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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4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nsp;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전

4. 아킬레스 3--사랑

5. 아킬레스 4--브리세이스

6. 아킬레스 5--헥트르와 대결

7. 아킬레스 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 올림픽 1

11. 올림픽 2

12. 올림픽 3

13. 올림픽 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오늘 이야기

33.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29.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4. 후계와 제국의 분열

 


◆ 1. 알렉산더 아들이 물려받다

     알렉산더가 33살의 나이로 죽었다. 산전수전(山戰水戰) 온갖 고비를 다 넘긴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이지만, 혼란을 겪게 됐다. 누가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대제국을 다스릴 것인가의 문제. 알렉산더는 속시원히 '누구'라는 답을 내놓지 않고 떠났다. 마음속에 찍어 둔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정비(正妃)인 첫째 부인 록사네가 곧 아이를 낳을 예정이었지만, 그 아이에게 대권을 넘겨 달라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예외적이다. 자기 핏줄에 연연하고, 집착하며 후사의 안위를 당부하는 게 동서고금 권력자들의 속성인데...

 

알렉산더 두상. B.C 2c 초 헬레니즘 시대 작품. 길이는 42cm. 페르가몬 출토. 헬레니즘 시대 번영한 도시 페르가몬의 아고라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됐다. 알렉산더를 기리는 신전의 제단일부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년기를 지난 알렉산더의 모습을 잘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사자갈기 처럼 가운데 가르마를 탔다. 둥근 눈에, 짙은 눈썹, 두꺼운 눈꺼풀, 약간 벌린 입은 알렉산더 조각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알렉산더 살아생전 B.C 4c 말 그의 실물을 상대로 조각한 조각가 리시포스의 작품경향이다. 여기서는 감성이 풍부해 보이는 인상에 약간 우수에 젖은 듯한 멜랑꼴리(mealcolie)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필자가 촬영한 알렉산더 동상 7장 가운데 가장 정감이 가는 얼굴이다. 이스탄불 박물관. ⓒ김문환

 

     바로 이 점에서 '왜 알렉산더인가'가 증명된다. 어린 자식이나 핏줄에 연연하는 수많은 권력자가 있었지만, 정복왕이 된 사람은 없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후사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거꾸로 자신이 살던 시기까지 최고의 정복자가 됐다. 세력이 강한 자가 결국 최종 지배자가 되는 생리를 치열한 정복전쟁과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깨달았던 알렉산더. 진정으로 강력한 정복자요, 권력자였던 그는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다. 권력이란 게 최고 권력자의 유언 한마디나 신적인 권위 하나 갖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란 걸... 어리석은 욕심에 한마디 내뱉어 봐야 언유소화(言有召禍). 공연히 칼바람만 더 크게 불러일으키고 말았던 역사적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아들 14명을 뒀는데... 앞의 13은 후궁이 생산한 자식들이요, 마지막 영창 대군만이 정비(正妃)의 소생이라. 선조가 죽으면서 이미 세자로 책봉돼 있던 광해군(君) 대신 강보에 싸인 2살짜리 영창대군(大君)으로 보위를 이으라는 의미의 고명(顧命)을 영의정 유영경에게 남기지만... 훗날 고명대신(顧命大臣) 유영경은 물론 유일한 적자(嫡子) 영창대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부원군(府院君) 김제남은 물론 소북파(小北派) 모두가 사약사발을 뒤집어 쓰고 피를 토하는 사화(士禍)로 이어졌으니... 문종이 그렇게 아들 13살짜리 단종을 부탁했지만, 결국, 왕위는 세조에게 넘어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유재란(丁酉再亂) 말기 죽으면서 늦게 낳은 어린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부하 장군들에게 부탁했지만, 최고권력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장군(쇼군, 將軍)직은 임진왜란에 군을 동원하지 않아 세력을 보존하고 있던 일본 동부의 패권자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힘의 지배.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요, 마케도니아의 전통이었다. 알렉산더는 스스로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 피비린내 나는 살상극을 벌이면서 최고의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자기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권력을 휘두를 때도 암살기도가 나왔는데, 자기가 세상을 뜬 뒤 자기 말에 따라 부하들이 움직여 줄 것이라고 순진하게 착각하지 않았다. 냉철한 권력자였다. 칼과 당근이라는 눈앞의 여의봉으로 치장하지 않은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딱 한마디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알렉산더를 보좌해 10여년 정복전쟁을 벌이며 전쟁판을 누빈 부장들은 B.C 323년 6월 13일. 바빌론의 알렉산더 침실에서 '혹시 나에게...'라는 희망을 안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물었다. 알렉산더의 부장들 왈(曰) "누구에게 물려 주시는 겁니까?" ... 죽어가던 알렉산더 왈(曰) "가장 강한 자에게".

