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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직장생활 9년, 사표를 던졌다

파파제스 |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예쁜 딸을 키우는, 육아하는 아빠

나는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한 회사를 근 10년 가까이 다녔다는 게 참 어불성설이기도 한데,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나는 작년 말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입사한 지 꼭 9년 4개월 만이었고, 육아휴직 1년을 제외하면 8년 4개월 만이었다. 퇴사를 하지 않고 그대로 쭉 다녔다면 동기들처럼 입사 10주년을 맞아 공로패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여의도에 본사를 둔 전자업계 대기업이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퇴사할 때까지 다양한 업무를 했다. 고객 품질 이슈 대응부터 기술영업에 기획까지, 다양한 업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그중 좋은 사람도 있었고 상극인 사람도 있었다. 일이 편할 때도 있었고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서울 한복판 여의도에, 대기업에,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뭐가 아쉬워서 그만두냐고도 물을 수 있겠지만 남들의 평판은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좀 더 힘이 나서 회사에 다닐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기 최면을 걸어도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회사가 힘들었을까? 일이 힘들어서 그랬을까? 그렇다. 돈 받으면서 하는 일은 다 힘들다. 어느 날 옆 팀 박 과장님이 읊조리던 말이 기억난다.

"회사에 안 해 본 일은 있어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은 회사에서 시키지를 않거든"

맞는 말이었다. 해 본 적 없는 일은 처음엔 당연히 서투르기에 어렵고 오래 걸린다. 그러나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일이라는 건 모두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취미도 일로 하면 힘든데...)

그럼 사람이 힘들었던 걸까? 맞다, 사람 정말 힘들다. 회사 안에는 꼰대부터 순둥이까지 핑프족 *에서 워커홀릭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회사는 온갖 사람들을 가장 집약적으로 모아 놓은 곳이다. 모일 회(會), 모일 사(社). 일과 사람이 모이는 그곳이 바로 '회사'다. 나는 원래부터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과 워낙에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분위기를 잘 띄워 동료, 선배들과도 잘 지냈다. 맞지 않는 사람 때문에 퇴사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나를 위로해주고 토닥여주는 것 역시 사람이었다. 함께해준 그들이 있었기에 힘든 시간도 버틸 수 있었다.

* 핑프족 : '핑거 프린세스(finger princess)'나 '핑거 프린스(finger prince)'의 준말로, 간단한 자료조사 등을 통해 스스로 찾아보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직접 찾지 않고 온라인이나 SNS 등에서 손가락만 움직여 질문부터 하는 사람을 말하는 신조어.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나는 왜 그토록 회사가 힘들었을까?
그렇다면 야근이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야근도 정말 힘들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보고 타닥타닥 타자를 치고 마우스를 클릭한다. PC방 게임을 이렇게 한다고 해도 힘들 거다. 야근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퇴근 버스에 올라타면 핸드폰을 볼 기운도 없이 그대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해도 해도 적응되지 않는 게 야근이었다.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하고 주말까지 출근해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일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할 정도로 바빴어도 그게 퇴사와 직결되지는 않았다. 야근이 힘들어 퇴사를 할 것 같으면 야근하지 않는 날은 괜찮아야 했다. 그러나 6시 땡 치고 나오는 날에도 나는 괴로웠다. 야근도, 일도, 사람도 힘들었지만 이것들이 퇴사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일까?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조직 문화' 그 자체였다.

회사 복도에는 <주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창의적으로 일하라>라는 슬로건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문구를 볼 때마다 매우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표어와 현실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때 상무님은 회의실에서 담배를 뻑-뻑- 폈고, 실장님은 자기 자리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잤다. 팀장님은 그런 윗분들에게 벌벌 떨었고 아랫사람들에겐 서슴없이 욕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위에서 시키니까 해야지', '까라면 까야지'. 이런 상명하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곳이 바로 회사라는 곳이었다. 아랫사람 의견은 위로 전달되지 못했고, 윗사람의 한 마디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 속에서 "왜?"라는 질문은 상실된 지 오래였다.

나는 주도, 능동, 창의가 쓰여 있는 슬로건 앞에서 조용히 앉아 윗사람에게 보고할 문서를 작성했다. 그러는 동안 나를 점점 잃어 가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튀고 잘 웃는 내가, 조기 축구할 때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내가, 집에서는 힙합을 들으며 바운스를 타는 내가, 회사에서는 조용히, 가만히, 책상에 앉아, 모니터만, 키보드만, 마우스만 두들기고 있었다.

그나마 신입사원 때는 말이라도 많았다. 그때는 뭘 몰라서 그랬는지 부사장님이 건의사항을 물어봤을 때 눈치 보지 않고 "이것 좀 개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책임감이 커질수록, 식솔이 늘수록 하고 싶은 말은 줄어들고 해야 할 말만 하게 되었다. 아무리 부당한 지시가 내려와도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꾹꾹 삼켜가면서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을 쳐냈다.

먹고살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월급이라는 유일한 동아줄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리지 않기 위해, 진급에 누락되지 않기 위해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했다. 아니 '잘 보여야 했다'라고 하면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니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자. 그래, 윗사람에게 밉보이지 않고 찍히지 않으려 부단히 참고 또 참고 나 자신을 억눌렀다. 그러면서 점점 원래 나의 색깔이 바래져 가고 있었다. 색깔도 웃음도 감정도 잃어갔다.

반면 회사에서도 자기 색을 잃지 않고 오히려 짙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좀처럼 감정이 숨겨지지 않는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하면서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기도 했다. 여행도 떠나보고, 공부도 해보고, 운동, 독서 등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회사에 출근해 자리에만 앉으면 다시 리셋이 되었다. 끊임없이 나를 회사에 맞추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나는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깨달을 뿐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육아휴직 1년을 한 뒤,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후 9개월, 이제는 직장인보다 가정주부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한다. 와이셔츠가 아닌 헐렁한 티를 입고, 벨트가 아닌 앞치마를 두른다. 글도 쓰고 편집도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보기 싫은 사람은 보지 않는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웃는다. '살면서 이렇게 나답게 살아봤던 적이 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나는 이제야 본래 나의 색을 찾은 듯하다. 회사의 간판이 아닌 내 이름을 내걸고, 윗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고, 몸도 마음도 아픈 곳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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