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45대이자 47대 대통령이라는 진기한 타이틀을 달게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가까이서 취재한 미국 기자들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어떨지 예상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선거에서 이기는 건(winning) 정말 좋아하지만, 통치(governing)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생을 성공한 사업가로 부유하게 살았고, 누군가의 지시는커녕 조언을 듣고 이를 토대로 중요한 결정을 내린 적도 많지 않을 그의 삶을 고려해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거는, 특히 대선은 리더(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정당, 캠프가 똘똘 뭉쳐야 하는 싸움입니다. 캠프 안에서 의견이 대립하면 대체로 후보의 뜻에 모두가 맞추기 마련입니다. 트럼프 개인의 인기와 카리스마가 특히 큰 동력이던 트럼프 캠프에는 트럼프에 충성하는 사람만 가득했습니다. 그 안에서는 더더욱 "트럼프의 말이 곧 법"이었을 겁니다. 이렇듯 선거를 치르는 과정은 트럼프에게 익숙한, 트럼프가 편하게 느낄 만한 세팅입니다.
반면 트럼프가 두 달 뒤 당선인 타이틀을 떼고 대통령으로 다시 돌아갈 백악관의 삶과 기대되는 역할은 세팅부터 다릅니다. 행정부의 수장이자, 미국이란 나라의 군 통수권자, 헌법의 수호자가 될 트럼프가 이끌어야 하는 조직과 구성원 중에는 트럼프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마라라고 저택에서 '예스맨'에게 둘러싸여 누리는 수많은 '프리패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전체 득표에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을 300만 표가량 앞섰고, 상원과 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했습니다. 이 정도면 8년 전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손에 쥔 채 정권 인수 작업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부와 관료 조직이 자신이 공약을 추진하는 데 제동을 걸지 모른다며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냈고, 마라라고 저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국 정상들의 축하 전화를 받으며, 장관, 연방기관 수장 등 주요 인사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유권자에게 통치 비전을 설명하고 선택받기 위해 경쟁하는 시간이라면, 이제는 통치의 시간입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트럼프는 이제 선거 기간 했던 약속을 이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검증받게 됩니다. 검증하는 이는 이번에도 유권자입니다. 2년 뒤 중간선거에서 처음 받아 들 성적표의 기준은 부동산 프로젝트의 수익률이나 회사 주식 가격이 아닙니다.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임기 첫 2년 내 삶이 어땠는지 돌아보고 투표할 겁니다. 2년은 보기에 따라 긴 시간일 수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금방 지나가기도 합니다. 유권자들이 만족하며 이번처럼 표를 줄지, 아니면 실망해 표를 거둘지는 트럼프 하기에 달렸습니다.
이미 8년 전, 관료주의와 한바탕 부딪쳤던 좋지 않은 기억을 잊지 않았을 트럼프는 이번에는 훨씬 더 신속하고, 어쩌면 간절히 자기와 마음이 맞는, 본인에게 충성하는 이들로 정부를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초반 인사부터 잇달아 제동이 걸리는 등 좌충우돌 끝에 2년이 흘러 받아 든 성적표가 낙제에 가까웠습니다. 2018년 중간선거를 통해 하원 과반을 되찾은 민주당은 이후 2년 안에 트럼프를 두 차례나 탄핵했습니다. (상원 2/3가 찬성해야 하원에서 올라온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 다 상원에서 구제됐습니다.)