 

마케도니아 병사와 페르시아 병사의 전투. 말에 탄 페르시아 병사 특유의 복장이 인상적이다. ⓒ김문환

     알렉산더가 특정인을 지명하지 않고 떠난 깊은 심중을 헤아리지 못한 장군들. 범없는 골에 토끼가 선생이라. 무호동중 토작호(無虎洞中 兎作虎). 모두가 알렉산더의 뒤를 잇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도 함부로 자신이라고 앞장서 나설 수가 없었다. 그 즉시 나머지 장군들의 연합으로 자신은 황천길에 먼저 오르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군들은 일단 이빨을 감추고, 후일을 도모하는 방법. 즉 당장은 모두가 사는 방법을 찾게 됐다. 장군들이 합의한 내용은 우선, 위대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그 아들 알렉산더로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가문으로 제국의 대표성을 갖게 한다는 것. 이런 원칙 아래 임신중이던 왕비 록사네가 아들을 낳을 경우 그 아들과 알렉산더의 이복형이자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필리포스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우자고 결의했다. 딸을 낳을 경우는? 그럴 걱정 할 것 없이 록사네가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아 줬다.

 

     록사네가 낳은 아들은 알렉산더의 유일한 적통 혈육이었다. 물론 알렉산더는 이 아들에 앞서 다른 아들을 낳은 적이 있다. 록사네와 결혼하기 전 B.C 333년 이수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다리우스 3세의 아내와 딸들, 어머니를 포로로 잡을 때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대장인 로도스 출신의 멤논 장군 부인 베르시네를 보고 반해버린 알렉산더. 그녀와 사이에 첫아들 헤라클레스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출(嫡出)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자신도 형이 있었지만, 그 역시 적통이 아니어서 왕위는 알렉산더에게 넘어갔다. 알렉산더가 인도원정을 마치고 B.C 324년 수사에서 결혼한 다른 두명의 페르시아 왕녀, 즉 다리우스 3세의 딸 설부화용(雪膚花容)의 절세가인(絶世佳人) 스타티라와 또 한명의 여성 사이에서는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틈도 없이 알렉산더가 죽고 말았다.

 

     적통 유복자의 이름은 알렉산더 4세. 우리가 알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은 정식으로는 알렉산더 3세다. 알렉산더 4세는 삼촌이자 알렉산더의 이복형 필리포스 3세(아리다이오스)와 공동으로 제국의 통치자가 돼지만, 이게 벌써 한계가 분명하다. 갓 태어난 아기와 세계 제국 건설에 크게 이바지 한 것도, 군대의 힘도 없는 필리포스 3세가 무슨 실권이 있겠는가? 알렉산더 4세와 필리포스 3세는 국가 문서에 도장 찍는 허수아비 지배자였다. 이들 명목상의 지도자를 대신한 사람은 알렉산더를 보필해 제국을 일군 장군들. 이들은 제국 전체를 정교하게 나눈 뒤 스스로 총독이 돼 실질적으로 해당지역을 통치했다. 알렉산더 왕가 사람들은 왕이라는 명분을 지켰고, 힘있는 장군들은 총독이라는 실리를 챙기며 훗날 단독지배자를 꿈꿔 볼 여지를 남긴 대타협이었다.

 

◆ 2. 알렉산더 유장(留將)들이 제국을 분할하다

     이렇게 본질이 다른 두 부류의 불안전한 동거(同居, 꼬아비따숑, Coabitation)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사분오열(四分五裂)은 언제든 닥칠 참이었다. 불행의 씨앗은 공교롭게 알렉산더 4세의 후견인이자 할머니 올림피아스의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뿌렸다. 남편 필리포스 2세가 다른 여자와 낳은 아들인 필리포스 3세를 반길 리 없던 올림피아스는 자신의 손자를 단독 지배자로 만들어 보려는 욕심으로 B.C 317년 필리포스 3세를 암살했다. 이는 알렉산더 왕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뿐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알렉산더의 아들 알렉산더 4세라도 강력한 장군이 아니라 할머니의 수렴청정(垂簾聽政) 아래 있는 어린애에 불과한데... 혼자서 무슨 힘으로 장군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미처 몰랐단 말인가!

