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의 라이프 저널리즘] 선택의 즐거움과 괴로움

이주형 기자 joolee@sbs.co.kr

작성 2020.01.14 17:01 수정 2020.01.17 14:4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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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라크전 때 미 국방부는 전 세계 기자들을 대상으로 임베디드(embedded)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미군을 따라다니면서 종군 취재하는 건데 여기 참여했던 한 국내 일간지 기자의 르뽀 기사 시리즈가 당시 화제가 됐다. 그중 한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지극히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있던 중에 한 미군 대령이 찾아와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서 "당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을 하겠다면 도와주겠다"고 하자 몹시 갈등하며 쓴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막사 밖으로 나가서 다시 불어닥치기 시작하는 모래 돌풍 속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선택할 수 있어서 너무 괴롭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훨씬 더 많은 '선택'에 둘러싸인 곳이 되었다. 넘쳐나는 상품과 서비스와 뉴스와 볼거리 속에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예전에는 상품이 몇 개 없어서 선택할 게 없었다면 지금은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 힘든 지경인 것이다.

내가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가는 백반집이 있다. 다소 김*천국 스타일의 이 집 메뉴판에도 좋이 30개는 돼 보이는 메뉴들이 즐비한데 그중 내가 선택하는 메뉴는 늘 '오늘의 특선'이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두부찌개, 생선구이, 오뎅탕 등 그날그날 메뉴를 달리해 내놓는데 밥값도 5,500원으로 다른 메뉴보다 헐하고 맛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메뉴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백반집 전방 10m쯤이면 오늘은 주인장이 또 뭘 내놨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가 됐다. '직장인의 하이라이트'라는 점심시간, 때로는 메뉴 정하는 것마저도 스트레스인데 말이다. 그런데 지난주 화요일에 갔는데 '오늘의 특선'을 먹을 수 없었다. 가게 방침이 바뀌어 '오늘의 특선'은 월 수 금만 운영한다는 것이다. 쩝, 입맛만 다시면서 고민고민하다 생선구이를 주문했다. 기본 반찬도 똑같고, 오늘의 특선으로 나오던 생선구이와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데 왠지 평소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의지대로 짜장면을 선택해놓고는 막상 먹으면서는 '짬뽕 먹을걸...' 하는 기분이랄까. '선택할 수 없는 (역설적인) 자유'와 오늘은 뭐가 나올까 기대하는 동안 누리는 즐거움을 뻬앗긴 것만 같았다.

극도로 개인화된 맞춤형 서비스를 지향하는 최신 비즈니스 트렌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저의 '니즈'를 알아서 파악하고 알아서 충족시키는 제품과 서비스를 추구한다. 뉴스 비즈니스계에서도 중국의 금일두조(今日頭條, 진르터우타오)가 AI 큐레이션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고 네이버도 AI 뉴스 편집과 사람마다 저마다의 '구독' 선택으로 개인별 맞춤 페이지를 구성해 보여준다.** 넷플릭스까지 들먹일 필요는 이제 없을 것 같다.

지난해 초 뉴미디어국을 맡게 되면서 동료들에게 강조했던 것 중에 하나가 '큐레이션' 개념이었다. 비공식적이나마 팀 이름도 편집팀 대신 큐레이션팀이라고 명명해보자고 했다. 우리가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콘텐츠 라인업이 명백히 '어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큐레이션 돼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포털이나 유튜브 등 글로벌 플랫폼들만큼 콘텐츠가 풍부하지도, 검색기능이 뛰어나지도, 독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 수준이 높지도 않은 이상 그냥 적당히 늘어놓은 정보와 콘텐츠는 의미가 크지 않으니 진열대의 각을 잡아놓자는 의미였다. 음악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안목을 인정하는 재즈/현대음악 레이블인 ECM(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처럼-독특한 레이블 이름에 주목해주시길- 우리만의 '에디션'이란 말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에디션과 큐레이션에 도전해가고 싶었다.

다시 백반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다니던 백반집이 인공지능을 돌려서 '오늘의 특선'을 내놓았을 리 없고 그때그때 구하기 쉬운 재료에 따라, 요일이나 날씨에 따라 손님들이 많이 찾을 거 같은 나름의 감에 따라, 그도 아니면 그냥 그날그날 주방장이 당기는대로 '오늘의 특선'을 꾸려나갔을 것이다. 손님인 나는 그런 의외성에 따른 가성비 높은 큐레이션을 편안하게 즐겼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즐거움이 쏠쏠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매일 점심을 이 집에서 먹으라 하면 그도 아마 곧 지겨워질 것이다. '오늘의 특선'이 아니라 내 의지로 '선택한' 생선구이 백반을 먹으면서 나는 백반집 근처 추어탕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돌솥 밥을 지어주느라 시간도 좀 걸리고 밥값도 좀 있는 편이라 백반집으로 바꾸고는 안 가던 곳인데 그날은 또 그 집이 생각났다.

인간은 참 미묘한 존재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곧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듯 인생과 인간은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의 연속이다. 거기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비즈니스고 인생이 아닐까.아날로그 큐레이션과 디지털 큐레이션이 맞붙은 시대다. 데이터 야구가 더 맞는지 감과 안목을 중시하는 전통의 야구가 더 맞는지는, 스토브리그가 끝나고 정규시즌에 돌입해서 가을야구가 시작될쯤이면 알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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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3년 3월 25일 [강인선기자 종군기] 미군들 웃음도 말도 사라져 (☞바로보기)

** AI 큐레이션은 한편으로 확증 편향과 콘텐츠 편식의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봐 왔던 것만 보고 들어왔던 것만 듣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 편집의 획일성 때문에 재미가 떨어져 잘 활용하기보다는 참고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