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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물가 상승률 사상 첫 마이너스…공포의 디플레이션 우려 교차

[취재파일] 물가 상승률 사상 첫 마이너스…공포의 디플레이션 우려 교차
이게 웬 말입니까. 물가가 사상 처음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지난해 같은달보다 올해가 전반적인 소비자물가 수준이 더 낮다는 건데요. 밥값이며 반찬값이며 기름값까지…. 나만 비싼 거였나요? 또,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된다는데 그건 뭘까요? 통계청이 발표한 8월 물가동향을 하나씩 톺아보겠습니다.

통계청이 집계한 8월 소비자물가 지수는 104.81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0.04포인트 감소했습니다. 물가지수가 감소한 건 지난 1965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전년 동월 대비 물가 상승률은 0.0%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1월 0.8%를 기록한 이후 8개월 연속 0%대 물가 상승률입니다. 공식적인 수치는 0%이지만, 이는 반올림 한 수치고 실제 소수점까지 따지면 -0.038%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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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물가가 내렸다는 걸까요? 가장 변화가 큰 부문은 신선식품지수입니다. 생선, 채소, 과일 등 기상 조건이나 계절에 따라 가격변동이 큰 품목을 따로 떼서 보는 건데 지난해보다 무려 13.9% 하락했습니다.

지난해는 폭염이 오래 이어진 탓에 특히 농축수산물이 비쌌는데 올해는 비교적 기상 여건이 양호해 값이 많이 내려갔습니다. 농·축·수산물 가격은 지난해보다 7.3% 감소하면서 전체 물가를 0.59%p 끌어내렸습니다. 올해 풍작을 맞은 배추(-42.1%), 무(-54.4%), 수박 (-34.3%) 등이 특히 많이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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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름값도 지난해와 비교하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국제유가 하락의 영향으로 석유류는 지난해보다 6.6% 감소하면서 전체 물가를 0.30%p 떨어뜨렸습니다. 휘발유는 지난해보다 7.7%, 경유는 4.6%, LPG는 12%나 하락했습니다. 다만, 기름값은 요새 다시 오르는 추세에 있는 데다가 이번 달부터는 유류세 인하 조치도 끝나면서 더욱 많이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무상급식 등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미친 영향도 큰 것으로 분석됩니다. 급식비는 전년 대비 40.9%나 감소했습니다. 기획재정부는 정부의 복지정책이 물가를 0.2%포인트 끌어내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물가 수준은 절대 낮지가 않습니다. 택시(15.6%)나 시외버스요금(13.4%)은 두 자릿수 상승률을 보이는 등 품목에 따라서는 상승률이 높은 경우도 있었고, 외식비도 지난해보다 1.7% 오르면서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마트에서 만난 시민들도 '저물가'라는 통계청의 발표에 깜짝 놀라며 의아해했습니다.

"채소는 싼데, 생선도 비싸고 고기도 비싸요. 지금은 다 비싸다고 봐야지. 경기도 어렵고 하니까. " (노숙희 / 세종시 한솔동)

"(물가가 낮다는 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는 않아요. '가격이 내려갔다' 이런 것보다는 '평균 수준이구나' 하는 정도." (여분자 / 충남 공주시)

지난 1년간 소비자들이 인식한 물가 상승률 수준을 한국은행이 조사했는데 2.1%로 통계청의 물가 상승률보다 2.1%p나 높았습니다. 소비자 물가인식 역시 통계작성이 시작된 2013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제 물가 상승 수준과 소비자들이 느끼는 괴리는 컸습니다. 아무래도 소비자가 체감하는 물가 수준과 460종의 상품과 서비스 가격 변화를 모두 집계해 평균 낸 물가지수와는 차이가 있겠지요.

