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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북적북적]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421: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런 이유로, 이 책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가 문체文體'다. 그게 어떻게 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 편이세요? 아니면, '휴가지에서 책을 읽고 있는 건 좀 아깝지만 오가는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미뤄뒀던 이 한 권을 읽자' 딱 한 권 정도만 챙겨 넣으시는 쪽인가요? 또는, '책을 읽지 않는 게 휴가지!' 파도 있을 수 있겠네요.

이번주 [북적북적]에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우리나라에서 이번에 세번째 출간됐습니다. 1판은 무려 1999년, 유로화가 탄생하던 해인 25년 전에 나왔습니다. 2판은 2015년에 출간돼서 또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3판은 아직 따끈합니다. 6월 10일에 1쇄가 나왔는데, 지난 24일에 벌써 2쇄가 찍혔습니다. 역시 정말 대단하죠, 하루키의 인기란. 하루키를 '동시대 작가'라고 부르기에는 세대가 좀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90년대에 누렸던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에서 우리가 여전히 이렇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어찌 생각하면 경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지나치게 건강하면 병적인 어두움(이른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싹 사라져버려서 문학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하고 지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질문에 대답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얘기하겠다. "그 정도로 쉽게 사라져버릴 정도의 가벼운 어두움이라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문학으로 승화될 수 없습니다."

'소확행'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신조어라는 것, 혹시 알고 계셨나요? 하루키가 참 좋아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A small, good thing]에서 하루키가 따와 만든 말입니다(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에세이집은 하루키의 많은 에세이집들 가운데서도, 하루키가 그야말로 긴장을 풀려는 듯한 느긋한 어조로 자신의 일상의 행복, 잡다한 취미와 소소한 기쁨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글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4월이 돌아오면, 누가 뭐래도 가장 기다려지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보스턴 마라톤이다. 내 경우에는, 대충 12월 무렵부터 보스턴 마라톤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나는 마치 중요한 데이트 전날 오후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져 침착성을 조금씩 잃어간다. 5킬로미터, 10킬로미터와 같은 짧고 평범한 레이스에 익숙해지려고 몇 번 달려보고, 1월과 2월에 꽤 먼 거리를 달린 다음 3월경에 한 번 하프마라톤에 나가 구간에 따른 속도와 컨디션을 조절해보고(올해는 뉴베드퍼드의 하프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는데, 꽤 즐거운 레이스였다), 드디어 '정식 시합'에 임한다. 나 같은 중년층의 주자에게도 나름대로 준비라는 것이 필요하다. 하긴 아무리 기를 써봤자 좋은 기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도 꽤 바쁠 텐데 참 여러 가지로 사서 고생한다고 지적한다면 정말로 그 지적대로여서, 대답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첫머리에 드렸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제 경우엔 휴가 가서 책을 읽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루키를 읽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도 기억합니다. 몇 년 전 휴가지에서 동행이 챙겨온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집어들게 됐습니다. 스페인의 이비자 섬 해변에서 그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들 중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먼 북소리]는 그야말로 아시아 에세이의 '고전'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기]를 처음 읽었던 그 여름의 열기를 언제까지나 생생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이비자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 책의 장들을 넘기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하루키가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종류의 '결합'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튼 그때부터 왠지 휴가지에서 읽는 책으로는 하루키의 에세이가 딱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후로 왠지 '일상 생활' 속에서는 하루키를 집어들게 되지 않고, 휴가 갈 때 챙겨 넣곤 합니다. '역시 하루키로 챙겨오길 잘했어' 생각한 적도, '다른 책을 가져올 걸'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제게 휴가철은 '왠지 하루키'입니다.
그런데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불가사의한 체험이다. 이를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과는 인생 그 자체의 색깔도 조금은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종교적인 체험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뭔가 인간 존재에 깊숙이 와 닿는 것이 있다.

42킬로미터를 실제로 달리고 있을 때는 '도대체 내가 왜 일부러 이런 지독한 꼴을 자처하는 거지? 이래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몸에 해로울 뿐이지(발톱이 빠지고, 물집도 생긴다. 그 다음 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이 든다)' 하고 상당히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결승점에 뛰어 들어가 한숨 돌린 다음 건네받은 차가운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뜨거운 욕조에 잠긴 채 바늘 끝으로 발바닥에 부풀어 오른 물집을 따낼 무렵에는 '자, 이제 다음 레이스에서는 더 분발해야지' 하고 다시 마라톤에 대한 의욕으로 불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건 도대체 어떤 심리 작용일까?

