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사정(蓋棺事定). 무릇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죽고 나서 관뚜껑을 덮은 뒤에야 가능한 것인가! 스탈린도, 마오쩌뚱도 저승으로 간 뒤 공과(功過)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시도됐다. 살아생전 권력을 휘두를 때 누가 감히 사초(史草)를 바로 입에 올리거나 붓으로 옮길 수 있으리오. 죽어서도 공정한 평가를 늦추려면 세습왕정을 만들면 된다.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일부 독재국가의 세습통치는 이런 필요성에서 생겨난다. 유럽 일부국가나 일본의 왕실은? 위대한 정복자로 떠받들어지던 알렉산더는 죽어서도 헬레니즘 세계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록 그의 가문은 끊어졌지만, 알렉산더 자체는 전설을 넘어 신화로 남았다. 헬레니즘 문명기를 지나 로마나 이후 서양 역사에서 알렉산더는 늘 위대한 정복자요, 불가능한 일을 성취한 위인으로 살아 숨쉰다. 33살 짧은 생을 보상이라도 하듯 2천 수백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성스럽기만 하다. 위대성 너머에 감춰진 알렉산더의 다른 면모를 찾아보는 이번 글은 일각(一刻)의 개관사정((蓋棺事定).
◆ 1. 잔인한 독재자 알렉산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반대세력을 민주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숙청(肅淸)하는 사람을 독재자로 부른다. 알렉산더는 잔인한 독재자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죽였다. 적군만이 아니다. 마케도니아에서 부터 출발해 목숨 걸고 숱한 세월을 함께 싸워왔던 동료들도 예외가 없었다. 속을 모두 꺼내 보이던 감담상조(肝膽相照)의 친구들은 물론 팔다리 처럼 믿고 부리던 고굉지신(股肱之臣)의 부하장군들까지 가리지 않고 숙청했다. 왜 알렉산더는 이들을 죽여야 했을까? 왜 알렉산더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반대 내지 모반세력으로 변신해햐 했을까?
첫째,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차이. 장군들은 이오니아 지방의 페르시아군을 공격하는 정도로 생각했다가 아나톨리아 전체와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공략하고 나아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페르시아 본토와 박트리아, 인더스 유역까지 진출한 대여정에 지쳤다. 승리만을 기록하며 만절필동(萬折必東). 이리저리 굽이 돌기도 했지만, 동으로 동으로 페르시아 정복과 인도원정의 초심(初心)을 굽히지 않고 강행군에 강행군을 거듭했던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에 신물이 났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 인도를 돌아 세계 제국을 머리 속에 그렸지만, 무수한 반대에 부딪쳤던 것이다. 장군들은 지금까지 이룬 업적만으로도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떵떵거릴 텐데, 목숨 내놓고 끝없이 벌이는 정복전쟁에서 이젠 손을 떼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전쟁을 불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알렉산더와 유명(幽明)을 달리해야 했다.
둘째, 이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인종, 민족적 편견이 심했던 고대 사회에서 승리자는 패자를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게 당연한 윤리였다. 죽이지 않으면 노예로 삼아 부리거나 팔았으니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정복지를 약탈하거나 현지인을 수탈해 재물을 모으는 일은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피정복민은 살거나 죽거나 관심 밖이다.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시각은 대개 이런 범주에 머물렀다. 알렉산더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모순관계다. 알렉산더는 전쟁 승리를 단순한 정복으로 여기지 않았다. 동서융합과 하나의 세계제국을 내세운 알렉산더에게 정복지 역시 자신이 다스려야 할 땅이었고, 정복된 이민족들 역시 자신의 백성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저항 세력이 아니고, 자신에게 몸을 굽힌 경우에는 관대하게 처분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병사들은 현지에 잔류시켜 현지여성과 결혼하도록 장려했다. 마케도니아인과 현지인이 결혼해 낳은 자식을 마케도니아인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결혼정책을 폈다. 그 자신도 박트리아의 페르시아 계통 록사네와 결혼했고, 나중에 수사에서는 다리우스 3세의 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마케도니아 순수 혈통을 중시하며 마케도니아의 우수성을 간직하고 이민족을 지배하길 바랬던 장군들에게 전세계를 하나로 묶어 하나의 풍습 아래 살도록 하자는 알렉산더의 만리동풍(萬里同風) 철학은 쉽게 먹혀 들지 않았다. 소귀에 경 읽는 대우탄금(對牛彈琴)이라고 할까! 비록 알렉산더 사후 알렉산더의 바람대로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단일 문화권이 형성됐지만, 알렉산더 생전에 양자(兩者)는 함께 설 수 없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꿈을 꾸는 듯이 보였다.
