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몰디브…아니 모히토 한 잔 같은 이 한 권! - 〈아무튼, 술〉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19.06.09 07:54 수정 2019.06.09 17:0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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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93 : 몰디브…아니 모히토 한 잔 같은 이 한 권! - <아무튼, 술>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름입니다. 여름밤에 어울리는 건 역시 술, 이죠. 늦게 떨어진 태양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 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이따금 펄럭이는 커튼을 벗삼아 혼자 한 잔 해도 좋고,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아까워서 바깥에 펴다놓은 테이블에든 평상에든 좋아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조금 더 마시기 딱 좋은 계절이에요.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이런 여름밤에 어울릴 술, 몰디브... 또는 모히토 한 잔 같습니다. 청량하고 심지어 싱그럽고 때로 알싸합니다. 그리고 럼을 꽉꽉 채워 제대로 만든 모히토라면 응당 그래야 하듯, 청량하고 알싸한 그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내려놓는 순간! 뜨거운 알콜기가 묵직하게 가슴을 치고 올라옵니다.

김혼비 작가의 두번째 에세이집, <아무튼, 술>입니다.

"술과의 첫 만남은 요란했다. ... 전혀 안 그럴 것 같던 모범생 친구들의 은근한 기대에 찬 눈빛을 보니 그들의 일탈을 주도해서 주도로 이끌고 싶은 이상한 리더십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그들의 술과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술 역사의 시조로서 기억 속 어딘가에 초상처럼 그려져 있고 싶기도 했다."

간결하고도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의 첫번째 단락 [첫 술]은, 단언컨대, 올해 출간된 모든 에세이 가운데 가장 확실한 웃음, 요샛말로 '현웃'을 보장합니다. '술 시조'가 되고 싶었던 '술못알' 고3 수험생의 수능 백일주 탐험으로 시작된 그 첫 경험 서술기는 나름대로 술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꽤 수집하고 또는 직접 만들어 온 웬만한 술꾼들의 랭킹 수위에 가볍게 안착할 수 있을 거예요. 작가가 술회하고 있는 경험 자체가 워낙 유쾌하고 재밌기도 하지만, 그 어떤 독소나 떨떠름한 요소 하나 없이도 웃음의 잽과 스트레이트를 섞어서 끊임없이 날려오는 현란한 문장들이 워낙 인상적입니다.

"눈치 빠른 진이가 짐짓 투정과 약간의 애교를 섞어 "야아~ 우리 서로에 대해 다 잘 아는 거 아니었어? 우리가 너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면 진짜 서운하다아~" 라며 분위기를 살짝 풀었다. 하지만 이미 술에게 눈치코치염치재치 다 빼앗겨버린 나는 "응, 너희는 나에 대해 전혀 몰라"라고 재차 못을 꽝꽝 박았다. 그러더니 애들 쪽으로 거꾸러지듯 몸을 깊숙이 기울이며 나에 대해 나도 몰랐던 놀라운 비밀을 말해주었다.

"사실 나는...." (이 뒤의 이야기는 '북적북적'에서, 또는 <아무튼, 술>을 펼쳐 확인해 주시면 좋겠어요^^)

닉 혼비의 성을 빌려온 필명, '김혼비'로 활동하는 작가는 지난해에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매우 호쾌하고 재밌는 에세이집으로 데뷔한 직장인 작가입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역시, '북적북적'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제철소와 위고,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함께 펴내고 있는 <아무튼> 시리즈의 '술' 편을 맡아 올해 두번째 책을 냈습니다. <아무튼> 시리즈는, 출판사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피트니스부터 망원동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주제와 소재 20가지가 지금까지 <아무튼>이란 말머리를 달고 책으로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술꾼들의 대표가 되어 '술 얘기'를 맡는다는 건 크나큰 책임감을 동반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술과 글을 함께 좋아하는 이 세상 적잖은 사람들의 (취기로 번득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김혼비 작가는 그 책임을 굉장한 글솜씨로 완수합니다.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에 실린 똑 떨어지는 재치.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항상 알맞은 진하기의 지문을 가장 익살스러운 각도로 찍어"내면서 술꾼들의 대표 화자 노릇을 멋지게 해냅니다.

