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기/전두환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우리들 입장에서는 국가가 너무… 차라리 우리가 뭐 촛불 들고 그렇게 할 때만 해도 뭔가 좀 변해지겠다 하는 그런 희망, 그런 거기서 기대를 가지고 말이지 그러고 했었는데. 요즘 뉴스나 이렇게 언론을 보면은 더 황당해져 가고 있어요. 더 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거 아닌가.
지난주 수요일, 고문 후유증 끝에 64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근태 의원의 10주기. 이날은 예년보다 다소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당의 이재명 대선 후보가 찾은 10주기 기념식에는 수많은 언론사 카메라들이 따라붙었습니다. 이어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미사에는 유은혜 교육부장관, 우상호 의원 등 세상이 '김근태 계'라고 분류하는 정치인들도 여럿 참석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장외 설전도 있었습니다. 야당의 윤석열 대선 후보가 공수처가 자신과 배우자의 통신기록을 조회한 것에 대해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서서 죽겠다'고 적은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여당의 김근태계 의원들은 "이 말은 고 김근태 의장이 1985년 12월 19일 서울지법 118호 법정에서 '짐승의 시간'을 증언하며, 한 말" 이라며 "추모도 하지 않은 후보가 이 말을 도용하는 건 모욕"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야당은 "해당 글귀는 알베르 카뮈가 원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매체를 타고 전해진 김근태 10주기의 주요 장면들은 대략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스포트라이트의 뒷편, 추모 미사가 열린 명동성당을 조용히 찾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간첩 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았던 피해자들이 그들입니다. 고령의 이들은 회당 뒤편의 의자에 앉아 아무말 없이, 1시간 남짓 진행되는 미사를 지켜보았습니다. 미사를 주관한 함세웅 신부는 미사 말미, 이들 피해자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일어난 이들을 향해 회당의 참석자들은 조용한 박수를 보냈고, 이들은 모자를 벗으며 어색한 감사의 인사를 표했습니다. 김근태 10주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주목을 끈 정치인들과 달리, 고령의 이들은 잠깐 동안의 주목을 받는 것도 익숙치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런 이들이 미사가 끝난 뒤 명동성당 앞 마당에 종이 쪽지를 든 채 줄지어 섰습니다. 종이엔 '고문피해자 지원법 제정하라!' 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미사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한파가 몰아친 그날의 찬바람을 맞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종이조각을 들고 한동안 서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의 방문이나, 언론사 카메라의 플래시는 없었습니다.
고문피해자 지원, 무엇이 문제인가
면담을 실시한 현재 시점에서의 진단실태를 살펴보았을 때, 8명이 PTSD (33%), 6명이 기분부전장애 (25%), 4명이 주요우울장애장애 (16.6%), 2명이 높은 자살 경향성을 (8.3%), 다른 2명이 중간 성향의 자살 경향성을 (8.3%), 자살경향성이 낮은 경우가 20명 (83.3%)이었고, 조중삽화가 1명(4.1%), 공황장애가 1명 (4.1%), 범불안장애가 1명(4.1%), 알코올 의존 및 남용이 3명(12.5%), 약물 의존 및 남용익 2명(8.3%), 정신증적 장애가 1명(4.1%), 적응장애가 3명(12.5%) 이었다. 총 24명 중 21명이 현재 시점에서 하나 이상의 정신과적 진단을 지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문피해자의 정신과적 진단 실태> 中
체계적인 치료 지원이 없는 상황 속, 피해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고통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2020년 인권의학연구소가 펴낸 <고문 피해자 인권상황 후속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고문 피해자 73명 중 절반 가까이가 심각한 수준의 PTSD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3.2%의 고문 피해자들은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러한 고문 피해자들의 구제를 지원하기 위한 법안이 지금껏 3번 국회에 발의됐습니다. 모두 고 김근태 전 의원의 아내 인재근 의원이 발의한 것이었습니다. 2012년 12월 첫 발의 때는 국회 법사위 법안소위에 상정되었으나,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의 반대로 논의가 무산돼 2016년 폐기됐습니다. 2016년 6월 비슷한 취지의 법안이 두 번째로 발의됐으나, 법사위 법안소위도 거치지 못하고 2020년 5월 다시 한 번 폐기 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뒤, 2020년 7월 다시 한 번 '고문방지 4법안'이 발의됐습니다. 고 김근태 의원이 몸담았던 정당을 계승하는 정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점한 의회 지형이지만, 법안은 다른 것들에 밀려 법사위에 계류하고 있습니다.
