

"세상 모든 소설은 다 연애소설이라고 하던데, 나에게 그건 '연애'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 말이라기보단 '소설'을 쓰는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들린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끼는 마음이 절반이니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람을 본 적 없거니와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다 보면 다 망해버리고 마니까. 그건 그냥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이니까. 장소든 시간이든 단어든, 아끼는 사람이 글을 쓴다. 매일 글로 쓰다 보면 아끼는 마음이 들게 된다." ('작가의 말' 中)

역시 편파적인가요ㅎㅎ 하지만…… 정말 저 뿐입니까? 오늘북적북적에서 낭독한 4편을 듣고, 나머지 26편도 찾아보신다면…… 제 '팬심'을 좀더 양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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