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기사에는 없고, 판결문에는 나오는 이야기 : '내부 고발 묵살'이 유죄 판결 자초했다

안상우 기자 asw@sbs.co.kr

작성 2019.07.01 09:22 수정 2019.07.01 10:1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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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기사에는 없고, 판결문에는 나오는 이야기 : 내부 고발 묵살이 유죄 판결 자초했다
지난달 중순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는 대유위니아에서 근무하다가 경동나비엔으로 이직한 다음 대유위니아의 영업비밀 내지는 영업상 주요 자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 경동나비엔 소속 연구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의 쟁점 중 하나는 과연 이들이 빼돌린 정보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지였습니다. 대부분 언론에선 법원이 이들이 빼돌린 정보를 영업비밀 또는 영업상 주요 자산으로 인정했다는 내용과 함께 각각의 형량 등을 보도했습니다.

● 출시 앞둔 신제품에 경쟁회사의 영업비밀 사용

그런데 판결문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대유위니아와 경동나비엔을 재판부가 경쟁 관계에 있다고 판단한 부분입니다. 대유위니아는 에어컨이나 김치냉장고를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반면 경동나비엔은 보일러와 온수기를 판매하는 대표적 업체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이 두 회사가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일까?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경동나비엔의 신제품입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경동나비엔은 2012년부터 공기 청정과 제습, 냉방과 환기 등의 기능을 갖춘 TAC(Total Air Care) 제품군 개발을 해왔습니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경동나비엔은 신제품을 출시할 예정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이 두 회사가 단순히 경쟁 관계에 있다고만 보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경동나비엔의 소속 연구원들이 경쟁회사의 영업비밀 내지는 주요 자산을 빼돌렸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는 곧,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경동나비엔 측이 경쟁회사의 유출된 영업비밀을 신제품에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번에 유죄가 선고된 연구원 강 모 씨는 대유위니아에서 17년간 제품의 소음 및 진동 관련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경동나비엔이 신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소음 관련 문제('맥놀이 현상')가 발생하자 대유위니아가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축적한 자료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유죄가 선고된 또 다른 연구원 김 모 씨는 경동나비엔이 신제품의 크기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제품 내부에 들어가는 팬을 '크로스플로우팬'에서 '시로코팬'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 프로젝트를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김 씨는 이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대유위니아에서 축적한 '팬 관련 개발 자료'를 경동나비엔의 연구원 등에게 공유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결국 김 씨가 제공한 도면으로 설계를 마치고 샘플까지 제작하게 됐고, 경동나비엔은 2017년 말 '팬 최적화 개발용역 개발'을 기존 크로스플로우팬에서 시로코팬으로 변경하는 계약까지 체결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대유위니아 측은 현재 수원지방법원에 경동나비엔 신제품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한 상태입니다. 이에 대한 경동나비엔 측의 입장은 신제품 개발과 이번 사건은 서로 무관하다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내부 고발은 '묵살'…영업비밀 유출은 '묵인'

두 번째로 흥미로운 부분은 두 연구원이 영업비밀을 빼돌려 사용하는 것에 대한 내부 고발이 사전에 있었다는 겁니다. 즉,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에 가기 전에 경동나비엔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 기회가 있었던 셈이죠. 하지만, 경동나비엔 측은 스스로 기회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내부 고발은 묵살하고, 영업비밀 유출은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연구원 강 씨의 부하직원인 A 씨는 2018년 7월 말쯤 경동나비엔 연구소장 손 모 상무와 연구소 본부장 황 모 전무에게 강 씨가 대유위니아의 기술 자료를 외장하드디스크에 담아와 회사 업무용 PC에 연결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심지어 A 씨는 강 씨가 회사 공유 폴더에 대유위니아의 자료가 올라온 것을 보았다고 설명했고, 황 전무가 이를 당사자들에게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지만 별다른 징계처분 없이 강 씨와 김 씨의 업무용 PC 교체만을 지시했습니다.
사표, 사직서, 퇴사 (사진=유토이미지)그 이후, 자신의 바로 위 상급자의 비위행위를 내부 고발한 A 씨는 스스로 퇴사신청서를 내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경동나비엔 측은 자신의 상급자에 대한 내부 고발을 했으니 부서를 옮길 수 있게 해달라는 A 씨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오히려 경동나비엔의 연구소장 손 모 상무는 A 씨의 상급자이자 내부 고발 대상자였던 강 씨에게 전화해 A 씨가 제출한 퇴사신청서를 조속히 결재하라며 독촉하기까지 했습니다. 내부 고발 이후 경쟁회사의 영업비밀을 빼돌려 제품 개발에 이용한 연구원들은 회사에 남아 계속해서 개발 업무를 담당했고, 내부 고발자는 회사를 나간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결과 강 씨가 다시 대유위니아의 기술 자료가 담긴 문제의 외장 하드디스크를 업무용 PC에 연결해 영업비밀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재판부가 연구원 강 씨와 김 씨는 물론 함께 기소된 경동나비엔에게도 유죄를 인정하며 벌금 5천만 원을 선고한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