 

펠라에서 발굴된 마케도니아 왕관. 펠라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수도이다. 지금도 당시 궁정 바닥을 장식했던 섬세한 자갈 모자이크가 다수 유적으로 남아있다. 또, 마케도니아 왕들이 사용했던 금관등도 발굴돼 유적지 근처박물관에 전시중이다. 펠라 박물관. 필리포스 2세나 알렉산더오 이런 왕관을 썼을 것이다. ⓒ김문환

     마케도니아의 전통상 장군들은 힘없는 군주를 모신 적이 없다. 알렉산더의 유장(留將)들은 서서히 알렉산더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최고 권력의 용상(龍床)을 탐하게 됐다. 이미 디아도코이(Diadochoi, ‘후계자들’, 알렉산더가 죽은 뒤 제국의 패권을 놓고 다툰 장군들)는 알렉산더 사후 [가장 강한 자]가 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지 오래였다. 대권을 잡기 위한 이들의 싸움은 쉽게 결판나지 않았다. 세대를 넘겨 자식들 즉 2세대(에피고노이) 까지 이어졌다. 제국을 이루기 전 전쟁상대는 이민족이었지만, 이제는 동족. 약 40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내전을 치렀다. B.C 312년 균형이 깨졌다. 셀레우코스 장군이 먼저 왕을 칭하며 바빌론과 수사등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오리엔트의 동지중해 연안을 포함한 노른 자위 땅에 시리아를 세웠다. 이집트를 제외하면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자, 카산드로스 장군이 선수(先手)를 빼앗긴 데 분노하다 B.C 310년 만회를 위한 극약 처방을 내렸다. 고향 마케도니아에서 이제 막 소년티를 벗어 나려던 13살 짜리 알렉산더 4세와 권력욕에 가득찼던 할머니 올림피아스, 그리고 어머니 록사네를 암살하고 만 것이다. 이어 알렉산더의 이복 누이동생 테살로니케와 결혼했다. 알렉산더 왕가의 전통을 자신이 차지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시도다. 그러자, B.C 306년 안티노고스 장군이 카산드로스에 한발 앞서 마케도니아 왕을 선언해 버렸다. 뒤통수를 맞은 카산드로스 장군 역시 안티고노스에 맞서 이듬해인 B.C 305년 마케도니아왕을 칭했다. 둘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그런 가운데, B.C 306년에는 리시마코스 장군이 트라키아, B.C 305년 가장 늦게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이집트 왕으로 등극했다. 천하를 다투는 군웅할거(群雄割據).

 

     마침내 B.C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나머지 왕들이 안티고노스를 죽이고 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이 되면서 제국은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트라키아 4국 분할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죽은 안티노고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B.C 298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며 카산드로스 대신 마케도니아 왕이 돼 안티노고스 왕조를 열었다. B.C 281년 쿠르페티온 전투에서는 셀로우코스가 리시마코스를 죽여 트라키아를 해체시켜 4국 체제는 3국 체제로 바뀌었다. 이후 알렉산더의 유산인 헬레니즘 제국은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그리스 본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이집트와 에게해 일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박트리아등 과거 페르시아 제국 영토 대부분)으로 고착됐다.

 

     아내와 아들이라는 따듯하고 안락한 가정생활을 포기한 채 전장(戰場)으로 떠난 아킬레스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듯이 정복만 일삼았던 알렉산더 역시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로 아킬레스와 닮은꼴이 됐다. 알렉산더의 가문은 배제된 채 그의 부장들이 천하를 나눠 갖는 것으로 정복전쟁은 막을 내렸다.

 

◆ 3. 탁월한 정복자 알렉산더, 아버지와 차이

     알렉산더. 메마른 사막의 불볕더위, 험준한 고봉준령의 눈보라, 밀림의 폭우같은 기후나 지형의 악조건을 무릅쓰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수만리 원정을 다닌 그 자체가 초인(超人)적이다. 혼자 다니기도 힘들 건만 수만명의 병사나 종군자(가족, 노예, 포로, 창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급품을 조달하고, 장비를 동원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말이나 노새를 마련해 적정수를 유지하고... 그뿐인가? 언제 닥칠지 모를 적과 생명을 내건 전투를 치르며 지속적인 승리를 거둬야 한다. 전투가 끝나면 약탈한 재물을 분란없이 적절히 분배하고, 부상자나 노병은 돌려 보낸 뒤 신병을 현지에서 충원하고, 새로 정복한 지역의 통치 체제를 확실히 다지면 다시 출정하고... 하루이틀도 아니고 10년 넘게 미지의 세계로만 누비며 이런 일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군대를 일사분란하게 군율 속에 통솔한다는 것은 경이적라고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언필칭(言必稱) 전무후무한 탁월한 정복자.

