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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쓰지 않으면 비정상? 트럼프의 행정명령 사용법 [스프]

[뉴스페퍼민트] 다양성과 포용, 순혈주의와 영어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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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0314 뉴욕타임스 해설 썸네일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뒤 펴고 있는 다양한 정책을 아우르는 특징, 관통하는 철학이 있을까요? 본인이 자주 쓰는 미국 우선주의도 맞는 말이고, 주로 트럼프를 비판하는 진영에서 지적하는 권위주의 성향의 제왕적 대통령, 규제 철폐 등 기업과 자본의 이익에 우선 복무하는 리더, 국제 무대에서 도드라지는 힘의 외교, 주권주의 등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정책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관습과의 단절'입니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논리의 흐름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지금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문제가 심각해지도록 민주당(은 물론 전통적인 공화당) 정치인들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이 위기에서 미국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구세주다. 기존 대책으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관습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특별한 조처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나의 앞길을 막거나 나를 비판하는 사람은 대책 없이 무조건 반대만 외치는 사람으로, 문제가 더 곪고 썩도록 방치할 사람이다. 결국,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데 걸림돌이며, 나아가 미국의 적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여당이던 민주당이 인기가 없던 시점에 치른 선거에서 트럼프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유권자들의 기대를 받고, 당선에 필요한 표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된 트럼프와 의회 다수당 지위를 되찾은 '트럼프의 정당' 공화당은 대책을 실행에 옮기고 검증받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습니다.

'관습과의 단절'을 넘어 트럼프 대통령이 돌아가고자 하는 '미국이 위대하던 시절'은 주제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여기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은 누가 자신에게, 또 미국이란 나라에 대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거나 감히 지시하려 하는 걸 매우 불편해하고, 노골적으로 싫어합니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백악관에 불러놓고 방송 카메라를 켜놓은 채 거친 언사로 몰아붙였을 때를 되짚어 봅시다. 젤렌스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푸틴의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며, "미국인들은 다행히 대서양이 가운데 놓여 있어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이라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트럼프는 갑자기 젤렌스키의 말을 자르며 언성을 높였는데,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국인들이 어떻게 느낄지에 관해 당신이 함부로 재단하지 마세요! 감히 당신한테 그럴 자격도 없고, 불편하네요.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우리가 정해요!

젤렌스키가 미국인이 어떻게 느껴야 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대화의 주도권은 트럼프 대통령이 쥐고 있었기에 해명하거나 반박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렇게 일방적인 꾸지람만 들은 채 빈손으로 백악관을 떠나야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리는 이상향은 이렇게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는, 모두가 자신 앞에, 또 미국이란 나라의 힘에 굴복해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에 가깝습니다. 국가 간에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고, 강대국은 군사력이나 노골적인 힘보다는 경제, 문화 등 이른바 소프트파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습도 트럼프는 과감히 깼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임기 들어 자주 쓰는 또 다른 단어 중 하나가 "상식(common sense)"입니다. 자신의 정책은 지극히 "상식적"이라는 주장은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을 곧바로 몰상식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상식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정의하고 선점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지목하고 제거하며 끊임없이 희생양으로 만드는 전략인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소수자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도 트럼프 시대에 나타난 특징입니다. 노골적으로 표적이 된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인권운동단체, 노동조합, 국제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성과 포용의 원칙인 DEI를 추구하던 모든 개인과 기관이 몰상식한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졸지에 미국의 적이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행정명령 가운데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비슷한 전략을 공식처럼 적용한 정책이 바로 영어는 미국의 공식 언어라는 다소 뜬금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당연히 뭔지 아는 감정이지만, 미국인을 비롯해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대부분 절대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영어 스트레스', '영어 울렁증' 같은 말이 담고 있는 감정, 애환의 결이죠. 미국인 중에도 다른 나라에 살기 위해 그 나라 언어를 어렵게 배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말문이 막힐 때면 세상은 더듬더듬 짧은 영어를 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을 보내줍니다. 반대의 경우는 매우 드물죠.

원래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만약 젤렌스키 대통령이 통역을 대동해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로 말했다면 애초에 백악관은 그런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미국 대통령이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말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물론 그래야 하는 상황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만요.
 

대표적인 소프트파워 영어

미국 부유한 집안의 백인 남성으로 태어나 평생 세상에 나를 맞출 필요 없이 세상이 알아서 내게 맞춰주고 길을 터주던 트럼프 대통령 눈에는 영어를 쓰지 않는 사람도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질 나쁜 외국인이 미국인의 피를 오염시킨다"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 사상이 담긴 문제투성이 순혈주의 발언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세계의 표준어'인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트럼프에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인 겁니다. 그래서 행정명령을 통해 굳이 자기만의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선을 그은 것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소프트파워와 노골적인 힘의 논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 또는 통하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점입니다. 소프트파워를 유지하고 확장하려면 소프트파워의 문법을 따라야 합니다. 즉, 힘의 논리를 앞세우면서 소프트파워도 저절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영어는 대영제국이 전 세계에 거느린 식민지를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 뿌리를 내렸고, 미국이 선도하는 소프트파워를 통해 전 세계의 '공용어'이자, '표준어' 지위를 굳혔습니다. 영어를 쓰지 않는다고 벌금을 내거나 처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영어를 잘 쓰면 그만큼 많은 기회를 누리고, 반대로 영어를 잘 못하면 기회를 놓치게 되는 시장의 생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영어를 배울 동기를 부여한 겁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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