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역설적인 새해 감(感)'! 2020을 여는 이 한 편-꽃은 알고 있다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20.01.05 07:5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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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역설적인 새해 감(感)'! 2020을 여는 이 한 편-<꽃은 알고 있다>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2020, 경자년. 새해의 첫 [북적북적]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의 첫 [북적북적]을 맡아, 책임감을 느끼고 '새해 느낌'이 가득 담긴 반짝반짝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보다가요. 제 나름으로는 '역설적인 새해감(感)'이 가득하다… 고 생각한 책을 들고 왔습니다. 모든 새해는 소중한 인생의 또 한 페이지 들잖아요. 그렇게 한 해 한 해, 평생에 걸쳐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해나가고 전문성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그 자체가 낳을 수 있는 기적 같은 당연을 증명하듯 증언하는 전문가의 회고록, [꽃은 알고 있다]입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할머니 명탐정 캐릭터 '미스 마플' 아시나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독신의 할머니는 그냥 자기 집 안락의자에 앉아서 뜨개질이나 하며 소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부인입니다. 이런 할머니가 무슨 사건을 해결하겠냐는 불신의 눈초리를 받으며 존재감 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범죄를 둘러싼 상황들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사건을 뚝딱 해결해 버리는 게 '미스 마플' 시리즈의 한결같은 플롯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 '미스 마플'의 나라 영국에! '미스 마플'보다 훨씬 더 '미스 마플' 같은 사람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주로 식물과 미생물, 꽃가루를 연구해 온 화분 학자 퍼트리샤 윌트셔는 지난 1994년, 50대 초반의 나이에 경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말이죠. 이후로 퍼트리야 윌트셔는 300여 건의 범죄 수사에 참여하며, 새로운 분야로 대두되고 있던 법의 생태학적 수사법을 개발해 나간 선구자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른바 '법의 생태학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요.

그런데 이 과정이 정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아요. 초히트 미드 'CSI'가 절로 떠오릅니다. 정작 퍼트리샤 윌트셔 본인은 인기 드라마 CSI의 "대부분 장면이 환상일 뿐이며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었다"고 '까는' 대목도 이 책에 나오지만요^^ [꽃은 알고 있다]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정작 본인은 건조하고 담담한 느낌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뭐야 이건. CSI보다 더 CSI 같잖아.' 연발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경찰로부터 용의자의 옷, 차량 같은 몇 가지 증거물을 넘겨받은 퍼트리샤 윌트셔가 현미경으로 증거물에 묻은 꽃가루들을 들여다보고, 분석하고, 생각을 좀 하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 후에, "어디 가면 시체가 있을 거예요."라고 경찰에 전화 한 통을 해줍니다. 그래서 경찰이 그리로 찾아가 보니, 정말이지 퍼트리샤 윌트셔가 묘사한 그대로의 장소에 그녀가 묘사한 그대로의 상태로 피해자의 사체가 있었다… 이런 식입니다.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 해결의 장면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집니다. 정작 본인도 현장에 직접 가보고 '어쩌면 이렇게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일까' 놀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ㅎㅎ

"내가 귀를 기울이자 형사는 내가 알아야 할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다. 하트퍼드셔주 시골의 한 배수로 도랑에서 시체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우발적인 살인이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 삼합회가 저지른 범죄를 뒤쫓고 있죠."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텔레비전에서나 듣던 말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 사건 피해자는 삼합회가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악랄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삼합회가 처음부터 피해자를 죽일 의도는 아니었으며 결혼식 날 그를 납치했지만 납치 장소는 아내의 침대가 아니라 성매매 여성의 침대였다. 그 특정한 약간의 정보를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이런 사건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비록 가끔 역에서 자전거를 도둑맞기는 해도 보통은 벽에 낙서도 없는 곳이었다.
…….
내가 계속해서 산울타리를 바라보고 있자, 현장 담당 수사관이
"시체가 어디에 놓였는지 보고 싶나요?"
라고 물었다.
"음, 사실은 제가 직접 찾아보고 싶어요."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줄지어 산울타리를 따라 계속 걸었지만 내 머릿속 이미지와 일치하는 장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범인들에게 흔적을 남겼을 목본과 초본을 둘 다 고려해야 했다. 아무리 걸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그곳이 나타났다.
"바로 여기일 거예요."
형사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경찰국장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어떻게 알았죠, 팻?"
"이미 전부 봤거든요. 머릿속에서 말이죠." "