세째, 마케도니아 전통에서 이탈(離脫)이다. 마지막 세번째를 가장 심각한 분열의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마케도니아에서 왕과 신하는 상하관계이면서도 평등했다. 왕이라고 전권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장군들이 돕지 않을 경우 왕도 전횡을 휘두르기는 어려웠다. 왕은 언제든지 힘을 잃을 경우 교체될 수 있었다. 여론의 힘을 얻지 못하고, 주변의 신뢰를 잃으면 왕도 끝이다. 그런데 동양의 왕권은 달랐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왕권은 절대왕정(絶對王政) 그 자체였다. 국가의 모든 영토는 물론 백성들도 군왕의 소유였다. 백성들은 왕의 자애로운 은혜에 힘입어 살아갈 뿐이다. 왕은 신의 대리자였고, 심지어 이집트에서 왕 자신이 신이 아니었던가?
알렉산더는 고국 마케도니아에서 보지 못한 이런 왕권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지만... 어떤 부당한 명령에도 절대 복종해야 하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왕권과 달리 마케도니아의 왕권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하관계이면서도 상대적으로 평등한 관계였다. 장군들의 합의가 없으면 왕도 무용지물이라는 가치관의 장군들과 스스로 신(神)임을 선언하고 절대왕정의 풍습에 하루하루 익숙해져 가는 알렉산더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알렉산더는 달라진 상황에 맞춰 자신에게 동양의 신적인 권위를 부여해 주기를 원했고, 장군들은 그냥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고수하길 바랐다. 무엇보다 장군들은 알렉산더가 일방적인 경배의 표시로 좋아했던 '프로스키네시스'라는 '왕 앞에서 절하는 예절'을 참기 어려운 모욕이자 수치로 받아들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장군들이 숙청됐다. 정복전쟁에 반대하거나 모반 사건에 연루된 장군들은 과거의 공적에 관계없이 잔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군율을 잡고 지속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아끼는 장군들이지만 처형할 수 밖에 없었던 음찹마속(泣斬馬謖)인가? 아니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배은망덕(背恩忘德)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인가? 알렉산더를 위해 충성을 다 바쳤고, 알렉산더를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평생을 정복전쟁에 따라다닌 장군들이 하나 둘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불안감이 퍼지는 것은 당연지사. 가장 악명높은 사건은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오 장군 부자 숙청. 필로타스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고, 파르메니오 장군은 아버니 필리포스 2세때부터 원정공격을 수행한 역전의 명장이자 아버지 친구였다. 모진 고문 끝에 기병대장 필로타스가 죽고, 숱한 공을 세운 그의 아버지 노장군 파르메니오 마저 반역죄로 죽었을 때 모두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인도 원정과정에서 클레이투스의 죽음은 알렉산더의 고약한 술버릇(酒邪)에서 빚어진 경우여서 더욱 충격이었다. 여민동락(與民同樂)하던 알렉산더가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풍습에 젖어 제왕으로 군림하려 하자 클레이투스는 점점 알렉산더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투에서 위기 일보직전의 알렉산더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는데... 늘상 벌이던 저녁의 향연(饗宴). 이국적인 음악에 농익은 무희들의 요염한 춤사위를 배경 삼아 상다리가 부러지는 식전방장(食前方丈)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먹으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장야지음(長夜之飮)을 벌이던 알렉산더와 클레이투스가 말다툼을 벌였다. 만취한 클레이투스는 작심하고 알렉산더에게 대들었다.
