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이십여년. 중국은 엄청나게 변했다. 나폴레옹이 '깨우지 말아야 할 잠자는 사자'라고 했다던 중국은 세계최강 경제국가의 자리를 두고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지척에 있는 우리는 중국 급성장의 명(明)과 암(暗)을 두루 경험했다.
올해가 한중수교 30년이다. 미우나 고우나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다. 그 내용은 점차 달라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 기업들이 저임금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생산기지였고, 비교적 만만하게 진출할 수 있는 거대 내수시장으로 비친 적도 있었지만 그건 옛날 얘기다. 외국기업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중국정부는 그런 태도를 버린지 오래다. 중국의 기업경쟁력과 소비자의 안목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우리 기업들은 거센 경쟁에 직면했다. 대중무역은 적자로 돌아섰다.
이런 가운데 지난 6월말,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언이 나왔다. "중국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내수 중심의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라는 발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NATO)정상회의 참석에 수행한 최상목 경제수석이 '유럽시장의 중요성'을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 발언은 이번 정부의 외교안보정책과 맞물려 '탈(脫)중국 선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바보 짓' 등 거친 표현을 써가며 "어떻게 지금 갑자기 탈(脫)중국을 하느냐"고 맹공을 펼친 게 전형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중국이 우리 수출의 25%, 수입의 23%를 차지하는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고, 특히 2천 개 가까운 상품은 중국에서 80% 이상 수입해서 쓸 정도로 의존도가 큰 상황이라는 사정을 청와대 경제수석 쯤 되는 사람이 몰라서 저런 소리를 했을 리는 없다.
중국과 비즈니스를 해 온 기업들의 사정과 국제적인 동향, 국제정치적 변화 등을 살펴보면 중국시장에 예전처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수년 전부터 지속되어 온 지각변동급의 변화다. 우리가 중국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는 다만 변화에 적응해 생존할 방법을 찾아야 할 뿐이다.
차례
▷ 점점 나빠지는 대중 무역수지
▷ 왜 나빠지고 있을까?
▷ 중국에서 돈 벌기 어려운 이유
(1) 보조금 등 비(非)관세장벽
(2) 애국주의 소비 '궈차오'
(3)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았듯, 중국도 우리를 추격
▷고도화되는 중국 산업...거기에 점점 의존하는 한국 수출
▷배터리,반도체...신성장산업에서 한국 위협하는 중국
▷정치적 리스크 점점 커지는 중국 사업환경...불안에 떠는 다국적 기업들
▷중국은 과연 중진국 함정 벗어나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까?
▷어떻게 대처해야?
점점 나빠지는 대중 무역수지
이는 미국을 상대로 한 무역과는 반대되는 양상이다. 올 상반기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 금액은 216억7100만 달러(약 29조 원)로 작년 같은기간보다 87% 급증했다. 이 기간 세계 각국의 대미 무역흑자 액수가 24% 늘어난 것에 비하면 매우 큰 폭의 흑자다.
대중 무역수지, 왜 나빠지고 있을까?
우리 기업들이 코로나19 이전엔 중국서 큰 호황을 구가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중국시장 점유율은 코로나19 전부터 하락 추세였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은 한때 중국에서 선망의 대상으로서 아이폰과 비슷한 지위를 누렸지만 지금은 중국 기업들의 제품에 밀려 시장점유율 1% 미만으로 추락했다. 고급대형TV나 승용차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돈 벌기 어려운 이유 (1) 보조금 등 비(非)관세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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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정치적인 이유로 기업이 직격탄을 맞기도 한다. 현대차는 2016년 중국에서 114만 대를 팔며 역대 최대 판매량을 찍었다. 중국 시장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이듬해인 2017년 우리돈 약 1조6천억 원을 투자해 연산 30만 대 규모의 충칭 공장을 지었다. 하지만 사드 보복과 한한령 사태 이후 중국인의 반한감정이 커지면서 2017년에는 판매량이 80만대 아래로 급감했다. 2021년엔 또 절반으로 줄어 38만여 대에 불과했다. 이미 2019년에 중국에 지었던 첫 공장의 가동을 중단했고, 그나마 지난해에는 중국업체에 이 공장을 넘겼다. 올 초에는 충칭공장의 가동을 중단했다. 기아도 2016년 판매량이 최대(65만대)로 올랐다가 2017년에 반토막이 났고 2021년엔 거기서 또 반토막이 났다.
