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기습 발표한 '한국 수산물 검사 강화'…아베의 교묘한 '정치'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작성 2019.06.04 09:43 수정 2019.06.04 09: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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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지난 4월 14일 일요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제5차 중일 경제고위급 회담이 열렸습니다. 중국 측에서는 왕이 외교부장과 중산(鐘山) 상무부장 등이, 일본 측에서는 고노 외무상과 세코 경제산업상 등 장관급이 참여한 자리였습니다. 여기서 양국은 일본산 쇠고기 등의 중국 수출에 필요한 이른바 '동물위생검역협정'의 체결에 사실상 합의했습니다.

● 장면 2.
같은 날, 아베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福島)현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도쿄전력 현지 사무소를 방문해 후쿠시마 원전 폐로 작업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지진 피해 이후 새롭게 건설돼 문을 연 오쿠마(大熊) 마을의 주민센터도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 방문 때 입었던 '방사능 방호복'을 벗고,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 두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기획하면서 염두에 둔 일이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한국의 후쿠시마 등 8개 현 수산물 수입 금지에 대해 사실상의 최종심인 2심 판결을 4월 12일 새벽(한국시간)에 발표하기로 돼 있었던 겁니다. 이미 2018년 2월 1심 판결에서 한국의 수입 규제조치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났고, 한국 정부가 이에 불복해 2심을 신청했지만 결과가 극적으로 뒤집힐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만약 일본의 시나리오대로 12일 새벽에 2심도 일본 '승소'로 결정됐다면, 바로 이어지는 주말에 열린 중일 경제고위급회담에서 중국 측에도 후쿠시마현 등 10개 지자체 식품 수입제한이 부당하다고 '압박'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일본은 회담에서 중국의 일본산 식품 수입제한 철폐를 요청했지만, WTO 2심 판결로 말 그대로 '힘이 빠진' 상태여서 중국 측은 아마 귓등으로 흘려들었을 겁니다.
WTO,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타탕 결론아베 총리의 후쿠시마 방문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일본 정부의 계획대로였다면 베이징에서 일본이 중국을 압박하는 동시에 아베 총리는 후쿠시마에서 수산물 수출의 커다란 장애가 제거됐다면서 한층 '멋을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현청(우리의 도청)도 아니고 시(市)도 아닌 마을(町)의 주민센터를 다시 개소하는 자리에 총리가 직접 찾아가겠다는 일정을 미리 잡아 놓은 것은 이 자리에서 본인의 '외교적 성과'를 한껏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WTO는 한국의 수산물 수입규제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일본 정부에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중국을 압박하러 갔던 고노 외상도, 말쑥한 수트 차림으로 후쿠시마를 찾은 아베 총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정치 일정은 일정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설마 이럴 줄 몰랐다'는 탄식과 '대체 왜 이렇게 된거냐'는 의문이 정권 내외부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 장면 3.
WTO 패소에서 한 달 정도 지난 지난 5월 16일. 일본 정부는 자민당의 외교부회(會) 등의 당정 합동회의에서 WTO 패소에 대한 검증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부 측은 "식품 안전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테마였고, WTO의 (심결) 체제의 허점이 (패소의) 리스크였다는 인식이 부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심결 체제의 허점'이란 WTO 패소 이후 일본 정부가 패배의 원인으로 내놓았던 건데, 미국이 판결 위원의 추가 임명을 거부해 6명 정원인 상급 심의위원이 3명밖에 충원돼 있지 않아 심결에 형평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이런 정부의 '변명'을 듣고만 있을 의원들이 아니죠. '기존의 대(對)한국 전략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가 일단 한국에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한다'는 날 선 반응들이 나왔다는 게 이날 회의를 취재한 일본 언론들의 대체적인 분석입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30일,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이 일본 정부가 광어, 조개류 등 일부 한국 수산물의 수입 검사를 6월 1일부터 강화할 거라는 내용의 기사를 썼습니다. 1면 톱 '단독' 보도였습니다. 산케이신문은 특정 국가의 수산물 수입에 대해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며 이 조치가 한국의 '수입 규제'에 대한 사실상의 대항 조치라고 해석했습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발표 내용을 하루 앞질러 취재한 '발 빠른' 보도였지만, 일각에서는 6월 1일부터 시작되는 조치를 시행 이틀 전에 발표하면서 유력 신문을 통해 미리 '약을 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습니다. 스가 관방장관은 30일 언론 브리핑에서 한국산 수산물 검사 강화 조치는 여러 차례의 '식중독' 사건으로 인한 "국민 건강 보호 차원이며, 대항조치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총리 관저의 관계자는 한 신문의 취재에서 사실상의 대항 조치임을 인정했습니다. 이 신문이 인용한 총리 관저 관계자의 발언은 이렇게 끝납니다. "언론들이 '보복 조치가 아닌가'라고 써 주는 정도가 딱 적당하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보복 조치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일본 내부적으로는 사실상의 '보복조치'를 했다고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후쿠시마 지역 수산물 수입금지 WTO 결정일본 아베 정부의 모든 행동을 '국내 정치용 목적'으로 획일적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지난 한 달 반 동안의 흐름을 볼 때 이번 검사 강화 조치는 상당 부분 국내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측면이 큰 것 같습니다. 주일 한국대사관 관계자도 "평소에 '국제 규범'을 그렇게도 강조하던 일본이 WTO 패소에 반발하고 나선 뒤, 실행에 임박해 일부 한국산 수산물 검사 강화 조치를 발표한 것은 국내 정치적 요소를 고려한 측면이 다분하다"며 상당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식중독' 문제라면, 수출국이 신경을 쓰고 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게 상식적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국내적으로 한국산 수산물에 대해 '강한 대응'을 했다는 '생색'을 낸 일본 정부. 사실 문제는 이번 조치가 일본 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에 따라 마치 곶감을 빼듯 추가 조치가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베 정권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G20 정상회의에서 쏠쏠한 외교적 성과를 얻은 뒤 그 평가를 다음 달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바람'으로 활용하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