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 의해 살해됐다. 범인은 34세 남성 김성민으로, 피해자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김성민은 피해자에 앞서 공용화장실에 들른 남성 6명은 살해하지 않고 그냥 보냈다. 여성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살해한 것이다. 김성민은 '평소 여성들이 날 무시했다'고 진술했다.
여성만 선별해 살해해도…'묻지마' 범죄
하지만 이 사건은 '묻지마' 범죄로 불렸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 냈다. 피의자 김성민이 '과거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으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표면적인 범행 동기가 없을 뿐더러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범죄 촉발 요인이 없다"는 이유도 들었다.
검찰 역시 '여성혐오와 무관한 조현병 환자에 의한 범행'이라고 경찰과 동일한 결론을 냈다. 검찰은 "김성민이 여성에 대한 반감 내지 공격성을 띤 것은 맞지만,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 편견이나 '여성이라면 무조건 싫다'는 식의 신념 체계가 있던 사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성민이 여성과 잠시 교제한 경험도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여성과 사귀어 보려는 의지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고도 덧붙였다.
법원은 김성민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하며 "김 씨가 여성을 혐오했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해 의식으로 인해,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남성이 모르는 여성을 선택적으로 살해했지만, 수사기관과 사법부 모두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렸다.
택시기사는 보낸 뒤, 약한 여성 골라서 범행
#2024년 9월 26일, 전남 순천에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경찰 공무원을 꿈꾸던 17세 여학생이 30세 남성 박대성에 의해 살해됐다. 피해자는 박대성과 일면식도 없는 관계로, 집으로 귀가하던 중 살해 당했다. 박대성은 피해자를 살해하기 전에 만난 택시 운전기사는 건너뛰고, 걸어가던 여학생을 800m 미행해 범행했다.
이 사건 역시 '묻지마' 범죄로 불렸다. 범행 전, 박대성은 자신을 승객으로 착각한 택시기사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택시기사는 범행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소지한 흉기를 감춘 채 택시기사에게 '그냥 가시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공격하기 쉬운 여성을 골라 살해한 것이다.
#지난달 5일, 23세 남성 장윤기는 광주 광산구의 한 보행로에서 귀가하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을 살해했다. 피해자는 장윤기와 모르는 사이였다. 당초 장윤기는 자신의 교제 요구를 거절한 여성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다른 분풀이 대상을 찾아 살해했다.
장윤기의 범행 대상은 '자신의 교제 요구를 거절한 여성'이었다. 일방적으로 호감을 표시했지만 거절 당하자 여성의 집에 찾아가 협박하는가 하면, 칼을 들고 이 여성의 집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스토킹 혐의로 경찰 신고가 접수된 뒤엔 휴대전화를 버린 채 여성의 주거지, 직장 근처를 배회했다. 끝내 이 여성을 찾지 못하자, 장윤기는 또 다른 여성을 물색했다. 더 약한, 제압하기 쉬운 '홀로 길 가던 여고생'을 표적으로 삼아 살해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이 사건을 이상동기 범죄, 즉 '묻지마' 범죄로 분류했다. 1) 피해자와 장윤기가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2) 피해자가 범행 동기를 제공하지 않았고 3) 장윤기가 '자살을 결심한 뒤 우발적으로 범행했다'는 취지로 진술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도 아닌 장윤기가 살인을 저지른 데엔 '이상동기' 외엔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장윤기가 다른 여성을 스토킹했고, 이 여성을 살해하는 데 실패해 분풀이성으로 여고생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제서야 경찰은 장윤기의 범행을 '계획범죄'라고 규정했다.
"나흘에 여성 한 명이 모르는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해"
여성 94명이 모르는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한 이유는 무엇일까. 범행동기가 언급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면, '성폭력 시도'(21.28%)가 가장 많았다. 여성을 성폭행한 뒤 살해하거나, 성폭행을 시도하려다 실패해 살해한 것이다. '그냥', '아무나 폭행하고 싶어서'를 포함한 기타(14.89%), '자신을 무시해서'(12.77%), '여자라서'(11.7%) 사유가 뒤를 이었다. 아무나 폭행하고 싶을 때 표적이 되는 대상, 그냥 살해할 수 있는 대상 모두 여성인 것이다.