아마 하루키만큼 "고평가됐다!". "아니다! 저평가됐다!" 생각들이 엇갈리는 작가도 적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루키는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언제까지나 '오랜 친구'로 남으리라는 점입니다. 오래된 친구는 늘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너 요새 왜 이래?" 시비도 좀 걸고 싶어집니다. 오래된 친구니까요. 관심이 없고 애정이 없다면 애초에 시비를 걸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비를 걸고 싶어서 이번엔 전투적인 태세로 딱! 만났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도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서게 되기도 하는 게 또 오랜 친구입니다. 하루키는 아마 우리 모두에게 그런 친구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감흥은 마라톤을 풀코스로 달렸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가령 마라톤 하프코스를 달렸을 때에는 그런 흥분을 느낄 수 없다. 그저 '21킬로미터를 마음껏 달린다'는 것뿐인데 왜 그런 차이가 날까. 물론 마라톤 하프코스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건 달리기가 끝나면 곧장 해소되는 종류의 괴로움이다. 하지만 마라톤 풀코스를 끝까지 달리고 나면, 인간이(적어도 나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신경에 거슬리는 자잘한 마음의 앙.금. 같은 것이 뱃속에 가득히 남게 된다.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이 바로 조금 전까지 극한 상황에서 맛보았던 그 '괴로움 같은 것'과 조만간 다시 한번 대면해서, 그 나름대로 어떤 매듭이 지어지는 걸 봐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다시 한번 되풀이해야만 한다. 그것도 좀 더 잘할 수 있게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파김치가 되면서까지 포기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12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마라톤 풀코스를 계속 달리는 것이리라. 물론 뭔가 해결을 볼 수 있을 만한 것은 전혀 찾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마조히즘'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호기심과 비슷한 종류의 것일 게다. 계속해서 횟수를 늘려가고 한계를 조금씩 올려감으로써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자기가 아직 모르는 것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고,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끌어내보고 싶다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 생각은 평소 내가 장편소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과 거의 비슷하다.

하루키가 30년 전에 쓴 이 에세이들에는 사실 지금에 와서는 공격받기 딱 좋은, '시절이 지난' 구절들도 분명히 군데군데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루키는 일본의 '버블경제' 안에서 삶에 대한 관점을 형성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정말이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싶은 부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대사를 인용해서 표현하자면, 하루키의 글들에서는 "돈냄새가 납니다". (하루키는 그야말로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가 존재론적으로 갈등하고 도전해야 했던 '버블경제' 속의 문제의식과 지금 자라나는 이들이 맞닥뜨리게 될 문제의식은 어쩌면 달라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시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루키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이 시대 많은 이들의 친구로구나, 이제 책을 읽기 시작하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문학과 인생에 진솔하게 치열한 어떤 문심文心과 그 문심을 떠받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의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벼려온 '건강', 그리고 이토록 성공적인 프로 작가로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까지 이르는 경우에 필수적으로 지니고 발전시켜야 할 '문체'가 모두 확인되는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 어떤 조직에도 속하는 일 없이 혼자서 꾸준히 살아왔지만, 그 20여 년 동안에 몸으로 터득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개인과 조직이 싸움을 하면 틀림없이 조직이 이긴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결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이 조직에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어수룩하지 않다. 분명히 일시적으로는 개인이 조직에 대해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조직이 승리를 거두고야 만다.

때때로 문득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정말 피곤하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힘껏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 존재 기반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관철하기 위해 인간은 가능한 한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해두는 것이 좋다고(하지 않는 것보단 훨씬 낫다) 생각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한정된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저는 하루키가 90년대의 시대말적인 분위기 안에서도 설파한 근면한 행복, 일과 삶에 대해 꾸준한 근면성을 담보하는 철학, 단 한 번도 남 듣기 좋으라고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한 말이 없는 사람인데도 온세상으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얻은 그 '쿨한 듯 펄펄 끓어오르는' 진심이 그야말로 신변잡기 에세이를 모은 이 책에서 오히려 더 잘 묻어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자꾸만 나누고자 하는 이 편협한 마음이 겸연쩍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하게 되는) '진짜' 소확행, 워라밸의 '진짜' 밸런스가 이 30년 전의 글들 속에 여전히 생생합니다.
결국 구두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저는 올여름 휴가를 건너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 [북적북적]에서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으로 충분했다고 갈음하려 합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하루키, 어떠실까요. 다가오는 휴가철에 ([북적북적]과 함께!) '하루키해 보시면' 아마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될 거라고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문학사상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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