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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친일·친나치 의혹까지…안익태 애국가 논란 재점화

[취재파일] 친일·친나치 의혹까지…안익태 애국가 논란 재점화
2013년에 나는 안익태와 관련한 기사를 썼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비엔나 심포니 등 유럽의 유수 연주단체들이 '유럽에서 활동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이 한국인 안익태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료를 수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과 함께, 안익태가 1941년 일장기와 헝가리 국기가 나란히 걸린 부다페스트의 공연장에서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를 지휘하는 음악회 영상을 보도했다. (헝가리 음악회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9_RPzzhuM8Y) '에텐라쿠(월천악)'는 일본색 물씬한 곡으로 안익태가 유럽에서 종종 연주했지만, 광복 이후 개작해서 한국에서 '강천성악'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표한 것으로 추정되는 곡이다. 기사 작성 과정에서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연구해온 음악학자 이경분 씨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2013년에 내가 이 기사에 매달렸던 이유는 2006년과 2007년, 안익태의 친일행적이 처음 불거졌을 때 적극적으로 기사를 쓰지 못했던 것에 아쉬움이 남아서였다. 독일에서 음악학을 공부하던 유학생 송병욱 씨가 2006년 안익태의 '만주국 환상곡(혹은 만주국 축전곡)' 연주 영상을 발견해 처음 한국에 알렸다. 이 음악회 영상은 2000년에도 잠시 소개된 적이 있지만, 이 때는 음악회의 성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음악회는 1942년 일제가 세운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베를린에서 열렸고, 안익태는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으로서,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혹은 만주국 축전곡)을 직접 지휘 연주했다.

당시 송병욱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안익태를 존경해서 그의 행적을 쫓다가 이 영상을 발견했고, '만주국 환상곡'의 선율이 자신이 즐겨 듣던 '한국 환상곡'과 비슷해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몇 분간의 연주 영상 외에 '만주국 환상곡'의 악보가 남아있지 않아 전체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안익태가 이전에 발표했던 '한국 환상곡'에서 애국가 선율이 들어있는 4악장을 빼고 '만주국 환상곡'으로 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6년 당시에는 만주국 환상곡 영상을 입수할 수 없어 나는 단신 기사만 쓰는 데 만족해야 했다. (현재는 당시 나치 점령 프랑스의 뉴스에 잠시 소개된 이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YTS5lyKBfFc)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 씨가 독일의 여러 문서보관소에 흩어져 있던 안익태 관련 자료를 발굴 해석해 '잃어버린 시간 : 1938~1944'를 발간한다. 안익태의 전기에 '유럽에서 20여 회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고 기술된 7년간이다. 안익태는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중심으로 어떻게 7년간이나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1935년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1938년 아일랜드에서 4악장에 애국가 선율을 포함한 '한국 환상곡'을 지휘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망국의 한을 토로하며 애국적 면모를 보여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유럽에서의 안익태 행적은 '변절' 자체다.

1938년부터 헝가리의 리스트 음악원에서 공부했던 안익태는 이후 독일로 이주한다. 당시 나치 독일은 일본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아시아의 '일본 제국'이 독일을 지지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안익태는 베를린의 일본인 외교관 집에서 기거하면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하며 일본과 나치 동맹의 문화행사에 자주 출연했다. 그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전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해, 스페인에서 여생을 보냈다.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안익태의 이름이 올랐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 일왕을 찬양하는 곡(에텐라쿠)을 작곡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그동안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불거질 때마다 이런 사람이 작곡한 애국가가 과연 국가로 적합한가를 두고 논란이 일다가 가라앉곤 했다. 그런데 마침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즈음해,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안익태 케이스'라는 책을 내며 안익태의 행적과 관련해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애국가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점화되는 분위기다. 그래서 이해영 교수를 인터뷰했고, 6년 만에 다시 안익태 기사를 썼다. 8뉴스 리포트 ( ▶ "안익태, 친일 넘어 친나치 활동 의혹"…애국가 또 논란)는 시간상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기에 다시 정리해 본다.