여성은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137명이었다. 살인이 미수에 그쳐 살아남은 여성은 252명이었다. 최소 22.5시간마다 여성 1명이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묻지마' 범죄가 물어보지 않은 맥락
김성민, 박대성, 장윤기가 살해한 대상은 모두 '여성'이었다. 하지만 범죄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성별 요인은 배제됐다. 상대적으로 더 약자이면서 제압하기 쉬운 여성을 노린 여성 살해(Femicide)였지만, 단순히 '묻지마' 범죄로만 기록됐고, 이후에도 그렇게 기억됐다.
'묻지마' 수식어는 범행이 실현될 수 있었던 사회적 맥락을 지운다. '왜 여성이 표적이 되어야 하는가?'는 묻지 않는다. 여성이 선별적으로 살해되거나 분풀이 대상이 되는 이유는 간과하고, 가해자의 서사와 범행 당시 피해자의 상황만을 부각한다. 김성민이 조현병을 앓고 있었고 피해자는 남녀 공용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장윤기가 구애하던 여성에게 거절 당했고 피해자는 어두운 길가를 홀로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 살해는 구조적 문제로 논의되지 못한 채 '하필 그때 피해자가 그곳에 있었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된다.
반복되는 여성 살해…10년째 정부 기준·통계조차 없어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으로 쌓아 올린 사회 안전망을 비웃듯 여성 살해는 반복됐다. 여러 대책을 마련했는데도 여전히 여성이 범죄 표적이 된다는 건, 문제 진단이 잘못됐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정부 차원에서 여성 살해, 여성 폭력을 명확히 정의하고 별도 통계를 집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10년째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 했다. 정부의 몫인 여성 살해 현황 통계는 앞서 언급한 자료처럼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토대로 집계하고 있다.
여성 살해 정의와 기준 마련을 주저하는 정부와 달리, 국제사회는 여성 살해 유형을 3가지로 규정한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와 유엔여성기구(UN WOMEN)가 공동 개발하고 유엔통계위원회의 최종 승인을 받은 기준에 따르면 여성 살해는 아래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자행된 여성 고의 살해
▲현재 또는 과거 배우자, 연인, 동거 파트너, 데이트 상대 등이 저지른 살해
2) 기타 가족 구성원에 의해 자행된 여성 고의 살해
▲혈연관계, 혼인 또는 입양으로 맺어진 친척이 저지른 살해
▲피해자와 같은 가구에 거주하는 사람에 의한 살해
3) 친밀한 파트너나 가족 외 가해자에 의해 자행된 여성 고의 살해
▲과거 가해자가 피해자를 스토킹하거나 괴롭힌 전적이 있는 경우
▲피해자를 납치한 경우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증오범죄
▲살해 전 성폭력이 자행된 경우 등
유럽연합 산하의 유럽성평등연구소(EIGE)도 여성 살해가 발생하는 맥락을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대인관계적 ▲성적 ▲사회적 ▲범죄적 ▲정치적 맥락으로, 사회적 맥락은 전통적인 성 역할, 성적 규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연계된 살해를 포함한다. 영국,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 등 국가는 여성 살해를 별도 범죄로 규정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영국은 10년 안에 여성 폭력 발생률을 절반으로 줄이겠단 목표 하에 <폭력과 학대로부터의 자유 : 여성과 소녀가 안전한 사회를 위한 범정부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정혜/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묻지마' 범죄라고 명명해버리면 가해자가 사이코패스인지, 정신질환자인지를 묻게 된다. 이런 범죄는 사이코패스가 저지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후 나올 수 있는 대책은 정신질환자 통제에 그친다. 정부가 여성 살해를 명확히 정의하면 범죄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전달할 수 있고, 범행 동기를 조사하는 수사부터 처벌, 범죄 예방활동까지 방향성이 달라진다. 국가 차원에서 여성 살해 통계를 집계하고 관리한다면 구조적으로 이를 줄이려는 노력도 동반될 것이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된 지 10년이 지났다. 이후에도 수많은 죽음이 있었지만, 정부가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지도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여성 살해' 정의조차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을 표적 삼은 범죄 앞에 10년째 '묻지마' 수식어가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연한 여성 살해의 해법을 논하려면 범죄를 규정해 공식 통계 집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료 출처
유럽성평등연구소(EIGE), Improving the collection of national administrative data on femicide in the EU (2025.7)
유엔 여성기구(UN WONEM), FEMICIDES IN 2024 : Global estimates of intimate partner/family member femicides (2025.11)
UK GOV, <Freedom from violence and abuse: a cross-government strategy to build a safer society for women and girls> (2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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