골자는 알렉산더의 위대한 영광은 수많은 마케도니아 동지들의 희생의 대가라는 것. 그리고 신의 아들을 자처하며 장군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마케도니아 전통과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강제로 끌고 나가는 동료들의 제지 속에 할말 안할말 다 쏟아 낸 클레이투스. 술에 취해 있던 알렉산더는 뜯어말리는 주변의 제지를 뚫고 호위병의 창을 뽑아 클레이투스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음식과 술이 뒤엉켜 어지러운 배반낭자(杯盤狼藉)의 술자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의 피로 물들었다. 알렉산더는 회한(悔恨) 속에 며칠 식음을 끊었다고 하는데...
인도 원정에서 수사로 돌아온 알렉산더는 총독들을 대거 숙청했다. 현지민들을 가렴주구(苛斂誅求)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렇게 막역(莫逆)했던 친구나 장군들을 하나 둘씩 잔인하게 숙청하며 알렉산더는 자기만의 아성(牙城)을 쌓아 갔다.
◆ 2. 그리스 민주주의 파괴자
탁월한 능력의 정복자요, 잔인한 독재자로 각인된 알렉산더. 그에게 붙여 줄 또 하나의 이름은 민주주의 찬탈자(簒奪者). 그리스 문명권은 마케도니아라는 괴물이 패권자로 등장하기 전 각 도시국가 별로 민주정을 유지했다. 아테네는 그 대표격으로 오늘날 들여다 봐도 전혀 손색없는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꾸렸다. 왕은 물론 어떤 독재자도 없이 시민들이 권력행사의 주체로 공직자를 직접 선출하며 주요 정책 을 민회에서 투표로 결정했다. 배심원단을 만들어 재판의 사법권도 스스로 행사했음은 물론이다. 노예나 외국인을 제외하고 모든 시민은 금전의 유무(有無)나 신분의 고하(高下)에 관계없이 평등했다. 일본이나 영국 시민들은 오늘날도 그렇지 못하지만...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가 왕정제를 가졌지만, 마케도니아의 왕정제와는 달랐다. 스파르타의 왕은 큰 실권이 없었다. 스파르타 역시 30세이상 시민들의 사회였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왕 앞에 복종하며 사는 마케도니아(비록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왕권보다는 미약했지만)를 어떻게 봤을까? 오늘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국가(우리나라 포함)들이 아프리카, 아랍권의 왕정이나 북한, 중동의 세습 독재국가를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민주주의 국가들이 잘 살고 앞선 문화를 일구듯이 당시도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력이 앞섰고 문화의 꽃도 더 활짝 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왕정 국가들은 왕과 관련된 것만 돌출적으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왕이 사는 궁궐이나 왕의 무덤 부장품...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나 왕실 무덤이 있는 베르기나를 방문할 때 보는 화려한 궁전유적과 무덤은 대표적이다.
