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여제' 박인비 선수가 지난 16일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끝난 LPGA 투어 ISPS 한다 호주여자오픈을 제패하면서 올림픽 2회 연속 우승 신화를 향해 힘찬 시동을 걸었습니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통산 20승을 달성한 박인비는 세계 랭킹 11위로 올라서면서 도쿄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청신호를 켰습니다.
골프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2회 올림픽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해 10월 2일부터 3일까지 프랑스 파리 콩피에뉴 골프장에서 열렸는데 4개국에서 남자 12명, 여자 10명, 총 22명의 선수가 참가했습니다,
남자 개인전은 10월 2일 하루 동안 36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여자 개인전은 다음날인 10월 3일, 9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치러졌습니다. 미국 시카고 골프클럽의 회원인 마가렛 에보트가 47타로 여자부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보기 플레이어'도 안 되는 선수가 올림픽 골프 첫 챔피언의 영예를 안은 것입니다. 이 당시 골프의 우승 트로피는 메달이 아닌 도자기였습니다.
파리올림픽 이후 골프는 올림픽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다시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대회는 무려 116년이 지난 2016년 리우올림픽이었고 그 역사적인 이벤트에서 '골프 여제' 박인비가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와 중국의 펑산산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을 걸었습니다.
여자골프는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우리가 2회 연속 우승을 노리는 강세 종목입니다. 골프는 선수와 코스의 이른바 '궁합'이 매우 중요한 종목입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토리 파인스 골프장에서 8번이나 우승한 것만 봐도 자신에게 유독 잘 맞는 골프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 코스에만 들어서면 최악의 스코어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쿄올림픽 골프 경기는 도쿄 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가스미가세키 컨트리클럽에서 열립니다. 1929년에 개장된 이 골프장은 먼저 동코스 18홀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32년 서코스 18홀이 오픈됐습니다. 일본 최초의 36홀 코스가 바로 이 가스미세키 컨트리클럽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명문 클럽입니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골프장은 숱한 국내외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현재 일본 최고의 남자 골퍼인 마쓰야마 히데키는 2010년 이곳에서 아시아 아마선수권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곳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2017년 11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의 골프 회동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곳에서 라운드를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햄버거를 먹었는데 이후 가스미가세키 골프 클럽 측은 '트럼프 햄버거'를 아예 공식 메뉴로 선정해 일반인에게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럼프에게는 좋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골프장이었지만 아베는 스타일만 구겼습니다. 아베는 1번 홀 페어웨이 벙커에 공을 빠뜨렸는데 벙커에 빠진 공을 쳐낸 뒤 트럼프 대통령을 뒤따라가기 위해 벙커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다 뒤로 나뒹굴며 벙커에 넘어졌습니다. 또 쓰러지면서 쓰고 있던 모자도 벗겨지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유서 깊은 이 골프장의 홍보위원장인 코시 마사오 씨와 올림픽 경기 장소인 동코스를 둘러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코스의 특징과 관련해 그는 자세한 설명을 해줬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골프장이 올림픽 코스로 선정돼 매우 영광입니다 일본은 물론 세계 각국의 정상급 선수들이 저희 코스에서 플레이하게 돼 기쁩니다. 이 코스의 전체적 특징은 대체로 평지로 돼 있고 나무가 많다는 것입니다. 2019년 이곳에서 열린 일본 주니어선수권의 데이터를 근거로 말하면 파4 18번 홀이 가장 어렵고 파4 9번 홀이 그다음으로 까다롭습니다. 그린의 언듈레이션(굴곡)이 심하기 때문에 퍼팅이 메달 색깔을 가릴 것으로 보입니다."
파4 18번 홀은 남자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블랙 티 기준으로 500야드나 됩니다. 여자의 경우 어떻게 세팅할지 확정되지 않았지만 420야드 이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전장이 긴 데다 약간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고 그린 옆에 대형 해저드까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샷이 상당히 어려울 듯합니다. 여자 선수가 드라이브샷을 250야드를 친다고 가정할 경우 170야드나 남는 데다 해저드와 벙커로 둘러싸인 그린에 공을 잘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4 9번 홀도 전장이 긴 데다 그린 앞에 턱이 높은 벙커가 있습니다. 일반 여자 선수의 키와 비슷한 높이였는데 벙커 뒤에 바로 핀을 꽂을 경우 파 세이브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후반 나인 홀이 시작되는 파3 10번 홀도 승부처로 꼽힙니다. 3년 전 동코스를 개조하기 전에는 이 홀이 가장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린 앞에 대형 해저드와 턱이 높은 벙커가 있는 데다 이단 그린으로 돼 있어 웬만하면 보기를 범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7월 이 코스를 현지답사한 박세리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의 분석도 코시 마사오 홍보위원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박세리 감독은 SBS와 인터뷰에서 "한국 골프장과 비슷한 점이 있고 코스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린의 경사도가 심해 그린에서 승부가 가려질 것 같다. 결국 퍼팅의 정확도가 어느 대회보다 요구되는 코스"라고 말했습니다.
박 감독은 "그린의 스피드가 빠를 경우 특히 거리 감각이 중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즉 예를 들어 10m 이상의 긴 퍼트를 남겨놓았을 경우 2단 그린에 스피드까지 빠르다면 3퍼트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린 스피드를 정확히 파악해 3퍼트를 범하지 않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린에서 공을 굴려봤는데 그린이 워낙 예민해 1m 내의 짧은 거리에서도 퍼팅이 조금만 부정확해도 공은 홀을 돌아 나왔습니다.
박세리 감독과 코시 마사오 홍보위원장의 말을 종합하면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그린의 굴곡과 스피드를 잘 파악해 빼어난 거리 감각으로 정교한 퍼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스의 이런 특성을 고려하면 장타자보다는 정확성이 뛰어난 선수가 금메달을 딸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즉 세계랭킹 1위 고진영과 리우올림픽 챔피언인 박인비가 출전할 경우 상당히 유리할 전망입니다.
도쿄올림픽 골프 출전 여부는 오는 6월 말 세계랭킹으로 가려지는데 랭킹 15위안에 든 선수 가운데 4명까지 출전할 수 있습니다. 19일 현재 랭킹을 보면 고진영이 1위, 박성현이 3위, 김세영이 6위, 이정은이 9위, 박인비가 11위입니다. 박인비로서는 세계 랭킹 15위 안쪽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한국 선수 중에서는 5위이기 때문에 도쿄 올림픽에 나가려면 한국 선수 1명을 더 제쳐야 합니다.
골프 전문가들은 이번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에서 최강 군단으로 불리는 한국 선수들과 홈 코스의 유리함을 갖고 있는 일본 선수들이 자존심을 걸고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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