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세월호' 기억하는 '생일'…모두를 위로하는 '러브레터'

김영아 기자 youngah@sbs.co.kr

작성 2019.04.04 14:42 수정 2019.04.04 15: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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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세월호 기억하는 생일…모두를 위로하는 러브레터
1990년, 대지진이 이란 북부지역을 뒤흔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고 집을 잃었고, 학교도 직장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지나간 후, 모든 것이 갈라지고 부서진 폐허 속에서도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망가진 안테나를 고칩니다. 그리고 어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그 모습을 그대로 담습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입니다.

2011년엔 또 하나의 대지진이 이웃나라 일본을 강타했습니다. 쓰나미에 동네 전체가 휩쓸려 내려가는 장면을 우리 국민들도 실시간으로 지켜봤습니다. 그 충격이 여전히 생생한 동일본 대지진입니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땅은 여전히 황폐합니다. 하지만 이맘때면 그곳에도 꽃이 핍니다. 하나, 둘, 돌아온 사람들은 새 집을 짓고, 결혼 5일 만에 남편을 잃었던 아내는 남편이 떠난 뒤 태어난 아이를 키웁니다. 지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요리를 하고 모임도 하고, 가끔 떠들썩하게 웃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도 지난달 개봉한 재일교포 윤미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봄은 온다(2018년)'입니다.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은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는 것. 계속 살다 보면,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희망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눈물을 닦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꼭 누군가를 지우고 배신하는 건 아니라는 것. 마음속 깊이 그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기만 하다면.

● 영화 '생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용기'

여기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아들의 옷을 사고 밤늦게 현관 등이 켜지면 아들이 돌아왔나 내다봅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실은 세상에 없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철마다 아들 방의 이불을 바꾸고 수시로 책상을 닦는 건 아들의 빈자리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상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으로 슬픔에 맞서 싸우는 어머니 순남의 방식입니다.
영화 <생일> 스틸컷기억이라는 것은 참 묘합니다. 때로는 잊고 싶은데도 불쑥불쑥 찾아와서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눈을 부릅뜨고 꽉 붙잡고 있지 않으면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기억'이라는 명사는 이렇게 변덕스럽고 인간의 의지로 잘 통제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잊으려고, 혹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명사와 달리 '기억하다'라는 동사는 훨씬 더 인간의 의지로 통제 가능한 영역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억나지 않는 건 무뎌진 뇌 탓이지만,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는 건 뇌가 아니라 의지의 선택입니다.

아들이 떠났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는 '순남의 방식'을 보면서 거울을 보는 듯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자주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탓입니다. 이를테면, 영화 '생일' 속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버텨내며 힘겹게 봄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고통 같은 것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워낙 용기가 필요한 기억들이 있으니까요. 아파서, 슬퍼서, 부끄러워서, 미안해서, 불쾌해서, 미워서, 싫어서, 참담해서, 피곤해서, 두려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제 그만 지우고 싶어서, 혹은 "지겨워서"…. 그런 의미에서 '생일'은 '세월호'가 아니라 용기에 대한 영화입니다. '유족'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그들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슬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순남은 긴 망설임 끝에 찾은 아들의 생일잔치에서 처음으로 웃음을 보입니다. '네가 없는 너의 생일'은 너의 부재를 공식화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이웃들이 풀어내는 소소한 추억들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통해 순남은 아들의 부재를 기억하는 이들이, 그의 부재를 아파하는 이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떠났지만, 그 아들이 순남과 이웃들의 삶에 더해준 기쁨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생일> 스틸컷카메라는 거기서 멈추지만, 영화관을 나오는 관객들은 믿음을 품게 됩니다. 순남의 내일은 어제보다는 덜 힘들고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덩달아 마음이 가볍고 개운해집니다.

●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 나를 위로한다는 것

이제 겨우 5년이 지났을 뿐인데, 어떤 이들은 벌써 "지겹다"고 말합니다. 이제 좀 그만 하자고,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주자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동일본 대지진 후를 그린 영화 '봄은 온다' 속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기억의 퇴색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생일' 상영관 앞에서 만난 한 관객의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세월호'는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사회적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아프고 힘들지만 끊임없이 그날과 그 일을 기억해야 하는 건 무능했던 우리를 자책하고 유족들에게 서툰 위로를 건네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날의 참사가 우리 사회에 남긴 상처와 그로 인해 함께 고통받아 온 우리 모두를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추모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눈 덮인 산 속에서 반대편 봉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세상을 떠난 연인에게 건네는 짧은 안부 인사는 곧 온 산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메아리로 주인공에게 돌아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덕분에 주인공은 이 한 마디를 할 기회를 얻습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러브레터' 속 주인공과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순남을 연기했던 배우 전도연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생일이라는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에, 그리고 이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라도 연기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