타국에서 온 고문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1998년 고문피해자 구제법안 (Torture Victims Relief Act)를 제정해 △고문 피해자 재활서비스 △고문 피해자의 법적 사회적 서비스 △치유센터 보건의료인들을 위한 교육과 연구를 국가 예산으로 지원하도록 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행안부는 "시민단체 협업해 사과" 권고…권력기관들은 "거부"
사법절차를 통한 배상은 피해자들이 겪은 경험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기념식이나 사죄와 같은 무형적이고 상징적인 방법들이 금전적인 보상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연구들에서 밝혀진 바 있다.
-<정의를 찾아서>, 국제고문피해자재활협회 (IRCT)
법률 제정 논의는 지지부진하지만, 그것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고문 피해자들의 재활을 지원하는 국제단체, 국제고문피해자재활협회(IRCT)는 책 <정의를 찾아서>에서 국가기관의 진심어린 사죄와 같은 무형적 방법들이 고문 피해자 지원에 갖는 의미가 크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과'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사과의 방법을 구체화하는 일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행정안전부가 과거사 정리 사업을 위해 설치한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하 과거사지원단) 관계자는 "관계 부처와의 협의를 하면서 이 방법에 대해 논의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문 피해자들의 일상과 치료를 지원하고 있는 시민단체들과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개진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의견은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사 지원단이 경찰·국정원·국방부 등 과거 고문 가해를 주로 저질렀던 기관들에게 '시민단체와의 협업을 통해 사과의 방식을 논의할 것'을 권유했으나, 해당 기관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어떤 방식의 사과가 필요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보니, 이들 권력기관들의 사과는 대부분 '사과문 배포'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기관의 사과 이행 상황을 체크하고 있는 행안부 산하 과거사지원단 조차 "우리도 일방적인 사과문 전달은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라고 보고, 사과 이행 실적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들의 정서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의도치 않은 '2차 가해'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문피해자들 대부분은 간첩 조작사건으로 복역하고 석방된 뒤에도 십수년 간 '보안관찰'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SBS 취재진과 인터뷰한 고문 피해자들은 대부분 집으로, 직장으로 시도때도없이 감시하러 찾아오는 기관원들 때문에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털어놨습니다.
이사영 (박정희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옛날에 비디오 가게도 해보고, 주차장도 해보고. 또 뭐야 자판기도 해보고, 또 어린이 통학차량 운전도 해보고 그냥 여러 가지 해봤어요. 근데 그게 또 그것도 쉽지가 않은 게 내 정체가 탄로 나면 잘 다니던 데도 나가야 돼요. 그런데 형사나 이런 사람들은 가끔 찾아오기도 하고 전화로 해서 오기도 하고 경찰서 불러서도 하고 그냥 나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정말 그때는 그냥 죽고 싶었어 솔직히.
이들은 재심으로 무죄 판결이 난 이후에도 어떻게 새 주소를 알고 찾아와 "사과 받을 의향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 기관원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보안관찰도 끝났고 간첩 누명도 벗었는데, 과거 자신을 잡아갔던 기관이 어떻게 내 집주소를 알고 찾아오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기관의 실무자들은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경직된 관료제 사회에서 결국 여러 기관들의 협조를 끌어내고, 실질적인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기관장 차원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경찰을 거느린 행정안전부와 국가정보원의 수장 자리에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국가폭력을 경험했거나, '시국 사건' 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대리한 경험이 있는 정치인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국가 폭력 문제에 애당초 무관심했던 정부나 정치인들이었다면 기대조차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처음엔 그래도 뭔가 다를 것이라 기대했던 정부이고 인사들이었기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고문 피해자들의 실망은 더욱 큽니다.
취재과정에서 꼭 정치인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일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미약하나마 정치적 이익이 생길 수 있게끔 충분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은, 저 같은 기자의 게으름도 고령의 고문 피해자들 가슴속 응어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케팅 뒤 기자가 들이민 마이크를 향해, 한(恨)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토해내는 박순희 씨의 말을 통해서였습니다.
박순희 (박정희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국정원장이 그래도 민주주의의 기치를 들고 했다는 사람인데, 그 사람들도 별반 다른게 없어요. 그래서 답답한 거예요. 언론도 맨날 한번 기사거리 쓸 거 없을 때 잠깐 오면 그만이고, 그거 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까 그러는거 아니에요. 고문당했을때 악몽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런 거 하고 싶지 않거든요. 난 아직도 그때 고문실의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떠올라 세탁기를 못돌려요. 근데 이런 일 또 생기면 나는 죽어도…나는 그냥 내 삶을 산 이유가 없잖아요.
**참고자료
-<정의를 찾아서, 법정에 선 고문피해자를 위한 심리사회적 지원>, 국제고문피해자재활협회(IRCT) 지음,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옮김
-<고문피해자의 정신과적 진단 실태>, 최현정, 이화영, 이훈진
-<고문 피해자 인권 상황 후속실태조사 보고서>, 인권의학연구소
▶ [취재파일] 정부는 아직도 '고문 가해자'들을 숨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