"나는 통화를 이어갔다.
"레이, 탁 트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길과 가까운 곳에 성숙한 자작나무들이 있을 거예요. 아마도 거기서 사체를 발견할 수 있겠죠. 오, 그리고….."
나는 멈칫했다. 이어서 말하려는 내용을 아마 무척 믿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사체는 전혀 땅속에 묻히지 않았을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레이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레이는 계속 귀를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사체는 오솔길에서 조금 벗어난 텅 빈 구멍에 있을 거예요. 자작나무 가지로 뒤덮여 있겠죠."
나는 조앤이 잠든 곳에 대한 최근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렸다. 가장 생생하게 떠올렸던 이미지였다.
"얼마나 확실한가요?"
이것은 언제나 내가 나 자신에게 해야 하는 질문인 만큼 타인이 그런 질문을 던지더라도 양해해야 한다. 적어도 커리어 초반에 자주 접했던, 불신의 눈초리 없이 정중하게 묻는다면 말이다.
"꽤 확실해요, 레이." "

그야말로 천리안이라도 지닌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퍼트리샤 윌트셔 본인은 단언합니다.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이건 그냥 과학"이라고요.

맨 앞에 '역설적인 새해 느낌'을 지닌 책으로 [꽃은 알고 있다]를 선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범죄와 시체, 죽음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이야기를 새해 첫 '북적'으로 정한 이유를 이제 말씀드릴게요. 무엇보다도, 퍼트리샤 윌트셔의 일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에는 새해를 맞아 새삼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북적북적]을 들어주시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중요한 포인트들이 두드러지게 담겨 있었거든요.

먼저, 일하는 사람으로서. 퍼트리샤 윌트셔는 물론 대단히 명석하고 창의적인 인재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방대한 양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법의 생태학의 여왕이 되기 전에, 자연과 식물에 대해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오랜 시간 축적한 기초 학문의 학자였습니다.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건, 이렇게 하루하루 성실하게 벽돌 쌓듯 경험을 쌓아나가야 비로소 얻어진다는 것. 빛나는 일, 눈에 확 띄는 일, 짜릿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의 초인적인 능력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쌓아온 내 시간들이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 [꽃은 알고 있다]를 읽으면서 새삼 되새겼던 진실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순간들에 대한 성실한 책임감이 모여야지만 비로소 고도의 전문성이라는 게 우러나는 것이고, 그런 사람만이 50이 넘은 나이에 이처럼 새로운 분야에 처음으로 도전해도 일가를 이루고 선구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두 번째. 제가 여기 인용한 부분에서도 이미 은근히 드러났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할머니 명탐정' 미스 마플을 사람들은 늘 언제나 처음엔 조금씩 깔봅니다. 저 존재감 없어 보이는 할머니가 뭘 알겠어. 그럼으로써 '미스 마플'에 등장하는 범인이나 조연들은 스스로의 뒤통수를 때리게 되죠ㅎㅎ

'현실 미스 마플' 퍼트리샤 윌트셔도 비슷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꽃가루'나' 들여다본다는 장년 여성이 처음 사건 현장에서 받았던 냉대와 불신이 이 책에 수록된 에피소드들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오로지 결과로써, 얼마나 통쾌한 반격을 날려 왔는지도요. 이 회고록에는 법의 생태학의 선구자로서 '여왕이 된' 자의 자부심이 곳곳에서 묻어나지만요. 사실 퍼트리샤 윌트셔는 자랑 좀 해도 되는 회고록에서조차 대체로 자신의 객관성과 '감정에 영향받지 않는 성격'임을 유독 강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 태도에서, 열심히 일하는 전문가였던 그녀가 맞닥뜨려온 두터운 편견의 벽, 그 벽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오히려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눈초리들에 멋지게 –성과를 통해- 한 방씩 날릴 때마다 짜릿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편견에 근사하게 성공으로 대응하는 그녀의 묵묵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올해도, 내년에도, 따라 걷고 싶지 않으신가요^^