그외에도 한국기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달린다. 중국기업들과 같은 조건에서 당하는 일들도 많지만 중국기업보다 더 심하게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중국진출 한국기업의 국내복귀 실태조사(2019)>에서, 기업들은 '생산 중단 권한을 가진 중국 당국의 잦은 조사', '경쟁사의 견제로 대형 유통매장에 납품 불가', '중국정부의 환경 및 소방 규제에 적응하기 어려움' 등을 철수의 이유로 들었다.
중국에서 돈 벌기 어려운 이유(2) 애국주의 소비 '궈차오'
궈차오 열풍은 각종 공산품을 넘어 문화, 일상생활 콘텐츠 등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뜨는 상품은 '매우 중국적인' 것도 있고, 그냥 봐서는 그리 중국풍이 강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중국 커피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싼둔반(三頓半)'은 궈차오 바람을 타고 성장한 대표적인 중국 토종 브랜드다.
전통미 살린 디자인으로 중국소비자들의 눈길을 끈 화시즈(华西子)도 궈차오 소비의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요즘은 중국인들이 선망할 만한 레벨의 제품이 되거나 중국제품들과 가성비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소비자들에게 선택받기가 어렵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 한국 화장품업체들이 중국 매출 부진을 겪는 건 단지 코로나19 봉쇄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에서 돈 벌기 어려운 이유(3)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았듯, 중국도…?
한국도 처음엔 싸고 품질낮은 제품을 만들다가 점차 고급화된 제품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출장자나 교민의 귀국선물 1순위는 일제 '코끼리밥솥'과 미제 '맥스웰 커피'였다.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에선 이런 '외제' 생필품을 산더미처럼 싸들고 들어오는 귀국자들을 온가족이 나와서 맞이하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수출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말에 한국산 승용차와 컬러TV, VCR이 미국시장에 처음 수출되던때만 해도 고장 잘 나는 저가품의 대명사로 취급받았다. 피눈물나는 노력끝에 지금은 한국산 제품이 프리미엄급으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제는, 그런 역사를 중국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고도화되는 중국 산업...거기에 점점 의존하는 한국 수출
2000년에는 합판 등 목재, 가죽, 신발 등의 품목에서 전체 수출 중 대중수출 비중이 높았다. 반면 2021년의 목록에서는 이들 업종이 사라졌고, 정밀기기, 정밀화학, 반도체가 들어왔다. 2021년 반도체 수출 물량의 39.7%가 중국으로 갔다.
그런데, 반도체, 정밀화학, 정밀기기 등의 수출이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요소수나 희토류 등을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못지않게 큰 리스크이기도 하다. "국내 고부가가치 산업의 대중(對中) 의존도 증가는 역으로 말하면,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좁혀졌을 때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라는 것이다. 대한상의는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고위기술 산업군은 대외리스크에 훨씬 민감하다"며 "대중 의존도를 중국이 무기화하지 못하도록 수출다변화 등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고서에 밝혔다.
신성장산업에서 한국 위협하는 중국
반도체는 어떨까.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질식시키려고 미국 정부가 애를 쓰고 있지만, 엉뚱한 곳에서 균열이 나고 있다. 애플은 곧 나올 아이폰14에 중국YMTC의 128단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하기로 했다. 이 회사 제품만 쓰는 건 아니고 한국의 SK하이닉스, 일본 기옥시아에 이어 제3의 공급업체로 낙점한 것이지만, 한중 기술격차가 2년 이내로 좁혀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분야에서 중국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중국은 최고사양의 비싼 칩 분야에선 수년간 대만과 한국에 밀리겠지만, 자국내 제조업이 필요로 하는 중저 사양 칩 수요를 자국산 반도체로 채워가면서 점차 경쟁력을 끌어올릴 것이다.
정치적 리스크 점점 커지는 중국 사업환경…불안해하는 다국적 기업들
영국에 본부를 둔 다국적 보험 자문 및 중개회사인 윌리스 타워스 왓슨은 매년 기업들이 직면한 정치적 리스크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다. 올해 조사에서 다국적 기업의 95%는 인도태평양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데 따르는 리스크를 염려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도태평양지역이란 결국 중국인데, '95%'는 2년전의 답변(62%)보다도 훨씬 높아진 것이다.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는 서구와 중국의 전략적 경쟁과 경제적 디커플링이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며, 이 과정에서 개별 기업이 보복의 목표물이 될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답했다.
