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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권력 빌려줬더니 나온 '뜻밖의 결과' [스프]

[한비자-정치적 인간의 우화] 권력 쥐여준 사람은 억울해지는 게 '정치의 룰' (글 : 양선희 소설가)

스프 중국본색 양선희
최근 공무원으로 은퇴한 한 지인을 만났더니 그분의 하소연이 길더군요. 요즘은 부인 눈치를 보며 용돈을 얻어 쓰고, 부조라도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잔소리를 듣는답니다. 그러면서 "평생 내가 벌어서 갖다 준 돈인데, 이렇게 비굴하게 써야 하느냐"며 한탄했습니다.

이런 하소연은 워낙 많이 듣는 터라 새로울 건 없습니다. 비밀스러운 여담이지만,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지금부터라도 용돈을 조금씩 모아 은퇴 후를 대비한 뒷주머니를 하나 만들라"고 조용히 조언하기도 한답니다.

우리는 흔히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갑'이고, 돈을 받아 쓰는 사람은 '을'이라고 인식합니다. 한데 갑을관계는 계층이나 계급과 달리 고정된 위치가 아니라 순간순간 자리바꿈을 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벌어오는 사람'은 그 순간 갑이지만, '벌어온 사람'은 갑도 됐다 을도 됐다 합니다. 중요한 건 지금 그 돈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을 한비자의 권차(權借)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뜻은 '빌린 권력도 똑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물고기가 연못을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고, 군주가 권력을 신하에게 빌려주면 다시 돌려받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권력을 쥐여준 사람이 억울해지는 게 '정치 게임의 룰'이라는 거죠. 권력이 넘어가면 이런 억울한 일도 생긴답니다.
 
#1
연나라에는 미친 사람에게 귀신을 쫓는다며 개똥을 뒤집어씌우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미치지 않았는데도 개똥을 뒤집어쓴 사람이 있다.

그 연 사람이 어느 날 일찍 밖에서 돌아오다가 집에서 나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아내와 통정하고 나가던 선비였다.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손님인가?"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손님은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집안의 노복들에게도 물어보니 그들도 모두 "없었습니다"라고 한 입처럼 대답했다. 그러자 그 처가 "당신이 뭔가에 홀렸나 봅니다"라고 말하며, 개똥을 그에게 끼얹었다.

개똥을 뒤집어쓴 남자는 억울할 겁니다. 분명히 집에서 나오는 남자를 봤는데 온 집안사람들이 손님은 없었다고 잡아떼는 상황. 이는 그 집안의 위세가 이미 부인에게 넘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미 위세가 넘어가면 좌우의 모든 사람이 위세 높은 사람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고, 일이 그렇게 되면 진실도 가려진다."

일단 권력자가 되면, 누구라도 그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여줍니다. 요즘 종편의 '뉴스쇼'를 대입해 봐도 되겠습니다. 패널들은 권력자의 잘못은 잘못이 아니라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잘못이라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목소리를 높이죠. 어이없는 광경이지만 그게 정치인들의 '루틴'(routine)이라는군요. 어쨌든 누군가에게 권력을 쥐여주거나 빌려주는 순간, 그걸 쥐여주고 빌려준 사람은 억울한 처지로 떨어지는 게 세상 이치랍니다.

이런 일이 보통 사람의 일상사와 수준 낮은 정치꾼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옛날 기세 높았던 초나라 왕도 똑같이 당했다는군요.
 
#2
초나라 재상 주후는 높은 지위로 전횡하고 있었다. 초왕이 이를 의심하여 측근들에게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3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 실력자였던 전상(田常)은 군주에게 다른 신하들의 작위와 봉록을 청해 나눠주고, 아래로는 곡식을 재는 되와 말의 크기를 키워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풀었다. 이렇게 전상이 군주의 재화로 덕을 쌓았고, 그 군주는 덕을 베풀지 않는다하여 살해당했다.

송나라의 역신 황희는 군주에게 "칭찬하고 상주는 건 백성들이 좋아하는 일이니 왕께서 스스로 하시고, 벌을 주는 것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일이니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청해 형벌권을 얻었다. 그러자 송나라 왕은 누군가 죄를 지으면 황희에게 가라고 하니 사람들은 황희를 두려워하며 왕은 우습게 생각했다. 이로 인해 송나라 왕은 이후 겁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주면 전횡을 하고, 전횡을 하면 전후좌우가 전횡하는 자를 위해 말을 맞춥니다. 이건 약과죠. #3처럼 역으로 빌려준 권력에 배신을 당하거나 망하는 일도 흔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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