우선 이해영 교수는 베를린에서 안익태가 함께 살았던 일본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라는 인물에 주목한다. 그는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이었고,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에 포함된 합창곡의 가사를 썼다. 그런데 최근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발굴한 미국 정보기관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일본의 유럽 정보망 독일 총책임자였다. 즉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고급 첩보원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독일인과 조선인 등 학자와 예술가들을 망라하는 300여 명의 다양한 정보원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그 집에 2년 반이나 머물렀던 안익태는? 프랑크 호프만은 안익태가 '에하라의 스페셜 에이전트'라고 주장했지만,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은 가능하다는 게 이해영 교수의 견해다. 생존을 위해 일본인 행세를 하며 순수하게 음악 활동만 했다, 이런 수준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안익태 만주환상곡(사진=유튜브 캡처)
안익태의 '친 나치' 의혹도 새롭게 조명된다. 안익태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독일 점령국(프랑스)이나 동맹국(일본, 이탈리아, 헝가리),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여 차례 공연했다. 그의 많은 공연들이 '독일 일본 협회'(독-일 협회, 혹은 일-독 협회로도 알려졌다)라는 양국 친선 우호단체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 단체의 성격은 민간단체를 위장한 나치 외곽단체였다는 게 이해영 교수의 주장이다. 나치의 외무성과 선전성이 운영자금을 댄 이 단체의 지원으로 안익태가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또 안익태가 조선인 출신으로 유일하게 나치 독일 '제국음악원'의 회원이었다는 점, 그가 1944년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한 이후, 단 한 번도 이전의 주 활동무대였던 프랑스나 독일, 오스트리아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가 친 나치 인사였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제시한다.

책을 보면 안익태가 굉장히 출세에 집착했고 권력지향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인 음악가로 행세한 것은 유럽 음악계에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고, 아직 확증은 없지만 친 나치 행보 역시 출세를 좇다 보니 빚어진 결과였을 것이다. 이해영 교수가 발굴한 사료들을 보면 광복 후에 안익태는 계속 이승만에게 직접 편지를 쓰며 청탁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청탁의 내용도 주미대사관에 나를 취직시켜 달라, 혹은 한국환상곡으로 뮤지컬 영화를 만들려고 하니 제작비를 지원해 달라, 등등 다양했다.

그렇다면 안익태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이해영 교수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다. 그는 먼저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고 있을 뿐이지, 애국가 자체가 곧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광복 후에도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붙인 노래가 국가로 불린 경우가 있으며, 안익태의 애국가는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너무 늘어진다, 통일된 다음 국가를 만들자, 등등 의견이 엇갈려 정식 국가로 제정되지 않았다. 지금도 애국가를 국가로 규정한 법규는 대통령령밖에 없으며, 그동안 안익태의 애국가를 정식 국가로 지정하자는 법안이 여러 차례 국회에 발의됐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이해영 교수는 애초에 다른 노래들과 함께 불렸던 안익태의 애국가가 이승만 정권을 거쳐, 특히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이후, 권위주의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화되면서 사실상 국가의 지위를 굳혔다고 말한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전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자랑스러운 한국인 음악가'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1965년 스페인에서 사망한 안익태의 유해는 1977년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불편한, 불쾌한 감각을 전 국민이 공유하면서 애국가를 계속 불러야 할 것인가. 소수만 알았을 때는 모른 척할 수 있지만,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이렇게 널리 알려졌는데도 계속 모른 척할 수 있는가. 애국가는 부를 때마다 소속감, 유대, 연대를 느끼고 이를 통해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인데, 부를 때마다 찝찝하고 불쾌하다면, 단지 불쾌한 감각 이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안익태의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한 게 10여 년 전인데 지금까지 정부나 공적 기관에서는 애국가 논란에 대해 사실상 '방치'해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 있을 것인가" (이해영 교수 인터뷰 중에서)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국가를 바꾸자는 얘기가 아니다.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안익태의 행적을 확실히 규명해야 한다. 이해영 교수는 민간의 연구에만 맡겨놓을 게 아니라 제기된 여러 의혹들이 사실인지 규명하기 위해 공적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진실을 규명하고,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애국가를 계속 국가로 써야 할지, 시민들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광주 3·1 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출범식에서 안익태의 애국가 대신 독립군가를 불렀다. 친일청산을 기치로 내건 추진위가 친일에 친 나치 의혹까지 불거진 안익태의 애국가를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3.1 운동 기념식에서 안익태의 애국가를 부르지 말자, 혹은 국민 애국가를 다시 만들자, 등등 국가 관련 청원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더 이상 애국가 논란을 방치하기는 힘든 시점에 왔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사진=유튜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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