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청와대와 국방부가 일제히 L-SAM 홍보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재명 후보의 주장에 호응이라도 하듯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SNS로 포문을 열자 국방부는 며칠 전 제시했던 공보준칙을 무시하고 L-SAM 발사 영상을 전격 공개했습니다. "정부가 선거에 개입한다"는 비판이 아니 나올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국방부가 L-SAM을 띄우기 위해 영상을 조작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습니다. 영상의 L-SAM 소개 도입부에 5년 전 미국 요격체계 시험 발사의 웅장한 장면을 아무 설명 없이 끼워 넣은 것입니다. 국방부는 해당 영상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상영하고 언론에 배포했습니다.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참석자들 중 "영상이 이상하다"고 지적한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히 서욱 국방장관, 강은호 방사청장, 박종승 ADD(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은 L-SAM 시험 발사를 한 안흥시험장과 L-SAM 개발 현황을 속속들이 꿰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GBI 영상이 국산 L-SAM 영상으로 둔갑
국방부가 어제(28일) 공개한 우리 군 핵심 무기 동영상은 약 6분 분량입니다. 2분 17초에서 패트리엇 발사 장면이 끝납니다. 곧바로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에서 미사일이 치솟는 장면과 L-SAM 발사 근접 촬영분이 이어집니다. 국방부 당국자들은 작은 섬의 발사 장면이 L-SAM 발사의 부감 샷으로 보인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가장 최근의 L-SAM 시험 발사는 지난달 23일 안흥시험장에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당 장면은 안흥시험장 앞바다여야 합니다. 하지만 섬의 위치, 바다 빛깔 등이 서해 같지 않았습니다.
취재 결과, 해당 장면은 지난달 23일 안흥시험장이 아니라, 5년 전인 2017년 5월 태평양 한복판의 콰잘린 환초였습니다. ADD의 L-SAM 시험 발사가 아니라, 미국 미사일 방어청의 중간단계 요격체계(GBI) 시험 발사 장면이었습니다. 미군의 영상 제공 사이트인 디비즈(DVIDS)에 현재도 2017년 5월 콰잘린 환초 GBI 발사 영상이 그대로 탑재돼 있습니다.
ADD는 여러 가지 미사일 영상을 제공했고 국방부는 이를 받아 편집했다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GBI 발사 영상이 삽입됐다는 것이 국방부 설명입니다. L-SAM 영상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자료화면임을 명시하지 않고 집어넣었기 때문에 의도적 영상 조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의도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전문연구위원은 "L-SAM은 개발 초기 단계인데 개발이 완료된 것처럼 보이려고 미국의 요격체계 영상을 사용한 것 같다"고 꼬집었습니다. 국방부 측은 "말단 직원이 편집하다 실수했다"는 해명을 흘리고 있지만, 공개에 앞서 몇 단계의 검수와 시사(試寫)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단순 실수로 보기 어렵습니다.
장관 · 방사청장 · ADD 소장은 왜 몰랐나
서욱 국방장관, 강은호 방사청장, 박종승 ADD 소장, 각 군 주요 장성들은 어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방부의 핵심 무기 영상을 함께 지켜봤습니다. 서욱, 강은호, 박종승 세 사람은 안흥시험장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습니다. L-SAM 개발 현황도 면밀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영상이 이상하다"며 손을 들었음직도 합니다.
하지만 어제 오전 8시에 시작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핵심 무기 영상이 틀어진 이후 오후 4시쯤 영상 조작 의혹 보도가 나올 때까지 누구 한 명 문제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조작을 알고도 입을 닫았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특히 서욱 장관과 박종승 소장은 지난달 23일 청와대 당국자들과 함께 안흥시험장에서 L-SAM 발사를 참관했습니다.
국방부 측은 "장관은 영상의 사전 검수를 하지 않았고 회의에서 영상을 처음 봤다", "조작인 줄 몰랐다"고 밝혔습니다. ADD도 "소장은 몰랐다"는 입장입니다. 방사청 측은 "청장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확인이 어렵다"는 모호한 답변을 했습니다.
국방부와 군의 여러 관계자들조차 국방부가 개발 중인 L-SAM의 영상을 공보준칙을 어기며 이례적으로 공개한 것을 정치적 행위로 여기고 있습니다. 여야 대선 주자들이 L-SAM이냐 사드냐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방부가 평소에는 지침에 따라 공개 않던 개발 중인 L-SAM의 영상을 턱 내놨으니 정치 행위로 보일 수밖에요. 여기에 더해 L-SAM을 부각시키려는 듯 영상 조작도 벌어졌습니다. 국방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지난달 23일 안흥 시험장에서 한 것은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달 23일 안흥시험장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L-SAM의 비행 성능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SNS에 적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L-SAM이 2~3년 내 전력화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는 개발 마지막 단계이고 내년 상반기쯤 양산 개시가 기대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달 23일 안흥시험장에서 실시한 시험은 요격미사일을 쏜 뒤 요격미사일의 슈라우드(shroud)라는 탄두(kill vehicle) 덮개를 분리하고 조금 더 비행하는 절차를 점검하는 단계였습니다. L-SAM 개발에 정통한 한 인사는 "본격적인 요격 시험은 2023~2024년에 할 예정이고, 그때 성적이 좋으면 전투 적합 판정을 받는다", "이후 양산이 결정되면 1~2년간 양산하고, 또 1년 정도 지나면 전력화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L-SAM은 갈 길이 구만리입니다. 차분히 지켜보며 성공을 기다려야 하는, 아직 여물지 않은 국산 무기인데 이번 대선을 거치며 정치적 무기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대선 주자와 청와대, 국방부가 마치 개발 성공이 임박한 양, 어느 한 정부의 공인 양 목청 높이면 개발자들은 죽을 맛입니다. 자칫 삐끗해서 일정이 지연될까 봐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일 것입니다. 국방과학의 책임자들이 청와대와 국방부를 상대로 교통정리 해주면 좋으련만 꿈쩍도 안 합니다. L-SAM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한 국방과학자는 "그러려니 한다"며 혀를 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