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도 OTT가 되나요?
독자 여러분은 '겨울' 하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시나요? 《겨울왕국》일 수도 있고 《러브레터》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캐롤》이 생각납니다. 스크린에 김이 서릴 것만 같은 아련한 겨울, 두 여인의 섬세한 내면 정경(情景)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이 영화는, 현재 재개봉 중입니다.
《캐롤》의 재개봉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재개봉은 특별하다면 특별합니다. '명작을 어필하다, CGV 월간 재개봉-어바웃 필름'이라는 슬로건 아래 멀티플렉스가 시작하는 정기 재개봉 프로그램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CGV는 《캐롤》을 시작으로, 앞으로 매달 한 편의 재개봉작을 선정해서 2~3주간 전국 극장에서 상영하겠다고 합니다. 국내 최대 극장 체인도 재개봉을 본격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하나로 공식화한 셈입니다. 롯데시네마는 '보석 발굴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메가박스는 그때그때 기획전을 통해서 재개봉작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재개봉 영화 열풍을 이끈 주역 중 한 사람은 NK콘텐츠의 남기호 대표입니다. 2013년에 회사를 설립한 남 대표는 이듬해부터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필두로 《판의 미로》, 《메멘토》 등으로 꾸준히 재개봉 시장을 두드려 왔습니다. 특히 2020년에 재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2-30대 젊은 층에까지 인기를 끌면서 '처음 보는 재개봉 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화양연화》는 202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377개 스크린에서 본격적으로 상영을 시작해 2021년 1월 9일에 최고 447개 스크린을 찍고 1월 26일에 마지막 세 자릿수 스크린인 218개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기간 동안 17일이나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면서 10만 관객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화양연화》가 또다시 재개봉한 2022년에 만난 남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개봉을 해서 몇십만 명의 관객을 다시 동원한다? 이런 건 약간 생각하기 힘든 것 같고요, 저는 만 명 이상, 오만 명 정도의 관객들은 충분히 재개봉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년 전의 이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적어도 올해 한국 영화 시장을 본다면 말이죠. 흥미롭게도, 바로 NK콘텐츠가 재개봉한 일본 로맨스 영화 《남은 인생 10년》이 재개봉만으로 42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10년 만에 재개봉한 음악 영화 《비긴 어게인》도 23만여 명이나 봤습니다. 중국 영화 《소년 시절의 너》는 20만, 할리우드 영화 《노트북》은 17만여 명이 들었습니다. 15만 이상 관객이 든 재개봉 영화만 네 편이나 되는 겁니다.
독립·예술 영화는 1만 명, 메이저 스튜디오가 만드는 중급 이상 규모의 영화도 100만 명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엄청난 선전입니다. 저도 올해 《중경삼림》, 《레옹》, 《희생》, 《비포선셋》, 《비긴 어게인》, 《타인의 삶》, 《컨택트》 등 열 편 안팎의 재개봉 영화를 극장에서 봤습니다. 지난달에는 한국 영화 《해바라기》, 일본 영화 《괴물》과 《복수는 나의 것》, 할리우드 영화 《캐롤》, 프랑스 영화 《톰보이》 등 일고여덟 편의 재개봉 영화가 극장에 걸린 데 이어 이달과 다음 달에도《색, 계》, 《매트릭스》, 《공각기동대》, 《나우 이즈 굿》, 《포레스트 검프》 등 명작들이 줄줄이 재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개봉 영화가 많아진 건, 일차적으로는 코로나 때 극장에 걸 영화가 마땅치 않은 데서 비롯됐습니다. 코로나로 신작 개봉이 계속 미뤄지면서 재개봉 영화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새로운 영화 제작도 제대로 안 되면서 엔데믹 이후에는 스크린에 틀 만한 신작 영화가 부족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객들의 영화 관람 습관이 OTT 중심으로 형성되자 극장에서는 흥행 실패작이 늘어나고, 이는 다시 투자와 제작의 축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작품성이나 대중성이 검증되고 홍보 마케팅비도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구작 영화들을 재개봉하는 건,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이겠죠. 운이 좋으면 꽤 짭짤한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지요.
최근 재개봉작들은 재개봉 주기와 이유도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괴물>, <블루 자이언트>의 경우는 개봉 1주년 기념, <나이브스 아웃>은 5주년 기념,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비긴 어게인>은 10주년 기념, <노트북>은 개봉 20주년 개봉을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아바타, 타이타닉, 동경이야기>는 4K 리마스터링 재개봉, 콜럼비아픽처스의 <컨택트>, <베이비 드라이버>는 영화사 창립 100주년 기념 등 제각각의 명분을 걸고 극장에 다시 걸립니다.
흥행 성적도 대체로 나쁘지는 않은데, 예측은 쉽지 않습니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영화일수록, 또 여러 차례 재개봉할수록 관객이 줄어드는 게 보통일 것 같은데, 그 공식이 딱 맞아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남은 인생 10년》은 바로 일 년 전 첫 개봉 때보다 세 배나 많은 관객이 들었습니다. 《노트북》은 2004년 첫 개봉 이후 올해까지 4년 주기로 재개봉하고 있는데, 42만, 18만, 7만으로 관객이 줄다가 올해는 다시 17만여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극장도 거의 OTT의 특성에 수렴해 갑니다. 최신 개봉작을 올린다고 무조건 관객이 오지 않습니다. 종종 천만 영화가 나오기도 하지만, 관객은 과거보다 분명해진 취향과 목적을 갖고 '계획적으로' 극장에 옵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영화가 걸리면 극장을 찾습니다.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려서 못 봤던 과거의 명작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영화답게' 즐기고 싶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저도 개봉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카사블랑카》나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 명작을 극장에서 재개봉한다면 다시 볼 겁니다. 지난 2022년 워너브라더스 100주년 기념 재개봉 때 극장에서 봤던 《사랑은 비를 타고》도 좋았고, 1998년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70mm 필름 상영으로 봤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감동이었습니다.
사실, 좋은 영화는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새로운 영화가 더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많죠. 이 영화들만 다 보고 죽기에도 벅찰 정도입니다. 하지만 시대 변화에 발맞춘 영화들도 계속 필요하고, 영화라는 미디어와 산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신작 영화와 인력들도 계속 필요합니다. 옛날 것만 계속 파먹다 보면 유통과 시설 관련 인력은 유지될지 몰라도 창작 인력은 사라질 테니까요. 그래서 영화 산업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