물가는 계절의 변화를 고려해 한 해 전 같은 월과 주로 비교하기 때문에, 지난해 상승률이 높았다면 올해 상승률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기저효과라고 합니다. 지난해 9~11월은 2%가 넘는 높은 물가 상승률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번 달과 같은 낮은 물가 상승률은 앞으로 2~3개월 더 이어질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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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나타난 건 떨어진 건 채솟값과 유가 하락에 더해 지난해 높았던 물가 상승률과 비교했기 때문에 생긴 일시적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소비자들이 느끼는 물가 수준은 여전히 높은 상황입니다. 정부가 정색하면서 "디플레이션은 아닙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올해 초부터 0%대 저물가가 이어지면서 디플레이션(Deflation)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디플레이션,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디플레이션의 무서운 점은 한 번 진입하면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경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기업이 투자를 안 하면서 그만큼 물가가 떨어지는 게 악순환의 시작입니다. 물건은 안 팔리고 장사는 안 되고 그러다 보니 고용이 감소하고 임금이 하락해 생산은 더 위축됩니다. "경제는 심리다"라는 말이 있죠. 사람들이 모두 '물가가 계속 떨어진다'는 인식을 한다면 사람들은 소비와 투자를 더 나중에 하려고 자꾸 미루게 될 겁니다. 기다리면 싸지거든요. 그래서 물가는 더 하락하게 됩니다.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고 그래서 더 늦게 자게 되는 공포의 악순환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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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부는 이번 '마이너스 물가'가 지난해 폭염과 고유가 때문에 높았던 물가 상승률이 착시현상을 일으킨 일시적인 현상일 뿐 디플레이션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품 및 서비스 전반의 지속적인 물가 하락으로 정의되는 디플레이션과는 다른 거라고 판단되고, 일시적·공급적 요인에 의해 (물가 상승률이) 낮은 것이라 판단됩니다."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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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가격 변동이 큰 농산물과 석유류를 빼고 살펴본 물가 상승률('근원물가'라고도 합니다)은 0.9%로 아직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축산물과 수산물, 전기요금 등 좀 더 변동 가능성을 줄여서 경제협력개발기구 비교 기준으로 쓰는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지수' 역시 0.8% 늘었습니다.

근원물가가 1%대에 못 미친다는 건 두 가지 서로 다른 시사점이 있습니다. 첫째, 아직 디플레이션까지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 둘째, 그러나 디플레이션의 발화점인 '수요 부족'이 있긴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올해 초 목표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6%였고 한국은행의 목표치도 2%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부가 물가를 잡으려 하지 않고 오르는 걸 목표치로 잡는다고 하면 얼핏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디플레이션의 무서움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물가 상승 수준이 너무 낮은 것과 수년째 정부 목표치를 밑돌고 있는 현실이 우려되는 겁니다.

특히 지금처럼 대내외적인 어려움 탓에 저물가 기조가 굳어지면 우려가 커질 수 있습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앞으로 경기가 더 안 좋아질 경우에 물가 하방 압력이 있다는 점이 걱정된다. 해외 경기가 안 좋기 때문에 우리 경기가 안 좋아지고, 우리 경기가 안 좋아지면 결국 상품 수요가 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물가가 더 떨어질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디플레이션에 들어가 버리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시중에 돈을 풀어서 물가를 밀어 올려야 하는데 이미 기준금리는 1.5%로 바닥을 기고 있어 더 낮출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남은 건 재정 정책입니다. 가장 좋은 건 경기를 끌어올려 선순환 궤도에 올리는 것이겠지요.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저물가 우려에 대해 "경제의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재정지출 확대 등 확장적 거시정책을 지속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재정을 빨리, 많이, 여기저기 풀어서 경기를 띄우겠다는 겁니다. 내년도 예산안도 올해보다 9.3% 늘어난 513조 원대의 슈퍼 예산을 편성해 국회에 넘겼습니다. 구윤철 기획재정부 2차관은 "재정을 늘리되, 미래에 꿈이 있는 재정을 투입하겠다. 지금은 어려운 여건에서 국채를 발행해서 재정을 투입하지만, 이것을 R&D, 산업, 부품·소재 산업에서 자립화를 잘하면 한국이 새로운 단계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고 확장적 예산 편성의 이유를 밝혔습니다.

정부는 기저효과가 끝나고 올해 연말쯤이 되면 물가 상승 폭이 전년 대비 0%대 중후반으로 높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저성장과 저물가가 이어지는 추세에서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경제에 대한 우려는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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