트럼프 2기 인사의 절대 기준: 충성
글을 쓰는 중에도 예상했던 인사와 뜻밖의 인사들이 한데 섞여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일단 이번 글에서는 트럼프 당선인이 지명한 후보의 면면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겠습니다.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장관들의 경우 내년 1월 2일까지 상원 다수당인 민주당이 인준해 줄 가능성이 크지 않기도 하고, 몇몇 장관 후보는 논란이 너무 많아서 글을 한 편씩 따로 써야 하는 수준이라 그렇기도 합니다.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백악관 참모들은 1월 20일에 취임한 후에야 정식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야 할 수 있겠지만, 1월 20일 오전까지 대통령은 조 바이든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발표된 인사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확실히 보여준 원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백악관 참모진이든 행정부 장관이든 다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인데,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이들만 선택받았습니다. 법무부 장관 지명자인 맷 게이츠 하원의원, 국토안보부 장관 지명자인 크리스티 노엠 사우스다코타 주지사, CIA 국장으로 지명된 존 랫클리프 전 국가안보국장 등 전부 다 2020년 선거는 부정선거로 민주당과 바이든이 트럼프의 승리를 빼앗아 갔다고 주장해 온 인물입니다. 마가(MAGA) 운동의 선봉에 섰거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로, 미국 우선주의를 비롯해 트럼프 당선인의 철학과 원칙을 온몸으로 체화한 이들입니다. 한때 하마평에 올랐던 니키 헤일리 전 UN 대사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이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았던 이유도 같습니다.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4년간 대통령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난 뒤에도 워싱턴 정치권을 한데 묶어 부패한 기득권의 온상이자, 미국을 막후에서 쥐락펴락하는 딥스테이트라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트럼프가 생각하는 것처럼 워싱턴 관료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면, 부처나 기관장을 자기한테 충성하는 사람들로 채우려는 트럼프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동시에 일론 머스크에게 정부 부처와 각 기관의 효율성을 평가해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는 권한을 준 것도 이미 선거를 치르며 내비친 구상을 따른 것이고, 지지자들도 기대가 크니 트럼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발표한 인사가 아무리 상식에 어긋나고 이상해 보여도 선거에서 이긴 건 트럼프와 공화당입니다. 인사를 두고 하는 비판이 아무리 일리가 있더라도 지금은 먹히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리 트럼프와 머스크가 정부 조직을 줄여 효율성을 높이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입법, 행정, 사법부를 트럼프에게 충성하는 마가를 심장에 아로새긴 인물로 채우더라도 여전히 미국 정부는 트럼프 캠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선거를 잘 치르는 능력과는 좀 다른, 통치를 잘하는 정치력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용하고 양보할 건 양보하며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진짜 "거래의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트럼프가 내정한 인물의 면면보다도 우려스러운 점은 자신의 인사를 검증받기조차 꺼리는 트럼프의 태도입니다. 13일 오전 상원 공화당 의원과 당선자들은 비밀 투표로 존 쑨 의원(사우스다코타)을 공화당 원내대표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과 캠프 측에서 밀던 후보는 릭 스캇 의원(플로리다)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인사를 검증하는 건 헌법이 정한 상원의 핵심 임무 중 하나인데, 트럼프는 인준 절차가 오래 걸리는 게 싫다며,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이 앞장서서 휴회 중에 대통령이 원하는 인사를 전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존 쑨 신임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밝히면서도 트럼프가 검증 절차 없이 마음대로 인사를 하지는 못할 거라고 사실상 선을 그었습니다. 상원의 권한을 지키고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하지 않는 쪽을 택한 겁니다.
트럼프 당선인도 일단 한발 물러선 듯하지만, 인사를 둘러싸고 시작부터 벌어지는 잡음을 미국인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선거에서 완승했으므로 강력한 권한을 위임받은 건 맞지만,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기존의 관행을 어디까지 무시하고 파격을 택하는지, 그렇게 고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검증해 보니 어떤지, 검증 자체를 막으려는 건 왜인지 전부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가 뭘 해도 좋아하고 무조건 지지할 강성 지지층과 과거에 민주당을 찍었다가 이번에 표를 안겨준 중도 성향, 부동층 유권자들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 아메리칸 컴파스의 수석 경제학자 오렌 카스가 칼럼에서 지적한 이야기도 같습니다.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바라는 걸 외면하고, 마라라고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정책을 편다면 트럼프는 실패로 가는 지름길을 밟는 셈입니다. 사실 이건 트럼프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껏 많은 당선자가 범한 실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의 제목도 직역하면 "많은 대통령을 파멸로 이끈 선택지 앞에 선 트럼프"입니다.
카스의 제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이든과 민주당에 실망하고 트럼프와 공화당에 기대한 대로 투표한 유권자들이 다시 등 돌리지 않도록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겁니다. 선거 유세 현장에서 큰 호응을 끌어낸 이슈가 아닐 수도 있고, 같은 이슈라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다 보면 세부적인 사항을 조정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그렇더라도 예를 들어 기업들이 정당한 취업 비자 없는 외국인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전자 검증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민주당 지지자들도 대다수 찬성하는 정책이므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제도가 정착되고 나면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가 못한 일을 해낸 것으로 홍보할 수도 있어 다음 선거에도 활용할 수 있는, 공화당에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주는 정책이 될 겁니다.
복잡하지 않은 제언이지만, 많은 대통령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 남은 사람들이 선택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전부 다 아첨꾼이거나 무능하고 부패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분명 정부가 성공하는 것보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장악한 기회를 활용해 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선거가 끝나고 나면 부동층 유권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성 지지자를 비롯한 정치적 고관여층은 계속해서 정부 정책을 하나하나 평가하고 반응을 내놓죠. 그러다 보니, 선거에서 더 중요한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을 자꾸 잊게 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