19만여개의 영국 기업들을 대변하는 조직인 영국산업연맹의 토니 댄커 사무총장은 지난 7월말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내가 얘기해 본 모든 기업들은 중국에 집중된 자신들의 공급망을 다시 검토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서방의 공급망 분리가 가속화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주재 유럽연합(EU)상공회의소의 지난 6월 조사결과, 23%의 기업들은 사업조직을 중국 밖으로 옮기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기업의 50%는 2021년 이후 중국내 사업환경이 그 전에 비해 더욱 정치적 영향에 휘둘린다고 했다. 이는 2019년의 같은 조사 때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당시 응답 기업들은 "중국시장의 활기와 성숙도에 대해 점점 굳건한 확신을 하게 된다"는 등의 답을 많이 했다. 주중 EU상의 부회장인 베티나 숀-베한진은 설문 조사결과와 함께 내놓은 성명에서 "오늘날 중국에서 유일하게 예측가능한 것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뿐이며, 이는 기업환경엔 독이다."라고 일갈했다.
이런 여러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국경제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계의 성장을 이끄는 강력한 기관차 역할을 한다면 기업들도 군소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앞으로도 중국이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짙어지고 있다. 허시 초콜릿의 중국지사, 애플의 에어팟 프로2 생산라인, 어벤저스 캐릭터 장난감 등을 만드는 세계최대 장난감회사 해즈브로의 생산공장, 지프 자동차 공장 등은 올들어 문을 닫았거나 제3국으로 이전했거나 탈중국을 검토중이다.
중국은 과연 중진국함정 벗어나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까?
2021년 중국에서 65세 이상 인구는 2억560만명으로 전체의 14.2%를 차지했다. 국제적 기준으로 볼 때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이는 중국경제의 잠재성장률과 사회적 활력이 그만큼 빨리 둔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지속적인 해외이민 유입과 신생아 출산으로 젊은 인구를 불려나가는 미국과 대조된다. 성장이 정체되고 소득이 늘지 않는 이른바 '중진국 함정'에 빠질 우려도 그만큼 커진다.
노동력의 양이 줄면 그만큼 질적으로 고도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2015년 조사를 보면, 중국 노동인구의 30%만이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농촌지역 주민등록을 지닌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기 어려운 문제, 문화대혁명 시대 반(反)지성주의와 교육파괴의 잔재 등이 겹쳐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중국 -무엇이 중국의 지속적 성장을 가로막는가』 스콧 로젤, 내털리 헬 지음)
[어떻게 대처해야?] 중국에게 우리의 목줄을 쥐어주진 말자
대한민국이 중국 경제와 맺어나가야 할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지금 시대의 세계사적 변화를 제대로 읽어야 방향설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중-러간에 벌어지는 신냉전과 공급망 분리는 냉전종식 후 30년간 진행된 '자본에 의한 세계화'가 일단락되고 탈(脫)세계화(de-globalization)로 전환되는 거대한 흐름에 따른 것이다. 좀 이러다 말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안이한 판단이다.
▲ 참고기사: 세계화와 탈세계화, 어떻게 비롯됐나
시야를 동북아시아로 좁혀보면, 지금을 병자호란이 터지던 17세기에 비유하며 미국(망해가는 명나라)을 버리고 중국(떠오르는 청나라)에 붙는 게 조선, 아니 대한민국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필자는 기사 후반부의 상당부분을 그렇지 않다는 설명에 할애했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많은 토론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혐중정서에 올라타 '중국 손절'을 떠드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중국은 여전히 우리 바로 옆에 있는 인구14억의 거대시장이며, 우리 산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있다. 중국의 인건비가 많이 올라 인도의 5~6배 수준이라고 하지만 다종다양한 부품 소재기업들이 한데 모인 클러스터, 높은 제조역량, 도로와 전기 항만 등의 인프라는 여전히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남아있게 하는 경쟁력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계란을 한 바구니에 몰아넣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었던 요소수 사태, 독일이 겪고 있는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중단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 당장 편하다고 해서 한 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그나라에 우리의 목줄을 넘겨주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다. 수출도 수입도 '다변화'가 살 길이라는 말이다.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말은, 당장 탈(脫)중국을 하자는 '헤어질 결심'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진단, 그리고 생존전략 필요성에 대한 주의환기로 읽는 게 맞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보니 풍경이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면밀하고 꾸준하게 무게중심을 조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스마트폰 공장을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긴 삼성전자처럼, 경쟁력을 유지하는 기업들은 이미 조용히 오랫동안 해 온 일이다.
(구성·편집: 이현식 D콘텐츠제작위원 / 콘텐츠디자인: 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