군사력은 다르다. 독재국가가 민주국가를 압도할 수도 있다. B.C 5c 아테네는 최강의 문화와 경제력, 해군력을 자랑하며 그리스 문명권을 주도했지만 차츰 쇠퇴했다. 최강 중장보병의 스파르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문명권 도시국가들이 쇠약해진 틈을 타 B.C 4c 초 북쪽에서 그리스 문명권의 미움받이로 살아가던 마케도니아가 갑자기 군사력을 키우며 떨치고 일어섰다. 주역 필리포스 2세는 남으로 내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각 도시국가들을 패퇴시켜 무릎을 꿇리고, 충성을 서약받는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었다. 도시국가들은 자치는 인정 받지만, 자주권을 빼앗겼다. 자주권이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쉽게 일제치하에서 자치를 허용받아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패권국 마케도니아의 눈치를 살피는 종속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주의를 위해 마케도니아의 위험성을 경고한 인물이 그때라고 없었겠나? 민주주주의를 운영하던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라는 사람은 대표적이다. 그는 이웃 보이오티아 지방의 강력한 도시국가 테베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시달릴 때 마케도니아의 위험성을 꿰뚫어 보고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테베를 응원하던 데모스테네스 왈(曰).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집어삼키기 전까지 절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 공화정을 지키려는 그의 애끓는 호소가 하늘에 미처 닿지 못했나 보다. 아테네와 테베 민주주의 연합군은 B.C 338년 카이로네아 강 전투(18살의 알렉산더도 아버지를 도와 참전)에서 필리포스 2세의 전제적인 왕정국가에게 패했다. 150년 전 그 무서운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도 물리쳤건만,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민주주의는 이제 그렇게 끝을 봤다.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그가 망쳐놓은 그리스 민주주의는 회생의 기미를 맞았다. 데모스테네스는 기회라면서 민주주의를 회복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보다 더 독한 애송이 알렉산더가 나타나 다시 한번 민주주의 도시국가들을 군화발로 찍어 눌렀다. 그리스 문명권에서 알렉산더의 영광이란 자주적인 민주 공화정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아테네는 시민 민주주의 국가로 전쟁이 나면 모든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운다. 데모스테네스 역시 알렉산더에 맞서 싸웠는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처절한 패배 앞에 그는 일찌감치 도망쳤다고 한다. 알렉산더 추종자들이 나중에 지어낸 얘기인지... 민주주의의 후퇴.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에 무너진 아테네와 그리스 민주주의는 B.C 5c의 영광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현대사를 보자. 20c 중반까지 독재사회가 민주사회를 억압하고 호령하던 유럽은 좋은 예이다. 후진사회이던 호엔쫄레른 왕가의 독일제국이 19c 말 산업화를 이루고 국내를 통일하더니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화마(火魔)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뒤이어 나찌 독일이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 영국을 제외하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같은 민주국가를 집어삼키고 '제 3제국'을 이룩하지 않았던가. 독일 국민들은 물론 주변국들의 일부 국민들도 강력한 정복국가 나찌 독일에 열광했다. 주역은 독재자 히틀러. 나폴레옹, 알렉산더의 위업을 연상시키는 대목이었다. 만약 히틀러가 소련과의 스탈린그라드 대회전에서 패하지 않고, 미국에 버텼다면... 사람들은 히틀러를 알렉산더와 같은 위대한 정복자로 기억했으려나? 성즉군왕 패즉역적(成卽君王 敗卽逆賊)의 경구는 만인 앞에 평등하다.
◆ 3. 약탈 제국 주의자
그리스 문명권의 민주주의를 짓밟은 파괴자 알렉산더. 아테네와 테베 연합군을 무찔러 그리스 내부에서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조치를 취한 뒤 헬레스폰트(다다넬즈)해협을 건너 이오니아 지방으로 들어갔다. 그리스인들이 국가를 건설했지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다. 여기서부터 이오니아 전지역과 티레, 시돈의 동지중해 연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거치면서 이들이 행한 것은? 페르시아 압제에서 지역민들의 해방? 알렉산더 입장에서 해석일 뿐이다. 정답은 주인의 교체. 페르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바뀐 것 뿐이다. 알렉산더를 좇아다니는 병사들의 마음은 오직 하나. 정복한 땅에서 엄청난 재보(財寶)를 차지해 고국으로 돌아가 잘 사는 것이었다. 알렉산더의 우상 아킬레스의 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면 신나는 약탈이 뒤따라 굶주린 병사들의 욕망을 불려 주는 게 병가(兵家)의 상도(常道).