마지막으로, 퍼트리샤 윌트셔는 곳곳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시니컬한 유머감각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건조하고 객관적인 사람이며, 범죄수사에 처음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시체 자체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할 때는 절단된 다리를 두 팔에 잔뜩 들고 복도를 걸어가기도 했다. 약물 주입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가 삶과 인간에 대해 지니고 있는 뜨거운 경외심이 행간마다 비집고 나오기 시작합니다. 진실에 접근할 때는 오직 과학의 눈으로 다가갈 뿐이지만, 임무를 끝낸 뒤에는 사람의 마음으로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어진 마음'이 이 회고록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주의가 흐트러지며 영안실 사체에 감정적인 영향을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숲 속에서 발견된 스물두 살 성매매 여성의 사체를 만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 내가 몹시 슬펐던 이유는 단지 이 여성이 죽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겪었던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이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인생을 스스로 헤쳐나가야 했다. 그러다가 한 포주에게 붙들렸는데 그는 이 여성을 코카인에 중독되게끔 만든 다음, 마약을 하기 위해 계속 일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성매매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아이 셋을 낳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지저분하고 앙상한 조그만 몸뚱어리는 아이들을 지키고 나머지 제 생활을 꾸리느라 스스로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영안실 탁자의 스테인리스 상판 위에 놓인, 벌거벗은 채 차가워진 여성의 몸을 보고 울었던 이유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처로운 생활을 계속하면서 겪었던 온갖 고투와 불행 속에서도 자식들만은 굳건히 지켰다는 점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코카인에 중독된 스물두 살 '매춘부'의 시신에서 그녀의 모정과 존엄성을 발견하고 피해자의 인간성과 생의지에 공감해 눈물을 흘리는 편견 없는 시각.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아온 사람 특유의 아량과 포용이 넘치는 따뜻한 마음. 그 모든 것이 드러나는 이 대목이 제가 이 법의 생태학의 대가에게 결정적으로 반한 순간입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퍼트리샤 윌트셔는 두 살 난 딸을 잃었던 아픈 개인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 따위는 없다고 단언해요. 과학자죠. 하지만, 자신도 죽고 남편도 죽으면 모두 흙이 되고 입자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보다 더한 남편과의 합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마음으로 어린 아기를 떠나보낸 경험을 스스로의 안에서 소화하는 모습이 보여요. 자신의 일에 가장 충실함으로써 동양의 윤회사상에까지 도달한, 깨달은 자의 풍모까지 느껴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퍼트리샤 윌트셔를 보면서 새삼 생각했습니다. 저는 기자다 보니, 때때로 끔찍한 사건들, 때로는 세상의 오해가 이해만큼 가득 얽혀있는 대형사건들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일이 계속 있는데요. 그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점점 더 갖게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여기에 얽힌 사람들의 고통이나 억울함이 이대로 사라지거나 무시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정말, 절실하게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법의 생태학의 여왕님이 힘주어 말해주더라고요. 꽃은 모두 알고 있다. 꽃의 눈을 피할 순 없다…라고요.

새해에 내가 매일매일 해나갈 노력, 그리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언뜻 위장될 수 있는 그 어떤 문제도 결국 꽃들이 제대로 지켜보고 기억해 줄 것이라고 긍정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연초에 어울리는 공감과 위로였어요^^

이것이 바로, 새해 벽두부터 범죄와 시체와 죽음에 대한 언급이 난무하는 이 책을 '역설적인 새해감'을 가득 담은 책으로 선정하고, 2020년의 첫 북적북적을 여왕님과 함께 연 이유입니다. 저와 함께 이 '역설적인 새해 느낌'- 오늘 하루, 올 한 해를 성실하게, 또 새롭게 살아내는 일의 소중함을 새삼 느껴보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읽은 부분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혹, 마음이 끌려 완독 하신다면, 저와 이 뿌듯한 '새해 느낌'을 공유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언제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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