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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저도 잘 살고 싶었습니다" 이웃의 죽음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여덟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세상 등져…'대규모 전세사기' 그 이후

[취재파일] "저도 잘 살고 싶었습니다" 이웃의 죽음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5년 전 서울로 이직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말부부였던 남편과 살 집을 급하게 구해야 했습니다. 햇병아리 직장인이 모아둔 돈은 별로 없었고, 부모님께 손 벌릴 형편도 못됐습니다. 집값이 지금처럼 오르지 않았음에도 서울 하늘 아래 평범한 신혼부부가 고를 수 있는 보금자리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예산 안에서 구할 수 있는 단출하지만 멀끔한 집들은 대부분 신축 빌라였습니다.

당시 신축 빌라를 전문으로 중개하는 부동산과 반나절 동안 이런 집 여러 채를 보고 다녔습니다. 언덕지고 좁은 길목을 지나 건물 한 벽면에 붙어 있는 핑크색 현수막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즉시 입주 가능', '1인 가구, 신혼부부 환영'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린 집들은 하나같이 비좁았지만, 빠듯한 주머니 사정 안에선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빚을 보태 전세금 2억 원 중반이면 거실 하나, 방 두 개 정도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은행은 꼬박꼬박 대출을 내주었고, 공인중개사는 안전한 집이라고 안심시켰으며 정부도 부동산 정책으로 전세 대출과 갭투자를 부추겼습니다. 그 핑크색 현수막 어디에도 '보증금 미반환 위험'을 알리는 표식은 없었습니다.

입주 시기가 안 맞아 그 빌라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게 된 건 몇 해가 흘러 인천 미추홀구와 서울 강서구 일대 전세사기가 터져 나오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세입자 처지지만, '괜찮은 임대인 만난 걸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세사기를 '안타까운 그들의 문제'로 치부했습니다.

지난 2월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 하고 있는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

'누구나 전세사기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난 건 얼마 전 대구의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을 들은 이후입니다. 38살 아이 엄마였던 고인은 세 들어 살던 집에 대한 경매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법 상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숨지고 난 직후 '피해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가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은 8,400만 원. 현행 특별법 사각지대인 다가구주택 후순위 임차인인 데다 소액 임차인에도 해당되지 않아 최우선 변제금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보증금을 단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고인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그러나 개별 등기가 안 되는 다가구주택 특성 탓에 특별법에 따른 경공매 유예나 우선매수권 활용 방안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숨진 당일까지 월세를 요구하며 인터넷 선을 자른 임대인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게 대구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의 말입니다.

"빚으로만 살아갈 자신이 없다", "살려 달라 애원해도 들어주는 곳 하나 없다" 고인의 유서에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인 유서 일부분 발췌 (사진=대구 전세사기 피해자대책위 제공)

전세사기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건 정부 통계로도 뒷받침됩니다. 지금까지 국토부가 인정한 전세사기 피해자만 1만 5천여 명. 꿈을 구겨 넣은 집이 악몽이 된 사람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그 가운데 8명이 세상을 스스로 등졌습니다. 간혹 용기 낸 피해자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비쳤지만 '전세사기는 사인 간 거래'라는 전 국토부 장관의 말에 좌절하고 스러진 피해자는 더 많았을 겁니다. 통장에 찍혀 본 적도 없는 돈을 빚으로 떠안은 부산의 30대 가장. 스무 살부터 악착 같이 번 돈을 모아 결혼을 준비하던 수원의 20대 예비신부. 취재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2, 30대 사회 초년생이거나 어린아이를 둔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더 꼼꼼히 전세사기범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이런 구조를 방관하는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전세사기 이후'의 전세 제도는 달라져야 한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특별법 개정 촉구

문제는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나왔음에도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겁니다. 특별법 상 피해 지원책도 부실하지만 피해 예방의 측면에서 여전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전세사기 이후의 전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주택 전문가들 사이 다양한 해법이 논의됐습니다. 임대인들로부터 10% 정도의 보증금을 예치하도록 하는 '에스크로 제도'를 통해 일정한 자본력이 있는 사람들만 임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는 국토부 산하 국토연구원에서 제안됐죠. 지금처럼 무일푼으로 수십 수백 채 집을 소유하다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전세 계약을 할 때 보증금을 매매가의 일정 비율 이하로 규제하고 나머지 금액을 월세로 전환해 계약하는 '전세가율 상한제'도 대안으로 꼽힙니다. 집주인도 자기 자본을 최소 월세로 전환된 보증금만큼은 투자해야 하니 '무자본 갭투자'를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전세권 등기를 의무화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구멍이 드러나고 있는 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여러 대안이 이제는 정부 정책으로 구체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임대인이 세입자로부터 빌려간 돈을 못(안) 돌려줘서 사람이 죽고 있거든요. 대단히 심각한 지경인데 정부가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는 거죠." 한 주택 전문가의 뼈아픈 말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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