그렇다면 엄청난 보화가 가능한 이유는? 그리스에서는 왕정이 아니기 때문에 도시국가를 정복해 봐야 남는 게 없다. 금은보화는 절대권력을 쥔 사람이 시민들의 뼛골을 빼서 수탈해야 생기는 법이다. 마케도니아가 본토에서 민주정을 택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점령해 봐도 이런 게 있을 리 없다. 재미없다. 페르시아 지배 지역은 다르다. 총독들이 쌓아 놓은 재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실의 재산... 이수스 전투에서 패한 다리우스 3세가 삼십유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으로 아내와 가족마저 모두 팽개치고 도망간 뒤, 알렉산더가 차지한 보물은? 플루타르크는 "병사들 모두가 부자가 되고도 남을 재산"이라고 기록한다. 물론 과장이겠지만...
13c 십자군 전쟁하러 간다며 프랑스를 떠난 병사들이 덥고 모래바람 휘날리는 예루살렘 대신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라틴 제국이라는 엉뚱한 나라를 세운 뒤 "지구상 보화의 절반이 이곳에 있다"고 호들갑 떤 것과 비슷하다.
이집트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내부 깊숙히 들어간 뒤 다리우스 3세와 치열하게 과가멜라 전투를 치러 페르시아 제국을 붕괴시킨 뒤에도 병사들의 가슴엔 다른 마음으로 가득했다. 바빌론이나 수사, 페르세폴리스 같은 페르시아 주요도시로 쳐들어가 약탈하려는 잿밥. 알렉산더 역시 병사들의 이런 마음에 불을 붙였다. 큰 돈을 만질 수 있다고 적절히 부추겨야 목숨 내놓고 싸움판에 나설 것 아닌가? 이오니아 지방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지나 원정이 확대되면서 이제 전쟁은 그리스 민족을 괴롭힌 페르시아를 벌주자는 대의명분에서 벗어났다. 알렉산더에게는 세계 정복이요, 병사들에겐 그에 따른 전리품. 즉 재보의 약탈이었다. 페르시아의 부(富)는 알렉산더와 병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넉넉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정복한 뒤에 턴 전리품은? 거재두량(車載斗量)의 경지였다. 마차 잘 끌기로 소문난 노새 2천쌍과 낙타 5백마리가 동원됐다고 한다. 미인들도 많았고...
적의 군사력을 궤멸시키고, 약탈한 뒤 마케도니아로 복속시키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알렉산더의 발길이 닿는 모든 땅이 하나의 제국으로 묶였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마케도니아에 굴복한 것은 테베가 3달간 농성(籠城)하며 버티다가 정복당한 뒤 받은 잔인한 처사에 기가 질렸기 때문. 살아남은 2만명 남성시민 모두가 노예로 팔려 갔다.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의 합종연횡(合縱連橫)은 끝나고, 마케도니아의 지배만 남을 수 밖에... 그리스를 떠나 페르시아에 복속돼 있던 여러 지역을 정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페니키아 시절부터 이름 높던 항구도시 티레는 7개월이나 버티다 패했다. 가혹한 보복을 받은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성이 무너진 뒤 무려 3일간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으니 그 참상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시민 수천명이 죽고, 3만명은 노예로 팔렸다. 이를 본 다른 도시나 국가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순순히 알렉산더 제국에 포함되기를 자청했다. 이렇게 제국은 완성됐다.
궁금한 것은 스파르타. 한때 그리스 문명권 최강의 육군 중무장 보병부대를 운영하던 스파르타와 마케도니아는 전면전을 치르지는 않았다. 서로 피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강자끼리는 함부로 붙지 않는 게서로 체면을 유지하는 지름길. 스파르타는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결성한 코린트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훗날 알렉산더도 이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테네와 테베만 잠재워 같은 편으로 만들면 스파르타는 자동으로 견제됐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와 이들 국가는 앙숙이기 때문에 서로 견제가 돼 그리스 본토에서 마케도니아를 향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펠레폰네소스 반도 깊숙한 스파르타와 싸워 출혈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병법이다. 대의명분의 목표 페르시아를 눈앞에 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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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5
&nsp;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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