"사실 밤이든 낮이든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에는 회사 앞에서 우연히, 안하무인에 철저한 속물이라 질색인 상사와 그의 늙은 노모를 마주쳤다가 노모에게 '우리 000 잘 부탁해요. 난 아직도 얘가 애기 같아서 항상 불안해' 식의 말을 들어버리는 것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그런 번거로움을 술이 이겼다. 이미 몸속에 들어 있는 술이 그의 찬장 속에 들어 있을 술을 맹렬히 불렀다. 술들끼리 어서 만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앱솔루틀리!"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첫 술]로 첫걸음을 시작해, '야~ 이 사람 진짜 (술꾼이)네'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술꾼 특유의 그 생활감으로 가득한 15개의 단락을 낄낄 웃으면서 따라가다 보면, 문득 작가 본인이 품었던 묵직한 감정과 생각들에 읽는 사람도 함께 도착해 있습니다. 작가가 공감하거나 분노하거나 애정을 느끼는 그 지점들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요, 라고 얘기하고 싶어집니다. 술을 먹고 욕하는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 택시기사님으로부터 문자 한 줄을 받게 된 사연, 그리고 술이 인생을 바꾼 순간.

이렇게 성의없이 축약해 버린 것만 들으면, 언뜻, 안 들어도 알 것 같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이 들려올 것 같지만, 이 책을 직접 열어보시는 그 순간, 그 어떤 짐작 이상의 재미와 공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약속드리겠습니다.

"지난주는 요가의 완패이자 나의 완패였다. 전어회가 제철이라, 막장과 마늘을 살짝 올린 기름진 전어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아버지가 담가준 김치가 막판이라, T가 신김치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스팸과 집에 있는 모든 야채를 다 넣고 볶은 뒤 흰자는 튀기듯이 바삭하게 노른자는 톡 치면 흘러내리게 익힌 달걀프라이를 얹어 내온 김치볶음밥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으슬으슬한 게 오뎅 바가 제격이라, 무가 적당히 우려진 국물에 담겨 푹 익기 직전의 오뎅 꼬치를 쏙쏙 빼어 먹으며 온사케를 마시느라고, 외근이 끝나니 광장시장 근처라, 빈대떡과 고기완자에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두 번째 시킬 때 넉넉히 담아 주셔서 아직도 많이 남은 큼직큼직 썬 양파를 툭툭 넣은 간장만으로 막걸리 한 벼을 더 비우느라고, 금요일이라....."

<골목대장>이란 백여년 전의 미국소설에는 "세상엔 어린애와 거지와 술주정뱅이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어."라는 대사가 등장합니다. 술이 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그 말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 말에서,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온기를 느꼈던 것 같아요.

어린애, 거지, 그리고 술주정뱅이.

어딘가 좀 부족한, 삶에 대한 무장이 허술한 사람들을 에둘러서 다독이는 주문 같지 않나요?

세상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든 어린아이, 세상의 끝에 몰린 거지, 또는... 아마도 세상에 내놓지 않고 가슴에 묻은 얘기가 있을 것 같은 술주정뱅이들에게... 괜찮아, 좀 부족해도 돼. 또는, 한참 부족해도 돼. 지켜주는 신이 있거든. 말해주고 있죠.

대한민국처럼 술을 너무 권하는 사회에서는 술 얘기를 지나치게 너그럽게 하는 걸 지양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술먹고 저지른 실수라며 범죄를 용인한다든가, 사람들을 괴롭혀 놓고 술 탓을 하는 분위기까지 옹호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술을 즐겁게, 무해하게 즐겨 먹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고백하고 있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직선 코스가 있더라도 굳이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때가 있다. 인생에서 효율과 생산성 외 다른 것들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알고, 삶이 던지는 질문 중에 정답이라는 게 있을 때가 거의 없음을 안다'는 고백을 술잔마다 띄우고 있다고 할까요.

"오늘은 요가가 술을 이겼다. 무려 홍어회를 이겨내고 요가를 다녀온 것이다! 갑작 강철 의지력이 생겨났을 리는 없고 어제 질릴 정도로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 밖에 없다."

<아무튼, 술>을 낭독하고 생각하느라 이번 주 제 몫의 잔도 몇 잔 더 늘었습니다. 한 잔 하면서 들어주신다면 더없이 영광이겠습니다. 초여름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이따금 펄럭이는 커튼을 벗삼아 혼자 한 잔 하면서 펼쳐보시거나,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아까워서 바깥에 펴다놓은 테이블에든 평상에든 좋아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조금 더 마시면서 '야 너 그 책 읽어봤어?' 한 마디 꺼내기에 안성맞춤의 에세이집입니다.

*출판사 제철소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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