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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한국영화 명대사 100선으로부터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09

올해 들어서만도 《파묘》와 《패스트 라이브즈》, 《노량》(2023), 《오아시스》(2002) 등의 각본집이 출간됐다. 소위 ‘굿즈’가 영화관 행차 이유의 한 축을 형성하고 팬덤의 완성이 결국 ‘상품’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은, 민희진 씨가 랜덤 카드 만드는 짓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일갈한 바로 며칠 뒤 하이브의 인기 K팝 그룹 세븐틴의 새 앨범이 포토카드만 빼고 일본 도쿄 거리에 박스채 버려진 일 만큼이나 서글픈 일이지만, 어쨌든 영화 각본집의 잇단 출간은 영화의 대사만큼은 소유하거나 곱씹고 싶은 생각이 적어도 티끌만큼은 있었을 것이므로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 1월부터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대사극장: 한국 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 전시가 오는 주말 막을 내린다. 195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한국 영화의 유명한 대사를 모은 이 전시는 지난해 발간된 영상자료원 기관지 《아카이브 프리즘》 12호에 실린 ‘대사극장-한국 영화를 만든 대사 100’을 저본(底本)으로 한다.

《아카이브 프리즘》에 따르면 영화 속 대사는 “서사를 좌우하는 영화의 핵심 저작 도구인 동시에, 시대를 함축하는 문학이자 한국 사회의 고뇌와 욕망을 드러내는 풍속화다”

최근 거의 불가해한 수준으로 연속 흥행하고 있는 ‘범죄도시’ 시리즈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 사회의 고뇌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때, 마석도가 입에 달고 다니는 대사 “나쁜 놈들은 잡아야 돼”는 그의 무소불위한 주먹과 더불어 대중의 불안과 욕구를 영화로나마 해소시켜주는 것이 인기 비결이 아닐까 싶다.

나는 마동석의 저 대사를 들을 때마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 박중훈(우형사 역)이 범인의 애인 최지우에게 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

이 대사 역시 ‘한국 영화를 만든 대사’ 100선에 들어간다. 《아카이브 프리즘》 편집진과 영화 관련 지식인 여덟 명이 협업해 가려 뽑은 100개의 대사 중 전시장을 찾은 약 일만 오천 명의 관람객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대사들은 다음과 같다고 영상자료원 측은 전했다. (주관람객이 2030 여성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 프리즘》12호 ‘대사극장 - 한국영화를 만든 대사 100’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윤희에게, 2019)
“나 너 땜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주세요” (헤어질 결심, 2022)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아가씨, 2016)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베테랑, 2015)
“너나 잘하세요” (친절한 금자씨, 2005)
“니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이 니 생각보다 훨씬 길어.” (내가 죽던 날, 2020)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세 편으로 가장 많은데, 독자 여러분은 이 대사들에서 한국 사회의 어떤 풍속화가 읽히시는지?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하기는 힘든데 필자는 약간의 시니컬리즘과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최후의 자존심과 ‘존버’ 인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화는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대사로도 기억된다. 시대순으로 배열된 ‘100선’에서 일부를 뽑아 시대와 영화를 읽어본다.

1950년대 한국 사회에 파란을 일으켰던 불륜 소재의 영화 《자유부인》(1956)에는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적당히 주십시오…최고급품입니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양품점에서 ‘일하는 여성’이 된 대학교수의 정숙한 아내 선영에게 무역상인 사기꾼 백광진이 접근하며 하는 말이다.

《아카이브 프리즘》 편집진은 이 대사가 ‘급격하게 밀려오는 서구의 물결 속에서 서양의 문물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려는 허세, 배금주의 풍조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70년이 지났지만 백화점의 소위 명품 매장에 오픈런 줄이 새벽부터 길게 늘어서는 요즘, 이런 풍조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난 니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80년대 중반 엄청나게 히트한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에서 주인공 오혜성 그 자체나 다름없다고 할만한 대사다. 영화평론가 허남웅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어처럼 퍼진, 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 대사 중 하나로’,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게 낭만으로 비춰지던 시절을 상징하는 대사’라고 설명했다. 며칠 전에는 ‘데이트 살인’이 이슈가 됐는데, 사랑을 위해서 ‘남의 목숨’을 바치는 요즘 세태가 무섭다.

IMF 외환위기에 온 나라가 휘청이던 1997년 개봉했던 정우성 주연의 《비트》에는 “나에겐 꿈이 없었다”라는 대사가 의도와 상관없이 시대를 반영하면서 청춘들의 뇌리에 남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짤막한 명대사들이 나왔다. “나 다시 돌아갈래”(박하사탕,2000),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봄날은 간다,2001), “니가 가라 하와이”(친구,2001 ※100선에는 못 들어갔지만 “내가 니 시다바리가?”를 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대사 빼면 시체인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2002)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경수야,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요즘 시대에 더 들어맞는 대사 같다.

‘100선’에는 요즘 민희진 기자회견으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대사도 들어있다. 김지운 감독의 느와르 《달콤한 인생》(2005)에서 조직 보스 강사장(김영철)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던 부하 선우(이병헌)을 작은 실수 하나로 처단하려고 한다. 선우는 탈출해서 나중에 강사장과 마주한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강 사장은 답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2010년대에 나왔던 범죄 느와르 영화의 다음 대사들은 21세기가 시작된 지 10년이 넘어서도 여전히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세상을 환기시켰고, 때로는 현실을 앞서가면서 지금까지도 유효한 대사로 남았다.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으이? 같이 밥 묵고 으이? 싸우나도 같이 가고 으! 마, 이 X새끼야, 다 했어”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 2012)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내부자들, 2015)

보수 일간지 논설주간이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재벌 회장에게 한 두 번째 대사는 영화 개봉 몇 달 뒤 교육부 고위 관료와 기자들과 밥자리에서 그대로 재현돼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이 영화로 첫 번째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병헌은 이런 수상 소감을 남겼다.

“영화니까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어떤 현상들과 사회를 극적으로 몰고 가려고 애쓰지 않았나 싶어서 약간은 과장된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촬영을 했어요. 근데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은 현실이 ‘내부자들’을 이겨버린 것 같은 상황이란 생각이 들어요.”

《파묘》와 같은 오컬트 장르지만 정치사회물 대사 이상으로 유행했던 《곡성》(2016)의 대사 “뭣이 중한디? 뭣이 중허냐고?”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상황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영화 대사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사실은 한국보다 먼저- 할리우드에서도 영화 역사상 최고의 대사 100선을 선정한 바 있다. 영화 역사 100년을 기념해 지난 2005년, 일천 오백 명의 영화 관계자들이 참여한 미국영화연구소(AFI)의 리스트가 바로 그것이다.

그 중 1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솔직히 말해서 그대여, 내 알 바 아니오”(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라는 클라크 게이블의 대사였고, 2위는 말론 브란도가 《대부》(1972)에서 지나가듯 내뱉은 “절대 그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거야”(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라는 대사다.

열흘 뒤면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영화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가 9년 만에 돌아온다. 2005년 AFI의 명대사 선정 작업 이후에 나온 영화라 100선에는 빠져 있지만 재선정 작업을 한다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이 미친 대사도 한자리 차지하지 않을까.

“오, 멋지군. 정말 끝내주는 날이야!” (Oh, what a day. What a lovel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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