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軍 반대도, 절차도 무시한 'DMZ 둘레길'…뭐가 급했나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작성 2019.04.08 09:09 수정 2019.04.09 17:4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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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철책 둘레길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고성의 전방 지역지난 3일 문체부, 행안부, 환경부, 국방부, 통일부 등 5개 정부부처는 합동으로 "이달 말부터 비무장지대 DMZ에 평화둘레길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파주와 철원, 고성에 DMZ 안팎을 오고가는 둘레길을 내는데 우선 고성 DMZ 둘레길은 시범적으로 이달 말 민간인에게 개방하겠다는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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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비무장지대는 곧 국민의 것이 될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100주년 기념사 중 발언으로 보입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한 달 만에 DMZ를 개방하려고 했던 걸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정부가 거듭 강조하고 있는 절차적 정당성 문제에서도 큰 허점이 보입니다.

DMZ는 유엔사가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DMZ에 둘레길을 내려면 유엔사의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부와 유엔사는 둘레길 조성을 위한 협의를 현재도 진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유엔사가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는 하지만 승인이 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절차적으로 정당합니다.

완전무장한 북한군 코앞으로 민간인을 들여보내는 일인데 북한 측에 통보도 안했습니다. 안전 대책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군도 내키지 않는 눈치가 역력합니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서야 대한민국 최고 권위기관들이 모여서 이런 식의 날림 정책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 국방부 사전 브리핑에서 생긴 일

정부 합동 DMZ 둘레길 계획을 발표하기 하루 전인 지난 2일 국방부 기자실에서 사전 언론 설명회가 있었습니다. 이달 말부터 고성과 철원, 파주 DMZ 둘레길을 시범 개방하고 특히 철원과 파주는 이른바 통문을 지나 철책선 이북 GP까지 들어간다는 설명이 나왔습니다.

귀를 의심케 하는 '획기적인' 계획이었습니다. 남북미의 완전한 협의, 철저한 안전 조치라는 전제 하에서는 획기적인 계획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남북미 협의, 안전 조치라는 게 듣기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인데 DMZ를 관할하는 유엔사와 협의도 끝나지 않았고 북한측에는 통보조차 안했습니다.

둘레길 관광객들이 철책선의 통문을 지나 좌우가 지뢰밭인 DMZ의 심장으로 들어설 때는 경호 병력이 따라 붙도록 했습니다. 기존 전방 장병들은 과학화 감시 장비를 증강 가동해서 대북 경계를 강화한다는 복안입니다. 하지만 1km 앞 북한군 중화기의 사정권 안에 민간인들을 대거 세워두는 상황이라서 전방 부대의 경계 및 경호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됩니다.
지난 3일, DMZ 둘레길 조성 계획을 발표하는 5개 부처 고위당국자들그럼에도 관광객의 100%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둘레길 관광객들에게는 방탄조끼와 방탄헬멧이 지급됩니다. 전투 체험도 아니고 둘레길 산보인데 방탄조끼와 방탄헬멧이 웬말입니까. DMZ에 평화가 찾아온 뒤, 방탄조끼와 방탄헬멧 벗고 DMZ 둘레길 걸어도 늦지 않습니다.

절차와 안전에 대한 기자들의 지적이 쏟아지자 국방부 당국자는 식은땀만 흘렸습니다. 이날 사전 설명회에 대한 반응은 청와대에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정부는 다음 날인 3일 발표에서 이달 말 시범 개방할 둘레길을 급히 3곳에서 1곳으로 줄였습니다. 철책선 남쪽에 조성되는 고성 DMZ 둘레길만 이달 말 열고 철책선 이북으로 진입하는 철원과 파주 DMZ 둘레길 개방은 연기한 겁니다. 정부가 허겁지겁 부실 정책 만들었다가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바꾼 셈입니다.

● 軍은 반대한 듯

DMZ 둘레길은 4·27 판문점 선언에서 약속한 DMZ의 평화적 이용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DMZ의 평화적 이용은 남북의 군인들이 제자리로 철수한 뒤 평화가 찾아온 DMZ에서 남북이 함께 이행할 일입니다. 여전히 중화기로 서로를 겨누고 있는 DMZ 안에서 남측만 산보 즐긴다고 DMZ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DMZ 둘레길은 남북관계, 관광객 안전, 우발적 긴장 촉발 등을 볼모로 내건 DMZ의 무모한 이용일 뿐입니다.

북쪽만 바라보기에도 힘에 겨운 전방 장병들에게 큰 부담을 떠안길 DMZ 둘레길 조성에 국방부가 참여해서 일을 꾸몄다는 게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이 사업에 반대한 것 같습니다. 국방부 핵심 관계자는 "그나마 3곳에서 1곳으로 줄어서 다행"이라며 "분명히 반대했는데 먹히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2일 사전 언론 설명회 때 혼쭐났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며 "사전 설명회 분위기를 듣고서야 윗선은 사태를 파악했다"고 귀띔했습니다. 군의 전문적인 조언을 묵살하고 DMZ 둘레길을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데가 어딘지 궁금합니다.

이달 27일이면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입니다. 판문점에서 뭔가 뜻깊은 행사를 할 만한 날입니다. 하지만 판문점은 현재 출입금지입니다. 공동경비구역, 즉 JSA 자유왕래를 위한 남북과 유엔사의 협의가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입니다.

4·27 선언 1주년 행사를 판문점에서 치르지 못하면 판문점만한 분단의 상징성이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DMZ 둘레길이면 4·27 행사장으로 안성맞춤입니다. 안전도 절차도 무시한 채 DMZ 둘레길을 강요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게 군 안팎의 공통된 추론입니다. 전시행정(展示行政)을 DMZ에서 하는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