 

알렉산더 모자이크. 용기백배한 알렉산더의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알렉산더를 미화한 작품이다. B.C 2c 말이나 B.C 1c 초 작품. 폼페이 파우노의 집에서 출토.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인간 알렉산더를 들여다 보자. 그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금발이 자연스럽게 고슬곱슬 구부러진 머리. 실물을 묘사했던 조각이나 후대의 모자이크는 그렇게 전한다. 눈은 둥그렇게 크고, 짙은 눈썹에 얼굴이 한쪽으로 약간 기운 것으로 그려지는데... 서양 영화배우 연상시키는 빼어난 용모는 아니다. 키는 크지않았지만, 몸집은 좋았다. 신화 속 아킬레스처럼 기골이 장대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대신에 무척 강건했다. 용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무용(武勇) 또한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물론 고집스런 여장부였던 어머니 올림피아스 양쪽 모두를 닮은 것으로 보인다. 책을 가까이 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점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정을 벌일 때 각 분야의 학자를 대동하고 다니거나, 현자 디오네게스를 찾았다는 점은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활동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어려서 교육받은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29살이 돼서야 결혼한 점으로 미뤄 여자나 가정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다고 여색(女色)을 멀리한 것은 아니지만... 플루타르크는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왕궁의 수많은 미녀들을 차지하고 난 뒤 "여성과의 만남이 도덕성을 시험하게 만든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기록한다. 그는 여색을 본능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위해 절제를 했다고 볼 수있다. 물론 일탈도 했지만... 자제력과 능력이 있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취기에 오르면 주사(酒邪)가 있었다고 한다. 옥(玉)의 티인가. 고대 그리스에서 살아간 대부부의 사람들처럼 그는 신들에게 무척 경건한 예를 올렸고, 주요 결정을 내릴 때, 점술가를 통해 신의 의지를 알아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신의 야심에 합당하는 예언만 받아들였으니, 자신의 의지대로 산 인물로 보는 게 어울린다.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의 전투장면 조각. '알렉산더의 석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석관에 조각된 작품. 레바논 시돈에서 19c 발굴된 B.C 4c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이스탄불 박물관.ⓒ김문환

     알렉산더는 전투에서 배반하거나 반항하는 적에게는 잔인하게 복수하지만 보통은 관대하게 포용했다. 일시적으로 정복했지만, 지속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현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버리고 도망간 왕실 여성들에게도 관행과 달리 기존의 지위를 인정하고 피해를 입히지 않는 관대함을 보였다. 결국 9년 뒤 이 여성들과 결혼하지만... 마케도니아에서 따라간 장군들은 이런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에게 세계 통합이니 하는 야망 따위는 없었다. 이민족을 점령하고, 재물을 약탈해 고국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게 목표인데...

 

     필리포스 2세가 처음 페르시아 원정군을 조직한 명분은 그리스민족을 괴롭힌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 였다. 이오니아 지방 그러니까 오늘날 터키 서부연안에 모여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 역시 2차례의 침공을 받아 큰 화를 입었다. 페르시아에 원수를 갚자는 명분에 마케도니아를 미워하던 아테네나 스파르타등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물론, 최초 계획을 세운 필리포스 2세의 실제 목적은 이오니아 지방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자신의 영향력 그러니까 페르시아에서 독립시켜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에 두려는 것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이를 알았지만, 최강 마케도니아에 협력하지 않을 경우 생존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코린트 동맹에 가입해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리우스 3세 모자이크. B.C 2c 말이나 B.C 1c 초 작품. 폼페이 파우노의 집에서 출토. 다리우스 3세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보여준다. 알렉산더의 무용에 겁먹은 표정이 역력하다. 물론 승자인 알렉산더측 표현인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와의 이수스 전투에서 패한 뒤 가족을 두고 도망가 와신상담 재기를 노리지만 2년뒤 다시 과가멜라 전투에서 패한다. 이로써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제국은 붕괴됐다. 나폴리 박물관.ⓒ김문환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말아 필리포스 2세의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알렉산더가 행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나 이집트, 인도원정은 생각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필리포스 2세를 도와 종군했다가 알렉산더의 원정에도 따라 나선 노장군들의 생각을 들여다 보면 필리포스의 생각이 엿보인다. 노장군들은 페르시아의 오리엔트 지중해 함대 본거지 티레를 함락시킨 뒤, 도망중인 다리우스 3세가 긴급히 내세운 강화조건(오리엔트를 할양하고 딸을 아내로 준다)에 만족을 표했다. 최강 페르시아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기름진 땅의 반을 차지하는 것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거절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켜야 하고, 다리우스 3세의 딸들은 이미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으므로 누구의 허락 따위를 받을 필요가 없다면서 전투지속 의지를 불살랐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였다.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의 간섭을 받지않는 그리스 문명권의 패자를 원했지만,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멸망과 세계 지배자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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